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임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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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장조의 현손
완순군 이재완 完順君 李載完 | |
군호
| 완순군(完順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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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이을경(李乙經) → 이재완(李載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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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순칠(舜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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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석호(石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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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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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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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조선국 시절
1856년(철종 7년) 1월 12일, 경기도 양주군 와공면[3]에서 선조의 9남 경창군의 9대 종손 음현령 이신오(李愼五)[4]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창군파의 10대 종손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864년(고종 1년) 8월에 21촌 숙부인 흥완군 이정응의 양자가 되면서 경창군파 종가는 그의 하나 뿐인 남동생인 이재곤이 물려받았다. 이 양자 입적으로 원래는 22촌 형뻘인 먼 친척 고종과 사실상 4촌이 되어 가까운 종친으로 대접받았다.[5] 이 때 이름을 이재완으로 고쳤다.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8살 때인 1873년(고종 10년) 7월에 동몽교관[6]을 시작으로 1875년(고종 12년) 4월에 문과 병과에 급제했고, 이후 가주서[7]로 임명받았다. 이후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기주관을 거쳐 겸설서와 겸춘추를 겸직하는 등 나름 잘나갔다. 그밖에도 승정원 동부승지를 제수받고 곡산 부사와 춘천 부사를 역임했으며 승정원도승지 및 의약청 부제조와 이조 참판,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다.
그의 관직 생활 중 그나마 역사의 흐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시기가 갑신정변 때였다. 개화당 내각의 병조판서를 맡은 것.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뒤 관련자들 대부분은 망명하거나 사살당했지만 그는 종친인데다 개화당원이 아니라서 정변 후에도 예조판서를 지내는 등 관직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후에도 형조와 이조, 예조의 판서 및 지경연사를 거쳐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했고 예문관과 홍문관의 제학, 시강원 좌부빈객, 한성부 판윤, 판의금부사 등의 관직을 거쳤다. 1887년(고종 24년)에는 잠시 왕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4촌 형 이재원[8]과 함께 경기도 부평[9]으로 유배갔다가 곧 풀려났다.
1894년 6월에는 의정부 좌참찬으로 제수받았고 1895년(고종 32년) 5월에 궁내부 특진관 칙임관으로 임명받았다. 1896년(건양 원년) 1월에는 종정원경 겸 귀족원경(宗正院卿兼貴族院卿)으로 임명받아 대한제국 수립 이후인 1898년(광무 원년) 1월까지 역임했다.
1896년(건양 원년) 10월에 명성황후의 빈전 제조, 1897년(광무 원년)에는 산릉도감 제조를 맡는 등 명성황후 장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원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창군파의 10대 종손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864년(고종 1년) 8월에 21촌 숙부인 흥완군 이정응의 양자가 되면서 경창군파 종가는 그의 하나 뿐인 남동생인 이재곤이 물려받았다. 이 양자 입적으로 원래는 22촌 형뻘인 먼 친척 고종과 사실상 4촌이 되어 가까운 종친으로 대접받았다.[5] 이 때 이름을 이재완으로 고쳤다.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8살 때인 1873년(고종 10년) 7월에 동몽교관[6]을 시작으로 1875년(고종 12년) 4월에 문과 병과에 급제했고, 이후 가주서[7]로 임명받았다. 이후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기주관을 거쳐 겸설서와 겸춘추를 겸직하는 등 나름 잘나갔다. 그밖에도 승정원 동부승지를 제수받고 곡산 부사와 춘천 부사를 역임했으며 승정원도승지 및 의약청 부제조와 이조 참판,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다.
그의 관직 생활 중 그나마 역사의 흐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시기가 갑신정변 때였다. 개화당 내각의 병조판서를 맡은 것.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뒤 관련자들 대부분은 망명하거나 사살당했지만 그는 종친인데다 개화당원이 아니라서 정변 후에도 예조판서를 지내는 등 관직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후에도 형조와 이조, 예조의 판서 및 지경연사를 거쳐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했고 예문관과 홍문관의 제학, 시강원 좌부빈객, 한성부 판윤, 판의금부사 등의 관직을 거쳤다. 1887년(고종 24년)에는 잠시 왕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4촌 형 이재원[8]과 함께 경기도 부평[9]으로 유배갔다가 곧 풀려났다.
1894년 6월에는 의정부 좌참찬으로 제수받았고 1895년(고종 32년) 5월에 궁내부 특진관 칙임관으로 임명받았다. 1896년(건양 원년) 1월에는 종정원경 겸 귀족원경(宗正院卿兼貴族院卿)으로 임명받아 대한제국 수립 이후인 1898년(광무 원년) 1월까지 역임했다.
