분류
1. 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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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光化門)
경복궁의 정문. 1395년(태조 4년) 처음 지어질 때는 사정문(四正門)이라 했다가 1425년(세종 7년) 광화문으로 개칭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1864년(고종 1년) 중건했으나,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짓기 위해 1927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한 후 6.25 전쟁을 거치면서 문루가 소실되었다. 이후 복원 공사에 들어가 1968년 12월 11일 준공했지만 원자리에서 조금 벗어나 있고 철근 콘크리트 구조라는 한계 때문에 2006년부터 다시 이전·복원 공사에 착수해 2010년 8월 15일 준공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광화문 문서 참조. | |
동십자각(東十字閣)
궁성을 수비하는 망루로서는 경복궁에 현존하는 유일한 전각. 7단으로 이루어진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이 세워져 있다. 1867년(고종 4년) 지어졌으나 1924년 도로를 확장할 때 궁장을 헐면서 길 한복판에 섬처럼 놓이게 되었다. 광화문과 남쪽 궁장을 복원하면서 일제 때 헐려나간 궁장을 동십자각과 연결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교통 문제 때문인지 실현되지는 않았다. 참고로 서쪽 맞은편에 있던 서십자각은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지을 때 철거되었는데, 이쪽은 복원하지 않고 남쪽 궁장을 서쪽 궁장과 맞바로 연결해버렸다. |
2. 외조
2.1. 정전 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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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편전 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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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궐내각사 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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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전(修政殿)
근정전 서쪽에 자리한 전각이다. 월대 위에 있는 정면 10칸, 측면 4칸으로 된 꽤 큰 건물로, 궁궐에 부속된 관청이 밀집한 궐내각사 권역의 중심이었다. 세종 때는 집현전이 있던 곳이었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867년(고종 4년) 중건했고, 고종 때는 군국 기무처와 내각이 이곳에 있었다. 주변에 있던 2백여 칸의 다른 궐내각사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때 모두 철거되어 현재는 수정전만 남아있다. 2차 복원 정비 사업의 2단계가 진행될 2013년~2018년에 주변 건물들을 복원할 예정이다. 허나 최신 위성 사진으로봐도 복원은커녕 별진척도가 없어보인다. |
3. 내조
3.1. 침전 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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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녕전(康寧殿)
임금의 침전으로 사용한 정면 11칸, 측면 5칸의 전각으로 건물 앞에는 월대가 시설되어 있으며, 주변에는 강녕전의 소침인 연생전·경성전·연길당·응지당이 있다. 강녕전진찬도(康寧殿進饌圖)에는 강녕전과 4채의 소침이 회랑을 통해 서로 이어진 것으로 나오지만 현재는 연결되어 있지 않다. 다만 소침의 툇마루 등을 통해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1395년(태조 4년)에 세워질 때 정도전이 명명한 전각 중 하나이며, 1553년(명종 8년) 화재로 불탔다가 1년 뒤에 중건했지만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터만 남았다가 흥선대원군이 다시 중건했다. 고종 때 중건된 강녕전은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희정당을 복구하기 위해 1920년 창덕궁으로 이건했고, 지금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했다. | |
아미산(峨嵋山)
경회루의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4]으로 교태전의 뒷편에 있다. 백두대간과 한북정맥을 경복궁까지 이어서 교태전에서 낳는 왕세자와 대군들에게 백두산의 기를 주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3단의 화계(花階)로 된 출입구에는 2.6m 높이의 육각형 벽돌 굴뚝 4개가 있는데, 교태전의 온돌방에서 나오는 연기를 배출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각 굴뚝의 여섯 벽면에는 다양한 길상문으로 아름답게 꾸며 그 예술적 조형미와 가치를 높게 평가받아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1호로 지정되었다. 선장문 안쪽의 실제 아미산 영역은 출입불가이며 입구 계단인 아미산 굴뚝 주변도 올라갈 수 없다. | |
