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안에 큰 성씨 여덟 가문이 있다.
國中大姓有八族
1. 개요
사서
| 등장하는 성씨
| |||||||
《수서》
| 사씨(沙氏)
| 연씨(燕氏)
| 해씨(解氏)
| 정씨(貞氏)
| 국씨(國氏)
| 목협씨(木劦氏)
| 백씨(苩氏)
| |
《신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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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전》
| 진씨(眞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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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사》
| 묘씨(苗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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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翰苑)》
| 협씨(劦氏)
| 수씨(首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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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7개[5]의 귀족 가문을 나타내는 용어. 대성팔족이란 단어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수서》에서 비롯된 말이다.
《삼국사기》와의 교차 검증 결과 《통전(通典)》의 기록이 가장 신뢰받고 있다. 한국 사서에는 7개의 귀족 성씨가 등장하는데, 국씨(國氏), 목씨(木氏), 백씨(苩氏), 사씨(沙氏), 연씨(燕氏), 진씨(眞氏), 해씨(解氏)이다. 정씨(貞氏), 묘씨(苗氏), 수씨(首氏), 협씨(劦氏)는 중국 사서에만 등장하는데, 정씨(貞氏)는 진씨(眞氏)의 오기로[6], 묘씨(苗氏), 수씨(首氏)는 백씨(苩氏)의 오기로 여겨진다. 한편 협씨(劦氏)는 한국과 일본의 기록에서 목협씨(木劦氏)라는 형태로 등장하긴 하나 협씨(劦氏) 단독으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중국 기록에는 모두 1자의 단성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한국이나 일본의 사서나 금석문에서는 사씨(沙氏)는 사택씨(沙宅氏), 목씨(木氏)는 목리씨(木刕氏) 등 복성으로 등장하기도 하므로, 일부 성씨가 축약 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도 복성이지만 중국 사서에서는 단성인 여(餘)씨로 축약 표기되었다. 백제에서 중국에 보내는 문서에서부터 이미 축약 표기가 사용됨이 확인되는데, 중국 측과 교류할 때는 축약 표기를 하는 게 관례였던 것 같다. 이 축약 표기는 일본 측 기록에서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2. 종류
2.1. 진씨(眞氏)/진모씨(眞牟氏)
8년(547) 여름 4월, 백제가 전부(前部)의 덕솔(德率) 진모선문(眞慕宣文)과 내솔(奈率) 기마(奇麻) 등을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였다. 그리고 하부(下部)의 동성자언(東城子言)을 보내어 덕솔 문휴마나(汶休麻那)를 교대하게 하였다.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8년
위 기록은 성왕이 고구려를 공격하고자 일본에 병력을 요청하는 장면이다. 여기에 나오는 진모선문은 6년 전인 541년 가을에 안라(安羅)에 사신으로 파견된 내솔 선문(宣文)과 동일인물로 여겨진다. 한편 일본서기 흠명기 4년조에는 전부 사람으로 내솔 관등의 진모귀문(眞牟貴文)이 등장한다.
1960년,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에서 발굴되어 국보 제108호로 지정된 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에는 ‘계유년에 대사 진모씨(眞牟氏) 등 250명이 국왕과 대신 및 칠세부모(七世父母) 등을 위하여 아미타불과 여러 불보살상을 만든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 불상이 만들어진 계유년은 673년으로 추정되며 불상이 발굴된 충남 연기지방이 한때 백제부흥운동 활동지역이었다는 점에서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귀족 진모씨가 망국의 한을 달래고자 사람들을 모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475년 장수왕의 공격으로 위례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사망하자, 백제가 웅진성으로 천도한다. 그런데 이때 문주왕을 보필해 웅진 천도를 도운 사람으로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가 등장한다. 이때 삼국사기는 ‘목협과 조미는 모두 복성(復姓)이다.’라고 명시하기에 조미걸취가 조미씨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조미씨는 일본서기 케이타이 덴노 7년(513)에 나오는 장군 저미문귀(姐彌文貴)와 동일한 성씨임이 유력하다. 남제서 백제전에 보이는 저근(姐瑾)도 저미근이라는 이름을 줄여 부른 것일 가능성이 있다. 잘 보면 전부 자음이 ㅈㅁ이기 때문에, 이것은 모두 고대 한국어로 '참'에 해당하는 단어를 다르게 표기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한편 일본서기가 기록한 ‘저미’의 독음은 ‘사미(さみ)’인데, 고대 일본어에서 さ행은 오늘날과 같은 [s]가 아니라 파찰음 [ts]로 발음되었다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성팔족 중에서도 해씨와 더불어 가장 유서 깊은 세력이다. 다루왕 10년 우보에 임명된 북부(北部)의 진회(眞會)나 초고왕 49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말갈 석문성(石門城)을 공격한 북부 진과(眞果)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백제가 성장하는 3세기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북부라고 명시되는데 북부라는 묘사를 들어 하남위례성을 기준으로 북부는 한강이북이다. 즉 진씨의 본거지가 하남위례성의 기준에서 북쪽인 한강 이북으로 보이며 한강이북의 경기도~황해도 일대를 본거지로 비정할 수 있다. 하지만 부여에서 건너온 게 명시되는 해씨와 달리 출신이 부여계와는 다른 것으로 보이는데, 해씨가 집권하던 시기에는 고구려와의 충돌을 자제했지만 진모씨 집권 당시에는 오히려 고구려에게 적대적인 면이 강했기 때문이다.