1896년(건양 원년) 10월에 명성황후의 빈전 제조, 1897년(광무 원년)에는 산릉도감 제조를 맡는 등 명성황후 장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2. 대한제국 시절
1897년(건양 2년) 2월에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은행인 한성은행을 설립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98년(광무 2년) 홍문관 학사와 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한데 이어 1899년(광무 3년)에는 궁내부 대신으로 임명받고 종정원경 직을 겸임했다. 같은 해 9월에 족보 상 고조할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받자 황제의 4대손에 해당했기에[10] '완순군(完順君)'군호를 받고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11] 1902년(광무 6년) 7월에는 평식원(平式院) 총재 직을 맡았다.
1903년(광무 7년) 2월에 한성은행을 합자회사 공립 한성은행으로 개편시키면서 은행장으로 부임했다. 같은 해 3월에는 대한철도회사 사장을 맡았으며, 다음 해에 궁내부 대신으로 복직했다.
1905년(광무 9년) 1월에는 보빙대사(報聘大使)로서 일본에 다녀왔다. 1907년(광무 11년) 4월에 육군부장이 되었고, 그 해[12] 8월에 승녕부 총관[13]으로 임명받았다. 그 무렵 대한제국을 방문한 일본의 요시히토 황태자를 순종황제, 의민태자 및 다른 황족들과 함께 맞이했다.
1903년(광무 7년) 2월에 한성은행을 합자회사 공립 한성은행으로 개편시키면서 은행장으로 부임했다. 같은 해 3월에는 대한철도회사 사장을 맡았으며, 다음 해에 궁내부 대신으로 복직했다.
1905년(광무 9년) 1월에는 보빙대사(報聘大使)로서 일본에 다녀왔다. 1907년(광무 11년) 4월에 육군부장이 되었고, 그 해[12] 8월에 승녕부 총관[13]으로 임명받았다. 그 무렵 대한제국을 방문한 일본의 요시히토 황태자를 순종황제, 의민태자 및 다른 황족들과 함께 맞이했다.
2.3. 생애 후반
2.4. 일제강점기의 행적
3. 사후
4. 여담
5. 가족과 후손
완순군 가족사진. 왼쪽부터 이규용(완순군 차남), 이규용 부인 풍산 홍씨, 완순군 부인 달성 서씨, 완순군의 딸,
완순군 이재완, 이해선(완순군 장손), 이달용(완순군 장남) 부인 안동 김씨, 이달용, 맨 뒤는 희경할머니(주방 총괄 담당) |
[1] 음력 을묘년 12월 5일.[2] 음력 을묘년 12월 5일.[3] 현재의 남양주시 와부읍.[4] 1868년 이후 이신응(李愼應)으로 개명. 1870년 10월 사망.[5] 왜 사실상이냐면 고종 역시 문조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종의 생가 친 형제들 및 사촌 형제들은 이재완과 법적으로 정확히 4촌.[6] 童蒙敎官. 조선시대 어린이를 교육하기 위해 각 군현에 두었던 종9품 관직.[7] 假注書. 조선시대 승정원에 두었던 정7품 임시 관직.[8] 양아버지 흥완군의 친자로, 흥완군의 형 흥녕군의 양자로 출계했다.[9] 지금의 인천광역시 북부 및 북동부, 경기도 부천시 일대.[10] 황족의 범위는 황제의 4대손까지이다. 그의 가계에서 마지막으로 왕을 했던 사람은 영조였고, 그는 영조의 5대손이었기에 사도세자 추존 이전에는 종친으로서의 군호를 받을 수 없었다.[11] 군호는 왕실의 본관 완산(전주)의 '완(完)'에 양어머니 박씨의 본관 순천의 '순(順)'에서 따왔다.[12] 고종이 강제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하면서 7월에 연호가 융희로 바뀌었다.[13] 承寧府. 황제가 쓰는 물품 · 의복 · 거마(車馬) 등을 조달, 관리하며 이에 관련된 회계 사무를 맡기 위해 설치했던 궁내부 산하 관청.[14]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1리 97-1 안골.[15] 당시 기사 : 1908년(융희 2년) 4월 28일 자 대한매일신보.
[16] 당시 기사 : 1908년(융희 2년) 4월 28일 자 대한매일신보.
파일:완순군운현궁30칸사(대한매일신보1908.4.28).jpg
파일:완순군운현궁30칸사(대한매일신보1908.4.28).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