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당과의 합당 이후의 내용에 대한 내용은 민진당 문서를 참고해 주세요
※ 아래 정보는 당명 변경 당시를 기준으로 함 | ||
民主党 (みんしゅとう) | ||
영문 명칭 | Democratic Party of Japan: DPJ | |
약칭 | 民主(민주), DPJ | |
한글 명칭 | 민주당 | |
창당일 | ||
당명 변경 | ||
통합한 정당 | ||
자유당 (2003년 9월 26일 합당) | ||
이념 | ||
스펙트럼 | ||
당 색 | 빨강 (#DA2128) | |
주소 | ||
대표 | 오카다 가쓰야 (岡田克也) | |
간사장 | 에다노 유키오 (枝野幸男) | |
국제조직 | 민주주의자연맹 | |
의 석 수 | 59석 / 242석 (24.4%) | |
71석 / 475석 (14.9%) | ||
당원 수 | 233,100명 (2015년 기준) | |
기관지 | 프레스 민주 | |
1. 개요[편집]
야권이 분열된 상태로는 1998년 제18회 참의원 통상선거를 치르기 힘들 것이라 생각한 민주당이, 회파 '민주우애태양국민연합(民主友愛太陽国民連合, 민우연)'을 결성하고 있던 민정당, 신당우애, 민주개혁연합과 창당을 결의하고 1998년 4월 27일 신설합당한 정당이다. 2016년 3월 27일 민진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어쨌거나 이러한 야당의 혼란상속에서 민주당은 제1야당으로 등극하게 되었고 이들 군소야당들 가운데 상당수는 민주당에 합류했다 1998년에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당초에 20석도 확보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나 27석을 확보하며 선전했다. 1998년 8월 4일에 조사한 정당지지율에선 처음으로 자민당을 넘어서기도 했고, 이후로 사민당 및 공산당 지지층을 흡수하며 꾸준히 의석을 늘려나갔다.[3] 2000년 중의원 선거에서 모리 요시로가 망언을 하는 기행을 보이면서 지지율을 늘리며 의석을 크게 늘렸다. 그러나 두 차례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웠다고해도 아직은 구 일본사회당과 비슷하게 확고한 제1야당이기는 하지만 자민당이 여전히 의석수가 압도적이다보니 정권을 차지하기에는 세가 부족한 야당이라는 인상이 지배적이었고, 지지기반도 훗카이도를 제외하면 주로 대도시 지역에 쏠려있는 상태였는데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집권한 이후로는 2001년 참의원 선거에서 26석을 확보하는데 그쳐 의석을 늘리기는 했지만 득표율은 1998년 선거보다 부진을 거두면서 이러한 인상이 더욱 강해지게 되었다.
그러던 상황에서 2003년에 자유당과 전격적으로 합당했는데 오자와 이치로가 과거 신진당 대표를 맡다가 분란으로 신진당이 해산된 전례가 있기 때문에 앙금이 남아있던 의원들이 상당수 있었지만 어쨌든 합당은 단행되었다. 그 직후 치러진 중의원 의원 총선에서 총의석을 40석을 불려 55년 체제 이래로 제1야당이 얻은 최다의석수라는 기록을 경신하였고 자민당을 비레대표 득표율에서 앞서는 이변을 연출하면서 본격적으로 자민당에 맞먹는 세력이 되었다. 이듬해인 2004년 참의원 선거에서도 자민당을 앞서기는 매한가지였고 역시 55년 체제하에서 제1야당이 얻은 최다의석수 기록을 연속으로 경신하였다.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 우정민영화가 이슈였던탓에 참패했지만 오래치 않아 세력을 수습하고 아베 신조가 연금기록 누락 등으로 지지율이 폭락한 틈을 제대로 탔고,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60석을 확보하여 자민당을 앞질러서 참의원 1당이 되더니 기어이 2009년엔 55년 체제 자민당을 꺾고 308석을 확보하는 대승을 거두어 역사적인 집권도 해봤다. 하지만 후톈마 기지문제로 인한 갈등으로 하토야마 총리가 8개월만에 퇴진하고, 2010년 참의원선거에서도 자민당에게 뒤쳐지는 등의 난맥상이 지속되더니 동일본 대지진 등의 여파로 지지율이 폭망하고 2012년 12월 16일 중의원 의원 총선으로 철저히 몰락하고 만다. 전성기였던 2009년 말에는 여론조사 정당 지지율이 40%대를 넘기도 했으나, 2013년 7월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기점으로 지지율이 10%대로 떨어졌다.