소주방(燒廚房)
동궁의 북측과 자경전의 남측 사이에 있으며, 궁궐 내 음식물을 보관·조리·제공하는 식생활 공간으로, 수라상을 비롯해 왕실 잔칫상 등을 만드는 궁중 요리원이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상궁들이 음식을 하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1395년 경복궁 창건 이후 궐내 제반 시설을 정비하면서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고종 2년(1865년) 경복궁 재건 시 다시 지어졌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조선 물산 공진회가 개최되면서 여러 전각들과 함께 헐려 없어졌다. 2015년 2월 16일 복원했다. 2015년 5월 8일부터 10일까지 개방, 궁중 음식을 시연하는 행사를 열었다. 2018년 현재, 궁중 다과와 전통차를 판매하는 찻집으로 개수되어 운영 중에 있다. 굳이 차를 마시지 않더라도, 경복궁 내에서 별도의 허가 없이 실내에 들어 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전각이라는 점에서도 경복궁을 방문한다면 한 번쯤 들러 볼 만하다. |
3.2. 연침 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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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전(慈慶殿)
원래 이 자리에는 자미당(紫薇堂)이 있었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헌종의 어머니이자 고종의 양어머니인 대왕대비 조씨를 위해 지었지만 1873년(고종 10년) 화재로 소실되어 1888년(고종 25년) 중건했다. 동쪽 정면은 정면 10칸, 측면 4칸의 자경전이고, 여기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청연루(淸燕樓)와 정면 6칸, 측면 2칸의 협경당(協慶堂)이 맞닿아 있으며, 서쪽 뒤쪽으로 정면 2칸, 측면 6칸의 방실이 연결되어 있다. 경복궁에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시대부터 남아있는 연침 건물이며,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09호로 지정되었다. | |
자경전 십장생 굴뚝
자경전 내부의 온돌방과 연결된 여러 개의 굴뚝을 하나로 모아 만든 굴뚝이다. 전돌을 쌓아 만든 담장 벽면의 중앙에는 장수를 의미하는 소나무·거북·사슴·불로초 등의 십장생과 그 밖의 각종 길상을 상징하는 동물들을 배치해 자경전의 주인인 대왕대비 조씨의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미학적 가치가 뛰어나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0호로 지정되었다. 자경전과 합쳐서 지정된 게 아니라 굴뚝만 독립적으로 지정된 것이다. | |
흥복전(興福殿)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처음 지어졌으며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창의궁의 함일재를 옮겨 지었다고 전한다. 침전 건물이었으나 사신 접견 및 임금이 학문을 연마하는 경연과 양로연 장소로도 사용됐다. 대왕대비 조씨가 1890년 이 곳에서 승하하였다. 아관파천 이후 제 기능을 상실했다가 1917년 소실된 창덕궁 침전 권역을 재건할 때 옮겨져 사라지고 해당 자리에는 일본식 정원이 들어섰다. 2015년 복원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시공업체가 복원 기준을 어기고 벽체와 지붕에 시멘트 20포대 분량을 섞은 재료를 쓴 사실이 드러나 2018년 4월부터 석 달 간 재공사를 시행하여# 2019년 복원을 완료하였고 단청은 2020년대 초에 칠할 예정이다. 내부에는 현대식 화장실과 냉난방, 전기 시설 등을 최초로 갖춰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
3.3. 동궁 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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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문
경복궁 주차장에서 동궁 영역으로 출입하는 문으로, 본래 한국 최초의 극장인 원각사의 정문이다. 이후 국립 국악원 정문으로 이용되었고, 영추문의 대용으로 사용되었다. 1975년 영추문을 콘크리트로 재건하면서 현자리에 자리하게 되었는데, 문화재청에서는 이를 원각사의 정문으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정문이라는 이름도 동쪽에 있는 출입문이라며 임의로 부르던 명칭이며, 건물 내역에 대한 관련 표지판조차 없다. 따라서 원 자리인 원각사 터로 이전 복원하겠다는 얘기는 나오지도 않는 상황. 원각사 터는 종로구 신문로1가 57번지에 자리한 대우 건설 빌딩 일대이다. 과거 모습 사진에 나오는 흰색 근대식 건물은 1939년에 건청궁 터에 건립한 구 총독부 미술관 건물이다. 해방 후에는 경복궁 미술관, 전승공예관 등의 전시시설로 활용하다가 건청궁을 복원하기 위해 1998년 철거했다. | |
자선당(資善堂)
