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2. 위치
3. 시설
실제로 가보면 면 지역치고는 상당히 번화하다고 느껴지는데 인구밀도가 높기 때문이다. 일단 효촌리 자체가 1km2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리이다. 청주시의 동이 대부분 이 정도 크기이고, 보통 인접 지역에서 리는 근처 고은리만 해도 거의 4km2에 이른다. 그런데다가 서쪽은 무심천을 낀 논밭, 동쪽은 공군사관학교가 있어 실제 시가지는 동서 폭이 500m 안팎. 여기에 더해 송암리도 효촌리와 매우 가깝고 쌍수리 역시 동서로만 긴 리이기 때문에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정도의 이웃 마을이다.
게다가 용암동 동남지구가 개발되면서 동남지구 일대와 불과 1km도 떨어져있지 않다는 것도 이점이다. 다만 이 부분은 도리어 용암동과 너무 붙어있어 별개의 시가지로 개발되기보다는 연담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위험도 있다. 현재 지북지구 개발이 진행 중이며, 조성 완료시 사실상 연담화가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2]
게다가 용암동 동남지구가 개발되면서 동남지구 일대와 불과 1km도 떨어져있지 않다는 것도 이점이다. 다만 이 부분은 도리어 용암동과 너무 붙어있어 별개의 시가지로 개발되기보다는 연담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위험도 있다. 현재 지북지구 개발이 진행 중이며, 조성 완료시 사실상 연담화가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2]
4. 이름의 유래
파일:20200828_105539.jpg
이름의 유래는 말 그대로 '효자마을(孝村)'이다.
단재로 465에는 경연(慶延)이라는 사람의 효심을 기린 효비각(孝碑閣)이 있어 이 마을이 효자마을로 불리게 된 사연을 확인할 수 있다.
경연이라는 사람은 1478년 사람인데 아버지를 위하여 한겨울 얼음을 깨 잉어를 잡고 산 꼭대기에 시루를 덮어 고사리를 자라나게 해 아버지에게 바치는 등의 효도를 하였고 아버지 사후에도 6년간 시묘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에 인근 마을의 세 명도 개과천선할 정도였다고. 이 사실이 당시 임금 성종에까지 알려져 '이산현감'(尼山縣監)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이후 1686년 숙종 대에 효 비석을 세워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비석에는 "효자 현감 경연지리"(孝子縣監 慶延之里)라고 쓰여져있다.
여기에 있는 아파트에도 대문짝만하게 '효자마을'이라고 써있다.
이름의 유래는 말 그대로 '효자마을(孝村)'이다.
단재로 465에는 경연(慶延)이라는 사람의 효심을 기린 효비각(孝碑閣)이 있어 이 마을이 효자마을로 불리게 된 사연을 확인할 수 있다.
경연이라는 사람은 1478년 사람인데 아버지를 위하여 한겨울 얼음을 깨 잉어를 잡고 산 꼭대기에 시루를 덮어 고사리를 자라나게 해 아버지에게 바치는 등의 효도를 하였고 아버지 사후에도 6년간 시묘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에 인근 마을의 세 명도 개과천선할 정도였다고. 이 사실이 당시 임금 성종에까지 알려져 '이산현감'(尼山縣監)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이후 1686년 숙종 대에 효 비석을 세워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비석에는 "효자 현감 경연지리"(孝子縣監 慶延之里)라고 쓰여져있다.
여기에 있는 아파트에도 대문짝만하게 '효자마을'이라고 써있다.
5. 교통
남일면의 초입이기에 청주시 시가지에서 출발하여 남일면에 이르는 시내버스는 모두 효촌리를 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