이후 다시 지지세를 조금씩 회복하긴 했지만, 리즈 시절엔 한참 모자르다보니 결국 2016년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 호헌을 기치로 2016년 2월 유신당과의 합당을 결의하고, 당명을 민진당으로 3월에 변경했다. 이후 활동에 대해선 민진당 항목 참조.
2. 정당 성향[편집]
- 2012년 당시 일본의 여당이긴 하였지만 당원 요인들이 대다수가 자민당 출신이라 그런지 사민당에서는 자민당과 다를바가 없다는 비판이[4] 있긴 하지만, 관점에 따라서 다르다. 보통 중도 혹은 중도좌파로 불리고 있다. 자신들이 말하는 노선은 '민주중도'.
- 경제정책에서도 자민당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데 2009년 엔고로 강한 일본을 만든다는 캐치프라이즈로 집권했으며 실제로 집권 후 급격한 엔고현상이 발생했음에도 특별한 조처나 개입을 하지 않은 채 유도, 방조했으며 엔화가치는 2차대전 이후 사상 최고치인 75엔까지 급등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당시 미국과 유럽의 중앙은행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양적완화를 펼치는 와중에서 일본은 정부와 중앙은행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아 수출 경쟁력에서 극심한 타격을 입힌다는 자국민들의 비판을 받았고 실제로 이 시기 일본은 대지진까지 겹쳐 엄청난 경기침체를 겪었고 특히 수출에서 완전히 망했으며 엘피다 등의 기업이 도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반대로 이 사이 한국은 동시에 급격한 원화절하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때에 엔고까지 겹쳐 수출 대기업들이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를 맞이한 시기이기도 하다.
다만 물가가....이는 2012년 선거에서 민주당의 유례없는 대몰락의 가장 확실한 원인이 되었고 민주당은 현재까지 폭망한 상태로 꿈도 희망도 없는 상태이다.
- 소수파이긴 하나 당내에 무시할 수 없는 강경보수 세력들이 존재한다(...). 일례로 2014년 12월 중의원 선거 당선자 73석 중 10석(13%)이 대놓고 평화헌법 개헌을 원하는 자민당 의원과 별 다를 바 없는 강경보수 성향이다. 대놓고 평화헌법 개헌을 원하는 민주당 중의원 명단. 2014년 12월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선자 10인: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아즈미 준(安住淳), 후루카와 모토히사(古川元久), 와타나베 슈(渡辺周), 카미야마 요스케(神山洋介), 타케마사 코이치(武正公一), 곤도 요스케(近藤洋介), 후루모토 신이치로(古本伸一郎), 하라구치 가즈히로(原口一博)
3. 지지기반[편집]
- 주로 도쿄, 나고야 등의 대도시와 홋카이도에서 세가 강했는데 이는 노조가 주요 지지기반인 사회당과 민사당의 지지기반을 이어받은 점이 강점으로 작용했고, 또한 자민당에 비판적인 화이트칼라층에서의 지지층도 높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상당수 자민당 출신 의원들이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55년 체제 당시에 자민당 강세지역이었던 이와테현과 야마나시현 등의 지방도 민주당의 텃밭이 되면서 상당수 자민당 지지층들도 민주당을 찍는 현상이 다반사로 벌어지기도 했으며 더군다나 소선거구제로 대다수 진보성향의 유권자들이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제치고 민주당을 찍는 현상도 두드러지게 일어나서 중선거구제였던 시절의 야당들에 비해 지지층이 훨씬 넓었다. 그러나 2012년 중의원 선거과 2013년 참의원 선거에서 기존의 지지기반을 홀라당 날려먹어버렸고, 노조를 기반으로 한 지지기반 자체는 남아있으나 진보성향의 유권자들이 공산당을 찍고 있는 판인 데다가 기존 지지층들도 무당파로 전환된지라 2000년대에 비하면 지지기반이 엄청나게 취약한 편.