1427년(세종 9년) 세자의 생활 공간으로 지어진 정면 7칸, 측면 4칸의 동궁(東宮)으로 세자였던 문종이 단종을 얻고 아내 현덕왕후 권씨를 잃은 곳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고종 때 중건되어 순종이 세자로서는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지냈다. 아관파천 이후 주인을 잃었으며 1914년 오쿠라 기하치로가 일본으로 뜯어간 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불타 기단만 남은 채 방치된 유구가 1995년 한국으로 반환되었다. 원래는 반환된 유구를 복원에 사용하려 했지만 훼손이 심각해 건청궁 뒤쪽에 갖다놓았는데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1999년 복원한 자선당도 원래의 모습과 차이가 있다. # 여담으로 이 자선당 건물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현대식 난방용 보일러를 개발하는 데 연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들을 참조하면 된다. | |
3.4. 내전 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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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화당(咸和堂)과 집경당(緝敬堂)
교태전 아미산의 북쪽에는 흥복전(興福殿), 광원당(廣元堂), 다경각(多慶閣), 함화당, 집경당, 영훈당(永熏堂) 등의 여러 전각들이 늘어서 있었으나 함화당과 집경당을 제외하고 모두 사라졌던 것을 2006년 함화당과 집경당을 연결하는 복도각과 주변의 행각만 복원해 2009년 1월 24일 일반에 개방했다. 1890년(고종 27년)에 지은 함화당과 집경당은 고종이 외국 공사를 접견하던 곳이자 궁중의 서화를 수장하던 공간이었다. | |
상위 문서: 대한민국의 국보
경회루(慶會樓) 1395년(태조 년4) 경복궁 창건 때 연못을 파고 누각을 세웠으나 지대가 습해 건물이 기울자 1412년(태종 12년) 연못을 대규모로 준설해 동서 128m, 남북 113m의 방지(方池)를 조성하고 경회루를 세웠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에는 누각을 지탱하는 돌기둥에 용 조각을 새겼다고 하지만 1867년(고종 4년) 중건할 때는 무늬 없는 통돌로 바뀌었다. 지금의 경회루는 정면 7칸(34.4m), 측면 5칸(28,5m)으로 현존하는 한국의 목조 건축 중 규모가 가장 크며,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10000원권 지폐 구권의 뒷면 도안이기도 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경복궁 경회루 문서 참조. |
3.5. 빈전 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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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건청궁 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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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옥재(集玉齋)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 동쪽에 있는 전각으로 왼쪽은 팔우정(八隅亭), 오른쪽은 협길당(協吉堂)과 연결되어 있다. 원래는 창덕궁에 있었으나 1888년(고종 25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어하면서 건물을 이건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국풍 벽돌 건물로 지어졌다. 고종은 이곳을 서재, 어진 봉안처, 외국 사절 접견소 등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이 주둔하는 바람에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1996년에 수도 경비 사령부 30경비단이 부대 이전을 함으로써 이후 복원 작업을 실시하여 2006년에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 |
향원정(香遠亭)
건청궁 남쪽 연못의 섬에 있는 2층의 누각. 원래는 건청궁의 후원 역할을 하는 장소였기에 건너가기 편하도록 건청궁에서 향원정을 향해 다리가 놓여 있었으나 지금은 자리가 바뀌어 향원지 남쪽에서 향원정으로 향하게 놓여져 있다. 현재는 창덕궁 부용정과 함께 국전[6] 출품작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였다. 2017년 5월부터 전면 해체 보수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2년간 진행될 예정이며 헐거워진 목재 접합부, 토사가 쓸려내려가 약해진 지반 지지력를 강화하고 다리를 원래 자리인 북쪽으로 옮긴다고 한다. 1887년 3월 6일 우리나라 최초의 전등이 경복궁에 설치되었을때 발전기 냉각수를 확보하기 위해 향원정에 발전기가 설치되었던 역사가 있다. |
4.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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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
