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장조의 현손 | 계동궁 3대 사손
完林君 완림군 | ||
군호
| 완림군(完林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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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재원(李載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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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순팔(舜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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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효정(孝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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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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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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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본격적인 관료 생활
종친이라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초반에는 영릉, 선릉의 능참봉으로 일했다. 1853(철종 4년)년에는 철종이 춘당대[3]에서 시 짓기 행사를 열었을 때, 부(賦)[4]에서 1등을 하여 직부전시[5]의 명을 받았다.
1853년(철종 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고 사헌부 지평을 거쳐 사헌부장령을 역임했다. 이후 홍문관 응교와 교리, 성균관 사성 및 대사성, 이조참의를 지냈다.
1864년 1월 사촌동생 이재황이 고종으로 즉위하고 삼촌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더욱 승승장구한다. 고종 즉위 직후에 동지경연사(同知經延事)로 승진했고, 승진 기념으로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면세전[6]를 왕에게 바쳐 승정원 도승지로 임명받았다.요즘 같으면 김영란법에 걸린다.
이후에도 사헌부 대사헌, 종친부 유사당상 , 동지돈녕부사, 이조참판, 홍문관 부제학, 동지춘추관사, 규장각 직제학을 역임했다. 또한 한성부판윤[7]과 의정부 우찬성 및 공조[8], 예조[9], 형조, 병조[10], 이조[11]의 판서[12]를 지내는 등 조정의 주요보직을 맡았다. 1868년 경복궁 중건 시에는 종정경으로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맡아 공사를 관리했다. 그 뒤 수원부 유수와 판의금부사 직도 맡았다.
1874년(고종 11년) 11월에 삼촌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잃었다. 다행히 이재원은 정치색이 뚜렷하지 않아 계속 관직에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예전처럼 잘나가지는 못했고, 조정의 중심에서 밀려나 평안도와 경기도 관찰사 및 광주부와 강화부의 유수 등 지방직을 전전했다. 그러다 1879년(고종 16년)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1881년(고종 18년) 개화 정책 추진 기관인 통리기무아문을 개편할 때 군무사당상경리사(軍務司堂上經理事)로 임명받고 교련국(敎鍊局)으로 배치받아 군대의 근대화에 힘썼다. 1882년(고종 19년)에는 이조판서를, 1884년(고종 21년)에는 병조판서를 재역임했다.
병조판서로 다시 제수받았던 그해 10월에 조선에서 대사건이 일어나니 바로 갑신정변이다. 이 때 왕실 인사들을 포섭하려던 일부 개화당원들의 추천으로 좌의정과 영의정으로 연달아 임명받았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개화당 정권의 영의정이었지만 그들과 가깝지 않고, 또 종친이라는 이유로 무사하여 정변 후에도 이조판서를 지내는 등 관직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1885년(고종 22년)에는 독판내무부사, 1887년(고종 24년) 7월에는 예조판서로 임명받았으나 응하지 않아서 한 때 충청도 평택로 유배갔다. 그러나 곧 풀려나서 판돈녕부사로 임명받았으나 또다시 응하지 않았다.왕이랑 밀당하나[13] 이후 이조판서, 한성부 판윤, 판의금부사, 종정경, 판돈녕부사 직을 재역임했다.
1853년(철종 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고 사헌부 지평을 거쳐 사헌부장령을 역임했다. 이후 홍문관 응교와 교리, 성균관 사성 및 대사성, 이조참의를 지냈다.
1864년 1월 사촌동생 이재황이 고종으로 즉위하고 삼촌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더욱 승승장구한다. 고종 즉위 직후에 동지경연사(同知經延事)로 승진했고, 승진 기념으로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면세전[6]를 왕에게 바쳐 승정원 도승지로 임명받았다.
이후에도 사헌부 대사헌, 종친부 유사당상 , 동지돈녕부사, 이조참판, 홍문관 부제학, 동지춘추관사, 규장각 직제학을 역임했다. 또한 한성부판윤[7]과 의정부 우찬성 및 공조[8], 예조[9], 형조, 병조[10], 이조[11]의 판서[12]를 지내는 등 조정의 주요보직을 맡았다. 1868년 경복궁 중건 시에는 종정경으로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맡아 공사를 관리했다. 그 뒤 수원부 유수와 판의금부사 직도 맡았다.
