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통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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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이름
3. 위치
4. 역사
조선 태조 때 창건했으며 원래는 흙으로 만든 다리였다. 이후 1410년(태종 10년)에 홍수로 무너지자 돌다리로 고쳐지었다. 이 때 다리 건설에 사용한 돌들은 태종의 계모 신덕왕후가 묻혔던 정릉에서 가져왔다.# 이는 신덕왕후에게 원한을 가졌던 태종의 복수(?)라는 의견이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로 인해 정릉에 쓰인 돌들은 무사하여 현대까지 여말선초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 내내 한성의 큰 길인 육조거리(세종로)와 운종가(종로), 그리고 숭례문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 기능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광통교는 사람이 많이 붐비는 한성의 최대 번화가가 되었다. 광통교 주변에 여러 수공업 작업장들이 들어섰고 큰 재래시장들도 형성되었다. 심지어는 거지들도 이 근처에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3]
후대 임금들도 광통교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일단 왕이 숭례문으로 나갈 때 반드시 이용하던 다리였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다리인 만큼 임금 자신이 백성들을 생각한다는 행동을 보여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백성들이 왕에게 직접 민원을 제기하는 격쟁도 많이 열렸고,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구휼미를 나눠주는 행사를 하기도 했다.
1760년(영조 36년) 청계천을 준설할 때 영조가 직접 나와 이곳에서 공사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1762년(영조 38년)에 다리의 기초 부분을 고쳐짓고 난간을 수리했다.#
이후 큰 변화없이 있다가 1899년(광무 3년) 종로와 숭례문을 연결하는 전차노선이 생기면서 다리 동편에 전차선로가 깔렸다. 1910년 8월에 이 노선이 복선화되면서, 다리는 1m 정도의 콘크리트 선로 밑에 묻혔다.
이후 조선시대 내내 한성의 큰 길인 육조거리(세종로)와 운종가(종로), 그리고 숭례문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 기능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광통교는 사람이 많이 붐비는 한성의 최대 번화가가 되었다. 광통교 주변에 여러 수공업 작업장들이 들어섰고 큰 재래시장들도 형성되었다. 심지어는 거지들도 이 근처에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3]
후대 임금들도 광통교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일단 왕이 숭례문으로 나갈 때 반드시 이용하던 다리였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다리인 만큼 임금 자신이 백성들을 생각한다는 행동을 보여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백성들이 왕에게 직접 민원을 제기하는 격쟁도 많이 열렸고,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구휼미를 나눠주는 행사를 하기도 했다.
1760년(영조 36년) 청계천을 준설할 때 영조가 직접 나와 이곳에서 공사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1762년(영조 38년)에 다리의 기초 부분을 고쳐짓고 난간을 수리했다.#
이후 큰 변화없이 있다가 1899년(광무 3년) 종로와 숭례문을 연결하는 전차노선이 생기면서 다리 동편에 전차선로가 깔렸다. 1910년 8월에 이 노선이 복선화되면서, 다리는 1m 정도의 콘크리트 선로 밑에 묻혔다.
1953년 경 광통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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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특징
- 길이 12.3m, 너비 14.4m, 높이 3.7m로 재질은 전부 화강암이다. 길이보다 폭이 더 넓은 것이 특징이다.
- 광교 아래로 지나가다 보면 광통교 돌다리나 벽돌에 화려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 돌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정동 정릉에 있던 석물들이다. 그나마도 제대로 놓은 게 아니라 아예 뒤집어서 끼워넣은 것은 조선왕조가 사라진 후인 오늘날까지도 태종의 신덕왕후에 대한 반감을[5] 제대로 보여준다. 동시에 광통교 밑에 처박힌 탓에 사람 손을 덜 타서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21세기까지 보전되었고, 건원릉 석물에서와 같은 구름에 휩싸인 도사나 스님이 들고 다니는 금강저, 태극 문양 등 성리학이 집대성되기 이전에 조선 초까지 남아있었던 도교, 불교 문화의 잔재를 느낄 수 있다.
6. 교통
6.1. 지하철
6.2. 버스
- 이 곳을 참조.