4. 역사[편집]
4.1. 탄생 ~ 집권 이전[편집]
- 그 후 2004년 참의원 선거에서 역시 1956년에 일본사회당이 기록했던 49석의 기록을 갱신하고 50석을 확보하면서 1989년 이래 야당 최초로 자민당을 앞서는 등의 선전을 거두웠으나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 113석의 의석을 확보하는데 그치면서 참패하였다. 그러고 2007년 통일지방선거에서도 패배했으나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의 실책에 힘입어 60석을 확보했고 이후 자민당 정권의 실책에 힘입어 선거에서 연이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오자와 이치로의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면서 오자와가 사퇴하고 하토야마가 대표를 역임하게 되었다. 55년 체제 최초의 정권 교대(정권 교체)는 바로 이 때 거둔 것이다.
4.2. 집권기(2009년 8월 ~ 2012년)[편집]
- 2009년 7월 들어 시즈오카현 지사, 도쿄도 중의원 등 연거푸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자민당을 궁지로 몰았고, 이에 지지율 56%를 기록하면서 아소 다로 일본 총리가 결국 중의원(하원) 해산을 선언하게 만들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00px-Newspapers_of_Japan_20090831.jpg
- 그리고 이어 열리게 된 2009년 8월 30일의 중의원선거에서 전체 480석 중 308석을 획득. 자민당이 창당된 뒤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자민당을 누르게 된다. 여기에 사민당, 일본 공산당 등 다른(기존) 야당계 정당을 합치면 340석으로 개헌도 가능하다. 반면 자민당은 당초 예상치였던 150석도 못 건지는 119석. 멀티격인 공명당을 합쳐봤자 140석으로 주저앉아 버렸다. 말 그대로 민주당으로서는 폭풍 승리이며, 자민당은 당의 생사를 걱정해야 할 정도가 된 상황. 2009년 당 대표 하토야마 유키오는 2009년 총선승리 뒤 총리가 되었다.
4.2.1. 2010년[편집]
- 하토야마는 초기 압도적인 지지속에 집권 한 뒤 "우애"를 내세우며 일본의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주는 듯 했으나, 정치자금 문제로 계속해서 잡음이 일었고, 일본에 산재된 문제해결이 지지부진해 지지율이 떨어져 급기야 70%대 지지율이 8개월 사이에 10%대로 급락.
- 하토야마 총리의 후임으로는 부총리였던 간 나오토(管直人)가 총리로 선임되었다. 간 내각은 내각 대신들도 젊은 피 중심으로 교체하였고, 결정적으로 ""탈 오자와""를 거론하며 인적 쇄신을 가하기 시작했다. 간 총리부터가 서민 집안 출신의
공돌이자수성가형 총리인데다, 주요 대신들이 40대라는 젊은 이미지를 등에 업고, 국책 사업 예산 조정같은 호평 받은 정책은 계속 이어가려고 하는 의지를 보여, 민주당의 지지율은 총리 교체후 근 60%까지 상승하였고, 자민당은 답보 상태로 참의원 선거까지 낙관하게 되었다. 만약 여기서만 이긴다면 최소한 2012년까지 간 내각은 안정적이었을 텐데... 소득세 관련 문제로 과반이 위태로워졌다.
- 2010년 7월 11일의 결과는 예상보다도 참혹했다. 민주당 44석, 자민당 51석. 과거 자민당 탈당세력인 민나노당(10석), 일어나라 일본(1석), 신당개혁(1석)도 선전했다. 단독과반을 위한 60석은 물론이고 목표였던 54석도 되지 못했다. 연립여당인 국민신당은 한 석도 얻지 못했다. 간 총리는 사임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소득세 삽질을 저지른지라 오자와 세력의 반발을 피할 수 없었다.
