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선거제도 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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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1~48대
오카다 가쓰야 | →
| 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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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가쓰야의 역임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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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 11대 민주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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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137~138대 외무대신
[ruby(岡, ruby=おか)][ruby(田, ruby=だ)][ruby(克, ruby=かつ)][ruby(也, ruby=や)] 오카다 가쓰야 | |
이름
| 오카다 가쓰야 ([ruby(岡, ruby=おか)][ruby(田, ruby=だ)][ruby(克, ruby=かつ)][ruby(也, ruby=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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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
출생지
| |
학력
| |
가족
| 배우자 오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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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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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 선수
| 10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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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 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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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구
| |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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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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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출생, 정계 입문 이전
1.2. 정치 입문 시절
1.3. 민주당
2002년, 제5회 당대표 선거에서 간 나오토에게 패해 간사장에 취임한다. 이후 2004년, 제6,7회 민주당 대표에 취임하고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을 한 석 앞서면서 주목받지만 예상보다 빠른 중의원 해산(우정 해산)으로 인해 실시된 총선에서 참패하면서 대표직에서 물러난다.
2006년, 민주당 개조인사로 부대표에 선출된다.
2009년 젊은 의원들을 규합하며 다시 대표선거에 출마하지만 하토야마 유키오에게 밀렸다. 이 때 선거 직전 민주당 인사들이 오카다에게 해준 말이 미국에는 오바마, 일본에는 오카다가 있다고 해주기도 했다. 패배 직후 간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민주당 정권에서 외무장관, 간사장, 부총리 등을 거치다가 민주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야당 인사가 되었다. 외무상 시절 식민지 지배에 대해 다시 사죄하고 식민지배의 강제성과 폭력성을 인정하는 간 담화에 관여했다.
2014년 가이에다 반리의 대표 사임으로 인하여 대표 대행이 되었고 2015년 다시 민주당 대표선거에 출마하여 호소노 고시를 제치고 마지막 민주당 당대표로 당선되었다. 야당 재편파로 유신당과 통합을 주장하는 호소노 후보에 비해 야당 재편에 신중하고, 경험 많은 당대표가 이끌어 선명한 야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오카다의 주장이 높이 평가받았다. 그러나 미에현지사 선거에서 민주당이 독자 후보를 옹립하는 것을 포기하고 보수 성향의 스즈키 에이케이 후보가 당선되는 등 자신의 지역구에서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다는 평도 받았다.
2006년, 민주당 개조인사로 부대표에 선출된다.
2009년 젊은 의원들을 규합하며 다시 대표선거에 출마하지만 하토야마 유키오에게 밀렸다. 이 때 선거 직전 민주당 인사들이 오카다에게 해준 말이 미국에는 오바마, 일본에는 오카다가 있다고 해주기도 했다. 패배 직후 간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민주당 정권에서 외무장관, 간사장, 부총리 등을 거치다가 민주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야당 인사가 되었다. 외무상 시절 식민지 지배에 대해 다시 사죄하고 식민지배의 강제성과 폭력성을 인정하는 간 담화에 관여했다.
2014년 가이에다 반리의 대표 사임으로 인하여 대표 대행이 되었고 2015년 다시 민주당 대표선거에 출마하여 호소노 고시를 제치고 마지막 민주당 당대표로 당선되었다. 야당 재편파로 유신당과 통합을 주장하는 호소노 후보에 비해 야당 재편에 신중하고, 경험 많은 당대표가 이끌어 선명한 야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오카다의 주장이 높이 평가받았다. 그러나 미에현지사 선거에서 민주당이 독자 후보를 옹립하는 것을 포기하고 보수 성향의 스즈키 에이케이 후보가 당선되는 등 자신의 지역구에서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다는 평도 받았다.
1.4. 민진당과 그 이후
2016년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신의 중의원 지역구가 있는 곳이자 정치 기반인 미에현에서 민진당 후보가 낙선하면 다음 당대표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배수진을 쳤다. 미에현은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과 민진당의 명운을 건 격전지인 총 32곳의 1인 선거구 중 하나였는데, 선거 결과 민진당에서 출마한 미에현 후보가 끝내 겨우 당선되어 그나마 한숨 돌리게 되었다. 당시, 아베 신조와 오카다 가쓰야의 대결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곳이었다. 하지만 개헌선인 2/3을 자유민주당(일본), 공명당, 오사카 유신회 등 개헌세력이 차지하는 걸 막지 못해, 이에 오카다 대표에 대한 책임론이 부상하였고, 결국 7월 30일 불출마를 선언했다.
8월 2일 양원의원총회에서 9월 2일 대표 선거를 고시하고, 9월 15일 투표와 개표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선거 결과 렌호 대표대행이 차기대표로 선출되었다.
이후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진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되었다. 희망의 당에서 출마하려 했으나 거부당했고 입헌민주당과는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되었다. 투표 결과, 64.3%(147,255표)를 획득하며 압도적인 차이로 자유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10선째 이후 한동안 민진당 출신 무소속 회파를 유지하면서 호헌 연대에 참여했다.
8월 2일 양원의원총회에서 9월 2일 대표 선거를 고시하고, 9월 15일 투표와 개표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선거 결과 렌호 대표대행이 차기대표로 선출되었다.
이후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진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되었다. 희망의 당에서 출마하려 했으나 거부당했고 입헌민주당과는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되었다. 투표 결과, 64.3%(147,255표)를 획득하며 압도적인 차이로 자유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10선째 이후 한동안 민진당 출신 무소속 회파를 유지하면서 호헌 연대에 참여했다.
1.5. 입헌민주당
2.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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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 1994
| 정계 입문
| |
1994
| 창당
| |
1994 - 1997
| 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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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 1998
| 정당 해산
| |
1998
| 창당
| |
1998
| 합당
| |
2005 - 2016
| 합당
| |
2016 - 2017
| 당명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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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 2020
| 무소속 출마로 탈당
| |
2020 -
| 입당
|
3. 여담
4. 둘러보기
[1] 중선거구제 시절이라 가능했다.[2] 재벌집안 출신이라 사실 더러운 돈을 받을 필요가 없다(...) 한국으로 치면 정몽준 비슷한 케이스.[3] 재벌집안 출신이라 사실 더러운 돈을 받을 필요가 없다(...) 한국으로 치면 정몽준 비슷한 케이스.[4] 최소한 그는 민진당과 희망의 당이 합류한다고 해도 국민들의 지지를 못 받을 것과 입헌민주당만이 국민들의 지지를 어느 정도 받고 있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5] 최소한 그는 민진당과 희망의 당이 합류한다고 해도 국민들의 지지를 못 받을 것과 입헌민주당만이 국민들의 지지를 어느 정도 받고 있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