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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낙선재
| 서산 개심사 오방오제위도 및 사직사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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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낙선재
昌德宮 樂善齋 | |
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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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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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
| 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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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연도
| 2012년 3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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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시기
| 조선시대, 1847년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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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에서 제작한 3D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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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昌德宮 樂善齋
창덕궁의 주거 건물이다. 전반적으로 양반가 형식을 따랐으나 궁궐 침전 양식을 가미한 집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 부분에 있다. 《궁궐지》에 따르면 원래는 창경궁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창덕궁 영역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위치도 창덕궁 주요부와 꽤 떨어져있고 오히려 현재 창경궁과 훨씬 가깝다.
낙선재라 하면, 낙선재 건물 한 채만을 가리킬 때도 있지만 보통은 낙선재와 다른 부속 건물들을 통틀어 부른다. 좁게는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만을 말하며 넓게는 건물들 뒷편의 화계와, 그 위 너머로 있는 상량정 · 한정당 · 취운정까지 통틀어 낙선재 권역이라고 한다.
후술하겠지만 대한제국의 황실 가족들이 1989년까지 살았던 곳이다. 가장 최근까지 사람이 살았던, 즉 궁궐 전각들 중 그나마 사람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창덕궁의 주거 건물이다. 전반적으로 양반가 형식을 따랐으나 궁궐 침전 양식을 가미한 집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 부분에 있다. 《궁궐지》에 따르면 원래는 창경궁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창덕궁 영역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위치도 창덕궁 주요부와 꽤 떨어져있고 오히려 현재 창경궁과 훨씬 가깝다.
낙선재라 하면, 낙선재 건물 한 채만을 가리킬 때도 있지만 보통은 낙선재와 다른 부속 건물들을 통틀어 부른다. 좁게는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만을 말하며 넓게는 건물들 뒷편의 화계와, 그 위 너머로 있는 상량정 · 한정당 · 취운정까지 통틀어 낙선재 권역이라고 한다.
후술하겠지만 대한제국의 황실 가족들이 1989년까지 살았던 곳이다. 가장 최근까지 사람이 살았던, 즉 궁궐 전각들 중 그나마 사람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2. 이름
3. 역사
1847년(헌종 13년) 조선 제24대 임금 헌종이 지었다.
낙선재 영역 언저리엔 원래 동궁 중 하나인 낙선당이 있었는데, 1756년(영조 32년) 불탄 뒤 재건하지 않았다.
그 후 90여 년 뒤 비슷한 자리에[2] 이름이 같은 낙선재와 그 주변 건물을 지었는데 낙선당의 복구라기보다는, 그냥 이름만 딴 새 건물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엔 동궁에 살 세자도 없었고, 무엇보다 건립 이유가 사랑하는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정조와 수빈 박씨의 처소가 서로 붙어있어 순조가 태어난 것처럼, 경빈 김씨도 헌종 곁에서 머물며 후계자를 낳기를 바란 의도였다.
헌종은 낙선재에, 경빈 김씨는 낙선재 바로 옆의 석복헌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수강재도 낙선재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불과 2년 여 뒤인 1849년 헌종은 승하했고 경빈 김씨는 궁을 나와 안국동 일대에 머물면서 낙선재는 비었다. 그러다 갑신정변 직후에 고종이 잠시 이 곳에 머물면서 신하들과 외국 외교관들을 접견하였다.# #
1907년(융희 1년) 황제 순종이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3]한 후엔 황태자였던 영친왕이 일본으로 유학이라 쓰고 볼모라고 읽는다가기 전까지 머물렀다. 일제강점기에는 순종이 이 곳에 가끔 머물면서 일본인들을 접견하였으며 1917년 창덕궁 내전의 대화재 이후 내전을 재건할 때까지 여기서 거주하였다.
순종 붕어[4] 직전에는 순종의 어진을 이 곳에 모시기도 했고# 순종 사후에는 대조전에 살던 순정효황후가 여기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공간이 좁다는 이유로 1929년 3월에 서행각 등 건물 일부를 증축하였다.
그렇게 20여 년 넘게 잘 살고 있었는데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순정효황후는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휴전 후 돌아왔으나 이승만이 창덕궁은 국유재산이라며 낙선재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면서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인수재(仁壽齋)에서 임시로 머물렀고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에야 다시 돌아왔다.
낙선재 영역 언저리엔 원래 동궁 중 하나인 낙선당이 있었는데, 1756년(영조 32년) 불탄 뒤 재건하지 않았다.
그 후 90여 년 뒤 비슷한 자리에[2] 이름이 같은 낙선재와 그 주변 건물을 지었는데 낙선당의 복구라기보다는, 그냥 이름만 딴 새 건물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엔 동궁에 살 세자도 없었고, 무엇보다 건립 이유가 사랑하는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정조와 수빈 박씨의 처소가 서로 붙어있어 순조가 태어난 것처럼, 경빈 김씨도 헌종 곁에서 머물며 후계자를 낳기를 바란 의도였다.