- 2010년 9월 14일에 민주당 대표 경선이 예정되어 있었고, 오자와 세력과 하토야마 전 총리, 간 나오토 총리간의 암중모색과 합종연횡이 대표 경선 때까지 이어졌다. 간 나오토 총리는 재신임을 받아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생각이지만 오자와 세력이 간 나오토 총리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오자와 세력도 딱히 간 나오토 총리를 밀어낼만한 인물이 없는지라 결국 오자와 이치로 전 간사장이 대표경선 출마를 선언했다. 당초에는 대타를 내세울 생각이었던것 같지만 인물도 없고, 또 꿀릴게 없다는 생각인지 정면돌파를 선언한것.
4.2.2. 2011년: 몰락의 시작[편집]
- 2011년 예산안이 부결되면서 민주당 정권에도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간 나오토 총리를 사임시키고 후임으로 마에하라 세이지 외무장관이 유력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으나, 마에하라 세이지 외무장관이 재일교포 한국인에게 받은 250만 원 후원금이 문제가 돼서 결국 사임했다(…).
- 정국의 난맥상 속에 조기 총선거를 포함한 모든 변수는 도호쿠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나면서 묻혀버렸다. 간 나오토는 임기는 늘리는데 성공했고, 총선거의 위험부담도 사라졌지만, 소득세 인상문제로 어그로도 많이 끌었고 초기 대처에 비해 그다지 좋은 지도력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2011년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참패해버리고 말았다.
- 간 총리는 조기 자진 사임을 거론하면서 가까스로 야당의 불신임(6월 2일)을 기각시켰지만, 바로 그 직후 연말까지 하겠다며 각종 꼼수를 부려 기어이 열받은 하토야마 + 오자와 + 야당 연합에 끌려내려갈 지경이 되었다. 결국 원하던 목표를 체운 뒤 9월 2일 사퇴(1년 3개월 재임). 법적으로는 한 국회에서 2번 불신임을 못하는지라
간 총리의 꼼수로제법 버틴 편이긴 했다.
- 2011년 8월 29일에 새 대표, 즉 사실상의 새 총리를 선출하게 되었다. 외국인 정치헌금의 악재 속에서도 마에하라 세이지 전 외무장관이 경선 도전을 선언했으나, 경선 결과 1차투표에서 3위로 탈락했고, 2차 투표에서 반 오자와계가 모두 연합해서 노다 요시히코 재무장관을 밀면서 결국 노다 장관이 새 대표에 선출되었다. 8월 30일에 국회에서 열리는 국가수반 지명투표에서 중의원을 장악한 민주당에 의해 당선.
- 노다 요시히코 재무상은 재정난 해결에 기대를 받고 있지만 성향적으로는 친미 보수 성향이고 중국과 한국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인물이었으니, 결국 미국과의 관계는 조금 호전되었으나 한국과는 어마어마한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4.3. 몰락, 반등은 가능할까?[편집]
4.3.1. 2012년[편집]
- 노다 총리는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사임했으며 민주당은 곧 새 대표를 선출하고 2013년 7월에 있을 참의원 선거에서 기사회생을 노릴 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당시 참의원에서는 자민당이 공명당, 일본 유신회 등을 박박 긁어모아도 과반이 못 된다는 점뿐이었다.
참 좋은 다행일세새 대표로는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호소노 고시 정조회장이 거론되었다.
- 계파적으로 본다면 노다 총리의 계파는 선거패배로 몰락한 상황이고, 하토야마 전 총리 계파는 하토야마 전 총리가 출마를 포기하면서 와해된 상황이며, 오자와 계파는 당밖으로 나가버린 상황이라 사실상 당은 마에하라 세이지 전 외상이 좌지우지 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마에하라 전 외상이 직접 대표에 출마할지 호소노를 내세울지에 귀추가 주목되었는데...
4.3.2. 2013년[편집]
- 결국 선거 패배 책임을 지고 호소노 고시 간사장은 사퇴를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가이에다 대표 등은 유임을 하였다.# 또 세대교체를 목표로 간 나오토 전 총리에게 자발적 탈당을 요구하고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는 출당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간 나오토 전 총리가 자발적 탈당을 거부하자 2013년 7월 24일 당 내 상임간부회를 열었음에도 당 내의 상당수가 반대를 하여 결국 3개월 당원 정지 처분으로 간신히 당에서 쫓겨 나가지 않게 되었다.
