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아돌프 빌헬름 카를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 폰 나사우-바일부르크 (Adolph Wilhelm Carl August Friedrich von Nassau-Weilburg) |
출생 | |
사망 | |
재위 | 나사우의 공작 |
룩셈부르크의 대공 | |
배우자 | |
자녀 | 기욤 4세, 바덴 대공비 힐다 |
아버지 | 빌헬름 |
어머니 | 작센-힐드부르크하우젠의 루이제 |
형제 | 테레제, 마리, 헬레나, 니콜라우스, 조피 |
1. 개요[편집]
나사우 공작이자 룩셈부르크의 대공.
특이한 기록이 많은데 원래 다스리던 나라가 망하고 세월이 지나 다른 나라의 군주로 즉위했고, 37촌 아저씨(...)의 뒤를 이어 무려 73세의 나이에 룩셈부르크 대공이 된 것[1]도 그러하다.
특이한 기록이 많은데 원래 다스리던 나라가 망하고 세월이 지나 다른 나라의 군주로 즉위했고, 37촌 아저씨(...)의 뒤를 이어 무려 73세의 나이에 룩셈부르크 대공이 된 것[1]도 그러하다.
2. 나사우 공 시절[편집]
나사우의 공 빌헬름과 작센-힐드부르크하우젠의 루이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이어 22살에 나사우의 공이 되어, 비스바덴을 공국의 수도로 삼고 통치했었다. 1844년 니콜라이 1세의 조카딸 엘리자베타와 결혼했으나 첫딸을 사산한 채 사망, 1851년 안할트-데사우의 아델하리트-마리와 재혼해 3남 2녀를 두지만, 무사히 성인이 된 건 장남 기욤 4세와 막내딸 힐다 뿐이었다.
1848년 혁명이 터지자 '나사우인들의 9개조 요구'를 받아들였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자유주의적 관점을 취소하고 강경 보수 성향으로 돌아섰지만, 그럼에도 인기 있는 통치자였다고 한다. 그렇게 27년간 재위하다가 1866년 보오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지원했다가 프로이센 왕국의 눈 밖에 나, 오스트리아가 패하면서 바로 멸망당해 프로이센에 합병되어, 그 해 9월 20일 49세의 나이로 폐위된다. 아돌프는 그 대가로 1867년 9월 28일에 1,500만 굴덴과 4개의 성채 소유권을 보장받았다. 그 후 주로 빈과 프랑크푸르트, 바이에른에 머무르며 여행과 사냥으로 소일했다.
1848년 혁명이 터지자 '나사우인들의 9개조 요구'를 받아들였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자유주의적 관점을 취소하고 강경 보수 성향으로 돌아섰지만, 그럼에도 인기 있는 통치자였다고 한다. 그렇게 27년간 재위하다가 1866년 보오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지원했다가 프로이센 왕국의 눈 밖에 나, 오스트리아가 패하면서 바로 멸망당해 프로이센에 합병되어, 그 해 9월 20일 49세의 나이로 폐위된다. 아돌프는 그 대가로 1867년 9월 28일에 1,500만 굴덴과 4개의 성채 소유권을 보장받았다. 그 후 주로 빈과 프랑크푸르트, 바이에른에 머무르며 여행과 사냥으로 소일했다.
3. 룩셈부르크 대공으로[편집]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는 빌럼 3세에 의한 동군연합이었으나, 아들을 두지 못하고 1890년 사망, 외동딸 빌헬미나 여왕이 즉위하는데... 네덜란드는 여왕 즉위가 가능해도 룩셈부르크는 살리카법인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빌럼 3세의 먼 친척인 아돌프가 대공위를 잇게 됐는데 아돌프는 남계로 빌럼 3세의 37촌 조카였다.[2] 이때 그는 이미 73세의 노인이었고, 평생 독일에서 생활해 룩셈부르크 정치는 전혀 몰라 그날그날의 정무에서는 손을 뗐고, 사실상 당시 총리대신 폴 에이셴[3]이 정무를 대행하게 된 것이 이후 관례로 내려오게 됐다. 1902년 아들 기욤을 섭정으로 세웠고, 1905년 바이에른의 여름 별장에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