헌종은 낙선재에, 경빈 김씨는 낙선재 바로 옆의 석복헌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수강재도 낙선재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불과 2년 여 뒤인 1849년 헌종은 승하했고 경빈 김씨는 궁을 나와 안국동 일대에 머물면서 낙선재는 비었다. 그러다 갑신정변 직후에 고종이 잠시 이 곳에 머물면서 신하들과 외국 외교관들을 접견하였다.# #
1907년(융희 1년) 황제 순종이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3]한 후엔 황태자였던 영친왕이 일본으로 유학
순종 붕어[4] 직전에는 순종의 어진을 이 곳에 모시기도 했고# 순종 사후에는 대조전에 살던 순정효황후가 여기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공간이 좁다는 이유로 1929년 3월에 서행각 등 건물 일부를 증축하였다.
그렇게 20여 년 넘게 잘 살고 있었는데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순정효황후는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휴전 후 돌아왔으나 이승만이 창덕궁은 국유재산이라며 낙선재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면서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인수재(仁壽齋)에서 임시로 머물렀고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에야 다시 돌아왔다.
낙선재로 들어오는 순정효황후와 상궁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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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62년 덕혜옹주가, 1963년엔 의민태자(영친왕)와 이방자가 귀국하면서 낙선재 권역에서 순정효황후와 함께 살았다. 이 때 낙선재 본채는 의민태자 - 이방자 부부가[7], 석복헌은 순정효황후가, 그리고 수강재는 덕혜옹주가 사용하였다. 순정효황후는 1966년, 의민태자는 1970년, 그리고 덕혜옹주와 이방자는 1989년에 세상을 떠나면서[9] 낙선재는 다시 비었다.
근래까지 실제로 사람이 살았으니 당연히 조선시대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었다. 1990년대 들어서 낙선재의 증축한 부분들을 철거하고 조선시대 모습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근래까지 실제로 사람이 살았으니 당연히 조선시대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었다. 1990년대 들어서 낙선재의 증축한 부분들을 철거하고 조선시대 모습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근현대에 달라졌던 낙선재 풍경. 윗 사진 왼쪽은 낙선재 본채. 오른쪽은 낙선재 서행각 현관,
아랫 사진 왼쪽은 낙선재 본채에서 바라본 서행각, 오른쪽은 정문 장락문이다. | |
4. 구조
낙선재 본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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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몸체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총 12칸이나 서쪽의 누마루가 남쪽으로 1칸, 동쪽의 방이 북쪽으로 2칸 더 나있어 실제로는 15칸이다. 겹처마 양식에 공포는 이익공, 지붕은 팔작지붕이며[11] 제일 아랫 부분에는 장대석으로 기단과 계단 3개를 조성하였다. 누마루의 하단은 화강석을 길게 깎아만든 주초석을 놓았고, 장귀틀 하부에 낙양 모양을 내었으며 누마루가 끝나는 부분의 하단은 얼음조각무늬로 장식하였다.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기와로 마감하으며 양반가의 모습을 본따 만들었기에 용두, 잡상은 놓지 않고 단청도 칠하지 않았다.
- 낙선재 동남쪽에 작은 문이 있다. 이 문을 지나면 행랑이 보이며 이 행랑에 난 문을 지나 좌측으로 들어가면 석복헌이 나온다.
5. 부속 건물
5.1. 석복헌
5.2. 수강재
5.3. 평원루
5.4. 취운정
5.5. 한정당
6. 여담
7. 매체에서
[1] 남에게서 존경을 받을 만한 타고난 덕행.[2] 연구자들은 낙선당과 낙선재의 자리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다고 보고 있다.[3] 移御. 쉽게 말해 임금이 이사하는 것.[4] 崩御. 황제, 황후의 죽음.[5] 맨 앞줄이 순정효황후, 그 뒤로 성옥염 상궁.[6] 맨 앞줄이 순정효황후, 그 뒤로 성옥염 상궁.[7] 의민태자는 혼수상태라 귀국 직후 병원에 입원하였고 이후 낙선재와 한남동 일반주택을 오가며 생활했다.[8] 薨逝. 임금이나 왕족, 귀족 등 신분이 높은 사람의 죽음.[9] 둘 다 같은 해 4월에 사망. 덕혜옹주가 4월 21일에 서거하고, 이방자가 9일 뒤인 4월 30일에 훙서[8]했다.[10] 한옥에서는 주로 ‘단층(單層)’으로 표현한다.[11] 한옥에서는 주로 ‘단층(單層)’으로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