이 무슨 내분인가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는 자진 탈당했다. 이는 두 거물들의 정치 성향이 당이 원하는 중도화 전략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 여하간 민주당은 하토야마의 친중 팀킬 발언들에 남은 쪽박마저 날아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건 한국의 민주당계 정당도 비슷하지만가이에다 반리 대표는 하토야마 전 총리의 '중국이 센카쿠 열도를 일본에게 빼앗겨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고 한 발언에 대해 상임간부회에서 엄중 항의하고 '이후로 하토야마의 발언에 대해서 당 차원에서는 일절 모르는 일이다.'라고 했다.
4.3.3. 2014년[편집]
- 수년에 거친 오랜 참패 속에 오랫만에 집단자위권 해석 개헌을 시도한 아베 덕분에 간신히 살아났다. 2014년 7월 14일, 일본 시가현 지사 선거에서 우위를 달리던 자민-공명 연립여당 후보[11]를 꺾고 미카즈키 다이조 후보가 승리했다. # 가다 유키코 현 지사가 민주당에 우호적이었던데다가, 무소속 출마를 통한 '민주당적 감추기'(...)으로 자위대 문제나 원전 문제에 부정적인 진보적 유권자를 최대한 끌어들인 것.[12] 10월의 후쿠시마 현(!)과 11월의 오키나와 현(!) 지사 선거에서는 이런 바람이 더 강해질 것이 분명하기에 민주당은 오랜만에 희색이 만면해졌다.
- 그러다가 오키나와 현지사 선거에서 자민당 추천 후보가 참패하고 이에 아베 신조가 의회해산을 선언한 데다가 2012년 중의원 총선에서 자민당과 공명당의 득표력이 2009년 총선 때보다 오히려 떨어졌음에도 민주당의 분당 및 정당의 난립으로 정권교체에 성공한 전례 때문에 야권단일화 작업에 상당히 힘을 쏟는지라 중의원 총선에서 의석을 크게 늘릴 것으로 보인다만... 일단 단일화 작업부터가 만만하지 않은 게 단일화 대상 정당이 한두 개가 아니고 거기에다가 각 정당들 간의 성향 차이가 위낙 큰 데다가 선거 일정도 넉넉치 않기 때문에[13][14] 힘들 것 같다. 그나마 47회 중의원 선거에서 오키나와 지역에서 야권 단일화를 이뤄냈다지만 그건 오키나와에서의 얘기고 본토지역의 단일화는 여전히 아오안이다. 후보자가 46회 총선에 비해서 크게 줄어들었다 해도 여전히 대다수 지역구에서 야당들간의 팀킬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고(...) 위에 적혀있다시피 민주당도 집권시기에 소비세 인상을 내건 전적이 있기 때문에 의석을 크게 늘린다 해도 정권교체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야권단일화 작업 때문에 민주당이 지역구에 내건 후보자 수가 과반에도 못미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고, 민주당 내에서도 정권교체는 힘들다고 결론짓는 듯하다.[16]
- 이 우려는 결국 투표율 저조로 현실이 되어서 민주당, 나아가 일본 야권의 선거정책의 실패로 인해 민주당은 의석을 11석 정도를 늘리는데 그치고 말았다...
4.3.4. 2015년[편집]
- 지지율은 10% 내외 정도로 정체되어있다. 최근에는 더 하락해서(...) 2015년 가을 현재 8%정도다.
- 일본 국민들로부터 대안세력으로써 다시 신뢰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아베 총리의 집단자위권 법안에 반대하고 있다.
- 일본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은 안보법안 반대를 통해 존재감을 보여주고 어떤 결실을 맺는 다면 반등의 계기로 삼을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이 유신당을 탈당하고 오사카를 기반으로 한 신당을 창당할 계획을 밝혀 당장 내년 참의원 선거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제 1야당 민주당과, 제 2야당 유신당이 통합 협의에 나섰다.