1874년(고종 11년) 11월에 삼촌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잃었다. 다행히 이재원은 정치색이 뚜렷하지 않아 계속 관직에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예전처럼 잘나가지는 못했고, 조정의 중심에서 밀려나 평안도와 경기도 관찰사 및 광주부와 강화부의 유수 등 지방직을 전전했다. 그러다 1879년(고종 16년)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1881년(고종 18년) 개화 정책 추진 기관인 통리기무아문을 개편할 때 군무사당상경리사(軍務司堂上經理事)로 임명받고 교련국(敎鍊局)으로 배치받아 군대의 근대화에 힘썼다. 1882년(고종 19년)에는 이조판서를, 1884년(고종 21년)에는 병조판서를 재역임했다.
병조판서로 다시 제수받았던 그해 10월에 조선에서 대사건이 일어나니 바로 갑신정변이다. 이 때 왕실 인사들을 포섭하려던 일부 개화당원들의 추천으로 좌의정과 영의정으로 연달아 임명받았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개화당 정권의 영의정이었지만 그들과 가깝지 않고, 또 종친이라는 이유로 무사하여 정변 후에도 이조판서를 지내는 등 관직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1885년(고종 22년)에는 독판내무부사, 1887년(고종 24년) 7월에는 예조판서로 임명받았으나 응하지 않아서 한 때 충청도 평택로 유배갔다. 그러나 곧 풀려나서 판돈녕부사로 임명받았으나 또다시 응하지 않았다.
3. 사망과 이후
4. 여담
5. 매체에서
6. 후손
[1] 원래 남연군의 장남인 흥녕군 이창응이 차기 계동궁 종주가 되어야 했으나 아버지 남연군보다 일찍 죽어 그의 양자 완림군이 물려받았다.[2] 원래 남연군의 장남인 흥녕군 이창응이 차기 계동궁 종주가 되어야 했으나 아버지 남연군보다 일찍 죽어 그의 양자 완림군이 물려받았다.[3] 창덕궁 영화당 앞의 넓은 마당.[4] 《시경(詩經)》에서 이르는 시의 육의(六義) 가운데 하나. 사물이나 그에 대한 감상을, 비유를 쓰지 않고 직접 서술하는 작법이다.[5] 초시, 복시에 응시하지 않고 바로 대과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6] 免稅田. 세금을 면제받은 토지.[7] 현재의 서울특별시장 격.[8] 현재의 대한민국 국토교통부 격.[9] 현재의 대한민국 외교부, 대한민국 교육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10] 현재의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격.[11] 현재의 대한민국 행정안전부 격.[12] 현재의 장관 격.[13] 이 때 고종은 정말 많이 서운했는지, "옛 정을 생각안하고 문안도 안오면서 승부하듯이 버티니 앞으로 나랑 안볼려는건가? 명에 응하든지 말든지 스스로 알아서 해라"고까지 했다.#[14] 현재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15] 황족의 범위는 황제의 4대손까지이다. 그의 가계에서 마지막으로 왕을 했던 사람은 영조였고, 그는 영조의 5대손이었기에 사도세자 추존 이전에는 종친으로서의 군호를 받을 수 없었다.[16] 군호는 왕실의 본관 완산(전주)의 '완(完)'에 양어머니 조씨의 본관 임천(林川)의 '임(림, 林)'에서 따왔다.[17] 경복궁 내 왕비의 침전. 왕의 침전인 강녕전과 함께 1876년 화재로 불타고 12년이 지난 이 때에야 다시 복구했다.[18] 경복궁 내 왕비의 침전. 왕의 침전인 강녕전과 함께 1876년 화재로 불타고 12년이 지난 이 때에야 다시 복구했다.[19]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이민우 前 국회부의장 역을,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이순재의 친구 신대근 역을 맡았다.[20]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이민우 前 국회부의장 역을,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이순재의 친구 신대근 역을 맡았다.[21] 허장강의 장남이자 허준호의 이복 형.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인촌 김성수 역을, 징비록에서 정언지 역을 맡았다.[22] 허장강의 장남이자 허준호의 이복 형.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인촌 김성수 역을, 징비록에서 정언지 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