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제국 황실)]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6B8E23>'''[[계동궁|{{{#FAFAD2 계동궁}}}]]{{{#FAFAD2 의 역대 종주}}}''' || ||<width=30%><:> 3대 [[남연군|남연군 이구]][* 원래 남연군의 장남인 [[흥녕군 이창응]]이 차기 계동궁 종주가 되어야 했으나 아버지 남연군보다 일찍 죽어 그의 양자 완림군이 물려받았다.] ||<:> {{{+1 ←}}} ||||<width=30%><#6B8E23><:>'''{{{#FAFAD2 4대 완림군 이재원}}}''' || {{{+1 →}}} ||<width=30%><:> 5대 [[이기용(1889)|이기용]] || ||<-3><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ordercolor=#29176e><tablebgcolor=#29176e> {{{#ffd800 '''대한제국 장조의 현손 | 계동궁 3대 사손'''[br] {{{+1 '''完林君[br]완림군'''}}}}}} || ||<width=20%> '''{{{#ffd800 군호}}}''' ||<-2><bgcolor=#fff>완림군(完林君) || || '''{{{#ffd800 이름}}}''' ||<-2><bgcolor=#fff>이재원(李載元) || || '''{{{#ffd800 자}}}''' ||<-2><bgcolor=#fff>순팔(舜八) || || '''{{{#ffd800 시호}}}''' ||<-2><bgcolor=#fff>효정(孝貞) || || '''{{{#ffd800 출생}}}''' ||<-2><bgcolor=#fff>[[1831년]] [[9월 8일]](음력 10월 13일) || || '''{{{#ffd800 사망}}}''' ||<-2><bgcolor=#fff>[[1891년]] [[3월 28일]](음력 2월 19일) (향년 59세)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왕족 출신 관료. [[고종(대한제국)|고종 이형]]과 [[흥친왕|흥친왕 이희]], [[완영군|완영군 이재긍]]의 친 사촌형이자 [[완순군 이재완]]의 양 사촌형이며 [[계동궁]]의 사손이다. == 생애 == 1831년([[순조]] 31년) 9월 8일, [[한성부]]에서 [[남연군]]의 둘째 아들 [[흥완군 이정응]]과 부인 대구 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남연군의 장손이었기에 태어나자마자 이미 3년 전 자식없이 죽은 큰아버지 [[흥녕군 이창응]]의 [[양자(가족)|양자]]가 되었다. 그래서 [[은신군]] - [[남연군]] - [[흥녕군]]의 제사를 받드는 계동궁의 사손이 되었다. === 본격적인 관료 생활 === 종친이라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초반에는 [[영녕릉|영릉]], [[선릉]]의 [[능참봉]]으로 일했다. 1853(철종 4년)년에는 [[철종(조선)|철종]]이 춘당대[* [[창덕궁 영화당]] 앞의 넓은 마당.]에서 시 짓기 행사를 열었을 때, 부(賦)[* 《시경(詩經)》에서 이르는 시의 육의(六義) 가운데 하나. 사물이나 그에 대한 감상을, 비유를 쓰지 않고 직접 서술하는 작법이다.]에서 1등을 하여 직부전시[* 초시, 복시에 응시하지 않고 바로 대과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의 명을 받았다. 1853년(철종 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고 [[사헌부]] 지평을 거쳐 사헌부장령을 역임했다. 이후 [[홍문관]] 응교와 교리, [[성균관]] 사성 및 대사성, [[이조]]참의를 지냈다. 1864년 1월 사촌동생 이재황이 [[고종(대한제국)|고종]]으로 즉위하고 삼촌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더욱 승승장구한다. 고종 즉위 직후에 동지경연사(同知經延事)로 승진했고, 승진 기념으로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면세전[* 免稅田. 세금을 면제받은 토지.]를 왕에게 바쳐 [[승정원]] [[도승지]]로 임명받았다.--요즘 같으면 [[김영란법]]에 걸린다.-- 이후에도 [[사헌부]] 대사헌, [[종친부]] 유사당상 , 동지돈녕부사, 이조참판, [[홍문관]] 부제학, 동지춘추관사, [[규장각]] 직제학을 역임했다. 또한 한성부판윤[* 현재의 [[서울특별시장]] 격.]과 [[의정부]] 우찬성 및 [[공조]][* 현재의 대한민국 [[국토교통부]] 격.], [[예조]][* 현재의 대한민국 [[외교부]], [[대한민국 교육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형조]], [[병조]][* 현재의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격.], [[이조]][* 현재의 대한민국 [[행정안전부]] 격.]의 판서[* 현재의 [[장관]] 격.]를 지내는 등 조정의 주요보직을 맡았다. 1868년 [[경복궁]] 중건 시에는 종정경으로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맡아 공사를 관리했다. 그 뒤 [[수원시|수원부]] [[유수]]와 판의금부사 직도 맡았다. 1874년([[고종(대한제국)|고종]] 11년) 11월에 삼촌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잃었다. 다행히 이재원은 정치색이 뚜렷하지 않아 계속 관직에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예전처럼 잘나가지는 못했고, [[조정]]의 중심에서 밀려나 [[평안도]]와 [[경기도]] 관찰사 및 [[광주시|광주부]]와 [[강화군|강화부]]의 [[유수]] 등 [[지방직]]을 전전했다. 