(國立故宮博物館,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홈페이지. 전신은 1908년 설립된 제실박물관이다.[8] 1909년 순종이 일반에 공개했으며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이왕가 박물관으로 격하되어 덕수궁 석조전으로 옮겨간 뒤 1945년 광복 후부터는 궁중 유물 전시관으로 운영되었지만 공간이 협소해 전시와 보존에 어려움을 겪었다. 2005년 국립 고궁 박물관으로 개칭하고 경복궁 내의 구 국립중앙박물관 자리로 옮겨 4만여 점에 달하는 왕실 관련 유물을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자격루의 실물 크기 복원 모형과 창덕궁에 있던 순종황제와 순정효황후 부부의 어차가 이곳에 있다. 경복궁 전각들은 근대 이전의 나무 건축이라 전기 배선에 노출될 경우 화재의 위험성이 있고 현대적인 난방, 냉방 기구의 설치와 전시 시설을 갖추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고궁 박물관은 왕실 유물 전시실로 그대로 존속할 가능성이 높다. 건물도 민속 박물관에 비하면 겸손하게 궁궐 건축과 어울리는 모습이라 그렇게 튀지도 않는다. | |
국립민속박물관
(國立民俗博物館,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홈페이지. 전신은 1924년 일본의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세운 '조선민족미술관'이다. 1945년 광복 이후 '국립 민족 박물관'으로 출범, 남산 구 통감 관저에 있었다가 1950년에 국립 박물관에 통합되며 자취를 감췄다가 1965년에 '한국민속관'으로 재출범하면서 경복궁 수정전에 자리잡았다가 1975년에 경복궁 구 국립현대미술관 건물에 입주하였다가 1993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7,089점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정말 괴랄하게도 불국사 청운교와 백운교,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 등 대표적인 불교 사찰을 억지로 섞어서 콘크리트로 만든 기이한 외관 때문에 유교 국가의 정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10] 그냥 무식하게 불교 사찰을 때려 박은 외관 때문에 민속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음에도 경복궁 복원 과정에서도 해체될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위의 불탑들은 어떻게 해야 한다. 또 하나, 대다수가 모르고 넘어가는 사실이 있는데, 현재의 국립민속박물관 터는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어진들을 모신 건물인 선원전이 있었던 곳이다. 즉 복원을 하며 선원전을 연구를 해야 할 것인데 그런 기회마저 갈갈이 찢어놓은 것이다. 선원전은 일제 시기인 1932년에 장충단에 있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모신 절인 박문사로 팔려나갔고, 더욱이 현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을 지을 당시 무작정 땅을 파버려 유구는 고사하고 현재로써는 선원전의 기본적인 구조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다. 그런 덕분에 2030년대에 철거될 예정이다. |
[1] 중종이 조광조를 숙청하기로 결심한 후, 1519년(중종 14년) 11월에 남곤, 심정 등 훈구 세력들을 신무문을 통해 승정원도 거치지 않고 왕궁에 들여보냈다.[2] 중종이 조광조를 숙청하기로 결심한 후, 1519년(중종 14년) 11월에 남곤, 심정 등 훈구 세력들을 신무문을 통해 승정원도 거치지 않고 왕궁에 들여보냈다.[3] 다만 이 설은 잘못된 설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교태전 자체는 세종 때 만들어졌고 경회루 연못을 판 것은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 때이기 때문[4] 다만 이 설은 잘못된 설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교태전 자체는 세종 때 만들어졌고 경회루 연못을 판 것은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 때이기 때문[5] 대한민국 미술 대전. 문화 예술 진흥원이 주관하는 종합 미술 전시-관람 행사로 1982년 이전에는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로 불리기도 했다.[6] 대한민국 미술 대전. 문화 예술 진흥원이 주관하는 종합 미술 전시-관람 행사로 1982년 이전에는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로 불리기도 했다.[7] 국립 중앙 박물관도 제실 박물관을 전신으로 삼고있다.[8] 국립 중앙 박물관도 제실 박물관을 전신으로 삼고있다.[9] 이 때문에 용의 눈물, 왕과 비, 명성황후, 뿌리깊은 나무(마지막회에 한함) 등 실제 경복궁에서 촬영된 드라마에는 민속박물관 건물이 그대로 노출되어서 조선시대에 20세기 건축물이 목격되는 기괴한 풍경이 연출된다. 사실 세트가 아닌 실제 궁에서 촬영된 사극에서 흔히 찾아볼수 있는 오류다. 찬란한 여명에서는 민속박물관은 물론이고, 심지어 매표소가 노출되기도 했다.[10] 이 때문에 용의 눈물, 왕과 비, 명성황후, 뿌리깊은 나무(마지막회에 한함) 등 실제 경복궁에서 촬영된 드라마에는 민속박물관 건물이 그대로 노출되어서 조선시대에 20세기 건축물이 목격되는 기괴한 풍경이 연출된다. 사실 세트가 아닌 실제 궁에서 촬영된 사극에서 흔히 찾아볼수 있는 오류다. 찬란한 여명에서는 민속박물관은 물론이고, 심지어 매표소가 노출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