- 만약 통합이 성사될 경우 중의원 의석수는 100~110여석, 참의원 의석수는 60~70여석 정도로 거대여당인 자민당[17]에 비하면 아직 부족하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견제에 나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하지만 통합이 이루어지더라도 시너지 효과가 내년 참의원 선거까지 미칠지, 일본 야권이 부활의 날갯짓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당장 구성원 개인의 성향이 아닌 정당의 성향으로 구분하면 통합당의 성향은 '극우에서 무려 중도좌파'까지 포함한다...현재보다 더 심한 '반자민당 짬뽕'이 될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4.3.5. 2016년[편집]
- 2016년 7월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다. 우선 참의원 59석중에서 41석이 개선지역이고 2019년까지 임기가 보장되는 의석은 18석뿐이다. 당 지지율이 8%로 떨어졌고, 선거구, 선거연령마저 민주당에게 더욱더 불리하게 개편되어서[18] 개선 선거구인 41석중 상당수 의석을 잃을 것으로 예상된다.
5. 여담[편집]
2ch 혐한초딩들 사이에서 민주당의 평가는 아주 좋지 못하다. 그 이유는 일단 자민당 반대 정당이라는것도 있겠지만 민주당이 주도하는 재일영주권자의 참정권 추진 때문. 그들 사이에서는 매국노 정당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경우 보통 민수당[19]이라는 멸칭으로 불린다. 넷 우익이 민주당을 까는 노래 가사 바꾸기 노래도 유포한 적이 있다.(ex. 도라에몽의 노래를 민수의 노래로 개사) 2ch에서는 이 모양이지만 일본의 블로그 서비스인 아메바 산하 아메브로는 민주당에 우호적이라고 한다.
2007년부터 이 당의 마스코트로 민슈쿤(민주군·民主くん, 공식 트위터 계정)이 쓰여왔다.유신당과 합당 이후엔 실업자가 된건가 민진당으로 합당한 이후에도 사용되었으나 국민민주당으로 통합된 이후 퇴역하여 헌정기념관 캐릭터가 되었다. 입헌민주당에서는 민슈쿤이 리켄배커의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릿켄민슈쿤(입헌민주군·立憲民主くん)을 만들었다. 릿켄민슈쿤은 민슈쿤과 외형은 비슷하나 다른 존재이다.
2007년부터 이 당의 마스코트로 민슈쿤(민주군·民主くん, 공식 트위터 계정)이 쓰여왔다.
6. 역대 선거결과[편집]
6.1. 중의원 의원 총선거[편집]
※ 의석 증감은 선거 공시 당일 의석 수와의 비교임.
연도(회차) | 후보자 | 당선자 | 정당투표 | |||||
지역구 | 비례 | 합계 (중복 제외) | 지역구 | 비례 | 합계 [증감] | 득표수 | 득표율 | |
242 | 259 | 262 | 80 | 47 | 127 [▲32] | 15,067,990 | 25.18% | |
267 | 274 | 277 | 105 | 72 | 177 [▲40] | 29,393,629 | 37.39% | |
289 | 295 | 299 | 52 | 61 | 113 [▼64] | 21,036,425 | 31.02% | |
271 | 327 | 330 | 221 | 87 | 308 [▲193] | 29,844,799 | 42.41% | |
264 | 267 | 267 | 27 | 30 | 9,628,653 | 15.90% | ||
178 | 197 | 198 | 38 | 35 | 73 [▲10] | 9,775,991 | 18.33% | |
6.2.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편집]
연도(회차) | 후보자 | 당선자 | 비개선 의석 | 총 의석 [증감] | 정당투표 | |||||
지역구 | 비례 | 합계 | 지역구 | 비례 | 합계 | 득표수 | 득표율 | |||
? | ? | 48 | 15 | 12 | 27 | 20 | 47 [▲10] | 12,209,685 | 21.75% | |
? | ? | 63 | 18 | 8 | 26 | 33 | 59 [▲?] | 8,990,524 | 16.42% | |
? | ? | 74 | 31 | 19 | 50 | 32 | 82 [▲12] | 21,137,457 | 37.79% | |
? | ? | 80 | 40 | 20 | 60 | 49 | 109 [▲28] | 23,256,247 | 39.48% | |
61 | 45 | 106 | 28 | 16 | 44 | 62 | 106 [▼10] | 18,450,139 | 31.56% | |
35 | 20 | 55 | 10 | 7 | 42 | 59 [▼27] | 7,134,215 | 13.40% | ||
7. 당내 계파[편집]
민주당(일본)/계파 항목 참조.