그러다 1879년(고종 16년)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1881년([[고종(대한제국)|고종]] 18년) [[개화]] 정책 추진 기관인 [[통리기무아문]]을 개편할 때 군무사당상경리사(軍務司堂上經理事)로 임명받고 교련국(敎鍊局)으로 배치받아 [[군대]]의 [[근대화]]에 힘썼다. 1882년(고종 19년)에는 이조판서를, 1884년(고종 21년)에는 병조판서를 재역임했다. 병조판서로 다시 제수받았던 그해 10월에 [[조선]]에서 대사건이 일어나니 바로 [[갑신정변]]이다. 이 때 [[왕실]] [[인사]]들을 포섭하려던 일부 개화당원들의 추천으로 [[좌의정]]과 [[영의정]]으로 연달아 임명받았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개화당 정권의 영의정이었지만 그들과 가깝지 않고, 또 [[종친]]이라는 이유로 무사하여 정변 후에도 이조판서를 지내는 등 관직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1885년([[고종(대한제국)|고종]] 22년)에는 독판내무부사, 1887년(고종 24년) 7월에는 예조판서로 임명받았으나 응하지 않아서 한 때 [[충청도]] [[평택시|평택]]로 [[유배]]갔다. 그러나 곧 풀려나서 판돈녕부사로 임명받았으나 또다시 응하지 않았다. --왕이랑 밀당하나--[* 이 때 고종은 정말 많이 서운했는지, "옛 정을 생각안하고 문안도 안오면서 승부하듯이 버티니 '''앞으로 나랑 안볼려는건가?''' 명에 응하든지 말든지 스스로 알아서 해라"고까지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2409010_002|#]]] 이후 이조판서, 한성부 판윤, 판의금부사, 종정경, 판돈녕부사 직을 재역임했다. == 사망과 이후 == 1891년([[고종(대한제국)|고종]] 28년) 2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61세. 한달 뒤인 3월에 [[시호]] '효정(孝貞)'을 받았다. 시신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압구정[* 현재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계좌에 안장되었다. 1899년([[광무]] 3년) [[고조#s-1.2|고조할아버지]] [[사도세자]]가 장조의황제로 [[추존]]받았다. 그래서 [[황족]]의 범위에 들어갔기에[* [[황족]]의 범위는 [[황제]]의 4대손까지이다. 그의 가계에서 마지막으로 왕을 했던 사람은 [[영조]]였고, 그는 영조의 5대손이었기에 [[사도세자]] [[추존]] 이전에는 종친으로서의 [[군호]]를 받을 수 없었다.] '완림군(完林君)'으로 추봉받고 상보국숭록대부로 추증받았다.[* [[군호]]는 [[왕실]]의 [[본관]] [[전주시|완산(전주)]]의 '완(完)'에 양어머니 조씨의 본관 임천(林川)의 '임(림, 林)'에서 따왔다.] == 여담 == * 1865년([[고종(대한제국)|고종]] 2년) [[경복궁]] 중건 때 지은 [[경복궁 강녕전#s-5.1|연생전]]과 1888년(고종 25년) 복구한 [[경복궁 교태전|교태전]][* [[경복궁]] 내 [[왕비]]의 침전. [[왕]]의 침전인 [[경복궁 강녕전|강녕전]]과 함께 1876년 [[화재]]로 불타고 12년이 지난 이 때에야 다시 복구했다.]의 [[현판]]을 그가 썼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0209017_002|#]][[http://sillok.history.go.kr/id/kza_12504012_004|#]] 두 건물 다 [[일제강점기]]에 헐렸던 것을 1995년에 복원했는데, 현재 연생전 현판은 새로 써서 만든 것이지만, 교태전 현판은 1900년대 초에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라서 지금 경복궁 교태전에 가면 그의 글씨를 볼 수 있다. == 매체에서 == * 양영준[*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 [[이민우(1915)|이민우]] 前 국회부의장 역을,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이순재(거침없이 하이킥)|이순재]]의 친구 신대근 역을 맡았다.] - 1996년 [[KBS]] 《[[찬란한 여명]]》 * 허기호[* [[허장강]]의 장남이자 [[허준호]]의 이복 형.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김성수(1891)|인촌 김성수]] 역을, [[징비록(드라마)|징비록]]에서 정언지 역을 맡았다.] - 2002년 [[KBS]]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 ||<table width=470>[[파일:명성황후 완림군.png|width=100%]] || ||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의 완림군 || [[갑신정변]] 에피소드에서 개화당 내각의 [[좌의정]] 직을 맡은 모습으로 잠시 등장한다. == 후손 == 부인이 정경 부인 [[청송 심씨]]와 수원 김씨 두 명이 있었는데 청송 심씨와의 사이에서 딸 둘을, 수원 김씨 사이에서 딸 하나와 아들 이기용을 얻었다. 이기용은 그가 59세에 낳은 [[늦둥이]]었는데 2년 뒤 이재원이 사망하여 고작 3세의 나이에 이기용은 계동궁 사손이 되었다. 이후의 가계는 [[이기용(1889)|이기용]] 문서 참조. 문제는 그아들 이기용이[[친일반민족행위자|...]] [[분류:조선의 왕자군]] [[분류:조선/인물]] [[분류:대한제국의 황족]] [[분류:계동궁 종주]] [[분류:이조판서]] [[분류:예조판서]] [[분류:형조판서]] [[분류:병조판서]] [[분류:공조판서]] [[분류:1831년 출생]] [[분류:1891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