7. 여담
- 하루는 성종 임금이 잠행하다 광통교를 지날 때, 다리 밑에서 묵으려던 한 사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내는 “경상도 흥해[7]에서 올라온 숯장수 김희동으로 임금님이 어질다 하여 죽기 전 꼭 뵙고자 어렵게 찾아왔다. 임금님 뵈면 해삼과 전복도 드리려고 가져왔다.”고 했다. 이에 흐뭇했던 성종은 자신을 이 첨지라 소개한 뒤 왕을 꼭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고, 따라온 별감에게 귀띔한 뒤 별감의 집으로 김희동을 데려갔다. 다음날 성종은 김희동에게 왕을 만나려면 벼슬이 있어야 하니 원하는 벼슬이 있으면 말해보라 했다. 김희동은 당황했지만 자기 고을에서 제일 잘 나가던 충의라는 벼슬을 이야기했다. 사실 김희동은 이 때 반신반의 했는데 그 다음날 정말로 충의초사(忠義初仕)란 벼슬이 내려져 김희동은 궁으로 들어갔다. 가니 자신이 알고 있던 이 첨지가 바로 그렇게 보고싶던 임금이었다. 김희동은 멘붕이 심하게 와서 갖고 온 해삼과 전복을 땅에 떨어뜨리기까지 했으나 성종은 마음을 갸륵히 여겨 그것을 수라상에 올리라고 명했다. 성군인 임금과 그 임금을 생각한 백성의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는 훈훈한 이야기이다.
- 2016년부터 매년 4월 초부터 10월 말까지, 매주 주말마다 '서울밤도깨비야시장 - 청계천 타임투어마켓'이 열린다. 전통의 흔적이 묻어나는 장소를 살려 한국적인 매력을 어필하는 컨셉이 특징이다. 매주 토요일은 오후 5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일요일은 오후 4시부터 오후 9시까지 운영한다. 자세한 내용은 사이트 참조.
[1] 倉洞川. 남산 서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계속 흘러 무교를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던 개천이다. 이름은 근처에 있던 선혜청의 곡물창고에서 유래했다.출처[2] 지금의 남대문로1가 23번지 일대에 놓였다.[3] 사실 번화가는 거지들에게는 좋은 곳이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 있으면 그만큼 동냥 받을 확률도 높아지니까.[4] 정확히는 외척에 대한 반감이었지만. 태종은 자신의 처가에게도 그렇고 며느리의 집안에 대해서까지 매우 가혹했다.[5] 정확히는 외척에 대한 반감이었지만. 태종은 자신의 처가에게도 그렇고 며느리의 집안에 대해서까지 매우 가혹했다.[6] 현재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일대.[7] 현재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일대.[8] 다리는 광통교가 맞으나, 위치는 지금의 광통교 자리가 아닌 신설 광교 자리이다.[9] 이외에도 드라마에서 각색된 부분이 많다. 한 예로, 심영이 사건 발생때 공연하던 극장은 중앙극장이 아닌 현재 명동예술극장인 명치좌였다.실제 김두한의 증언을 심영물에 합성한 영상[10] 정확한 경계선은 청계천이다. 청계천을 건너는 다리는 경계선 위에 있는 것.[11] 물론 당시가 해방 직후 혼란한 사회였기에 가능한 발상이었다. 현대에 이런 일이 생겼다면 책임기관이 지정되거나 상위기관이 수사를 할 것이다.[12] 다리는 광통교가 맞으나, 위치는 지금의 광통교 자리가 아닌 신설 광교 자리이다.[13] 이외에도 드라마에서 각색된 부분이 많다. 한 예로, 심영이 사건 발생때 공연하던 극장은 중앙극장이 아닌 현재 명동예술극장인 명치좌였다.실제 김두한의 증언을 심영물에 합성한 영상[14] 정확한 경계선은 청계천이다. 청계천을 건너는 다리는 경계선 위에 있는 것.[15] 물론 당시가 해방 직후 혼란한 사회였기에 가능한 발상이었다. 현대에 이런 일이 생겼다면 책임기관이 지정되거나 상위기관이 수사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