[A] 1.1 1.2 Yazawa, Shujiro (July 16, 2015). "The crisis of democracy in Japan". openDemocracy. Retrieved November 8, 2020. The party was composed of politicians whose political and ideological backgrounds were so diverse, ranging from conservatives to social democrats, that it was difficult to get a consensus even on basic policies.[3] 민주당이 부진했던 2001년 참의원 선거에서도 어쨌거나 의석을 늘리기는 늘렸다.[4] 사실 초기엔 사회당계 의원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혁신색이 다소 강한 편이었지만, 2차례(1998년, 2003년)에 거쳐 몸집을 불리는 과정에서 보수파 의원들이 민주당에 대거 입당하는 바람에 보수색이 강해졌다.[5] 사민당이나 일본 공산당 입 장에서는 그리 틀린 말도 아닌 게, 민주당은 결국 자민당을 이긴다는 목적만 보고 성향에 관계없이 여기저기 끌어다 모은 이도저도 아닌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6] 참고로 일본 사민당은 한국으로 치면 민주노동당과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냉전 붕괴 이전에 북한과 꾸준히 소통하던 당이기도 하다.[7] 1994년 사회당과 자민당, 신당 사기카케가 연립정권을 구성하자 한계를 느낀 나머지 7개 정당들이 뭉쳐만든 정당으로 1995년 참의원 선거에서 선전하기도 했으나 1996년 총선에서 부진하면서 내분이 생겨 1997년 12월에 해산되었다.[8] 그러나 1996년 당시에는 제1야당이었던 신진당이 156석이라는 어마어마한 의석을 획득하였고, 민주당은 그 때 당시에 막 창당된 신흥 정당이였기에, 이러한 결과가 나오는게 당연한 일이었다.[9] 근년에 유신회, 다함께당, 태양당 등 일부 극우 계파가 자민당에서 조금씩 갈라진 감이 없지 않지만.[10] 1986년 중, 참의원 동시 선거에서 일본사회당이 기록했다.[11] 무소속 고야리 다카시 후보.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이시바 시게루 자민당 간사장의 지원도 강하게 받았다.[12] 인근 후쿠이현에 원전이 있다. #[13] 민나노당이 선거를 앞두고 해산되어서 남은 당원들이 민주당으로 입당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결속당, 차세대당, 유신회, 생활당, 사회민주당, 녹색바람, 신당 대지 등이 남아있다. 거기에다가 공조대상 야당들의 성향들을 보면 좌로는 사회민주당, 우로는 유신회(...)와 차세대당으로 거의 극과 극을 달리다시피 하고 있다...[14] 여기서 공산당은 제외. 공산당은 1980년 총선을 앞두고 정권교체를 노리고 있던 사회당과 공조관계가 깨진 뒤부터[15] 일부 지방선거를 제외하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마이웨이하는 신세다.[15] 물론 오히라 수상이 선거운동기간 중에 사망하는 바람에 정권교체는 불발되었다.[16] 참고로 1972년 중의원 총선에서 사회당이 이런 식으로 후보자를 줄이는 전략을 써서 어느 정도 의석수를 회복한 바 있다.[17] 중의원 290여석, 참의원 110여석[18] 우익보수 성향이 강한 18~19세의 선거권 획득과, 민주당이 그나마 유리했던 2인 당선 선거구가 기존 10곳에서 4곳으로 대폭 축소등등[19] ミンス党. 민스토. 아무래도 민주의 발음인 민슈를 한국스럽게 비틀어서 까는것 같다.[20] 그나마도 지역구 27석으로 버틴 거지 광역비례 30석은 일본 유신회의 40석에도 10석 뒤진다. 일본 유신회의 의석은 지역구 14석을 더해 54석. 물론 야권이라 볼 수 있는 일본 미래당과 사회민주당, 연정인 국민신당이 12석 있지만 유신회와 흡사한 노선의 다함께당은 아예 18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