진회와 싸웠다는 말갈은 흔히들 생각하는 말갈이 아니라 당시 강원도와 한강 이북에 거주하던 예맥할 때의 예족이다.(고조선과 부여계는 맥족이다) 동예도 동쪽 강원도에 거주하던 예족이라서 붙은 명칭이다. 따라서 진씨는 부여계보다는 오히려 한강 이북의 한북예(漢北濊)로 추정된다.
고이왕 대에는 진충(眞忠), 진물(眞勿) 등이 당시 우보나 좌장(左將)의 고위직에 오르면서 세력의 기반을 마련했다. 근초고왕이 진모씨를 왕비족으로 삼으면서 본격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지만, 좌장 진무眞武를 비롯한 집권층이 광개토대왕에게 참패하면서 잠깐 꺾인다. 부여설례의 난 이후 한성백제에서 모습을 감춘 걸 보면 이때 부여설례를 도왔던 것 같다.
웅진백제 시기인 477년 병관좌평 해구(解仇)의 난으로 문주왕이 시해되자 덕솔이었던 진로(眞老)가 오백 장병을 이끌고 대두성에 있던 해구를 격살해 진로는 병관좌평에 이르러 진모씨의 권세를 되찾게 된다. 하지만 동성왕은 금강의 사택씨, 연비씨, 백씨를 끌어들여 진모씨를 견제했는데, 497년 진로의 후임 병관좌평으로 신진세력 연비씨인 연돌을 임명한 사건은 진모씨의 권세에 한계가 있다는 반증이 된다.
한국의 서산 진씨(西山 眞氏)가 대성팔족 진씨(眞氏)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현재 등록된 진씨(眞氏)의 숫자는 1,600명 정도 되어 굉장히 희귀한 성씨이다.
1960년,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에서 발굴되어 국보 제108호로 지정된 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에는 ‘계유년에 대사 진모씨(眞牟氏) 등 250명이 국왕과 대신 및 칠세부모(七世父母) 등을 위하여 아미타불과 여러 불보살상을 만든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 불상이 만들어진 계유년은 673년으로 추정되며 불상이 발굴된 충남 연기지방이 한때 백제부흥운동 활동지역이었다는 점에서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귀족 진모씨가 망국의 한을 달래고자 사람들을 모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475년 장수왕의 공격으로 위례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사망하자, 백제가 웅진성으로 천도한다. 그런데 이때 문주왕을 보필해 웅진 천도를 도운 사람으로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가 등장한다. 이때 삼국사기는 ‘목협과 조미는 모두 복성(復姓)이다.’라고 명시하기에 조미걸취가 조미씨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조미씨는 일본서기 케이타이 덴노 7년(513)에 나오는 장군 저미문귀(姐彌文貴)와 동일한 성씨임이 유력하다. 남제서 백제전에 보이는 저근(姐瑾)도 저미근이라는 이름을 줄여 부른 것일 가능성이 있다. 잘 보면 전부 자음이 ㅈㅁ이기 때문에, 이것은 모두 고대 한국어로 '참'에 해당하는 단어를 다르게 표기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한편 일본서기가 기록한 ‘저미’의 독음은 ‘사미(さみ)’인데, 고대 일본어에서 さ행은 오늘날과 같은 [s]가 아니라 파찰음 [ts]로 발음되었다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성팔족 중에서도 해씨와 더불어 가장 유서 깊은 세력이다. 다루왕 10년 우보에 임명된 북부(北部)의 진회(眞會)나 초고왕 49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말갈 석문성(石門城)을 공격한 북부 진과(眞果)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백제가 성장하는 3세기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북부라고 명시되는데 북부라는 묘사를 들어 하남위례성을 기준으로 북부는 한강이북이다. 즉 진씨의 본거지가 하남위례성의 기준에서 북쪽인 한강 이북으로 보이며 한강이북의 경기도~황해도 일대를 본거지로 비정할 수 있다. 하지만 부여에서 건너온 게 명시되는 해씨와 달리 출신이 부여계와는 다른 것으로 보이는데, 해씨가 집권하던 시기에는 고구려와의 충돌을 자제했지만 진모씨 집권 당시에는 오히려 고구려에게 적대적인 면이 강했기 때문이다.
진회와 싸웠다는 말갈은 흔히들 생각하는 말갈이 아니라 당시 강원도와 한강 이북에 거주하던 예맥할 때의 예족이다.(고조선과 부여계는 맥족이다) 동예도 동쪽 강원도에 거주하던 예족이라서 붙은 명칭이다. 따라서 진씨는 부여계보다는 오히려 한강 이북의 한북예(漢北濊)로 추정된다.
고이왕 대에는 진충(眞忠), 진물(眞勿) 등이 당시 우보나 좌장(左將)의 고위직에 오르면서 세력의 기반을 마련했다. 근초고왕이 진모씨를 왕비족으로 삼으면서 본격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지만, 좌장 진무眞武를 비롯한 집권층이 광개토대왕에게 참패하면서 잠깐 꺾인다. 부여설례의 난 이후 한성백제에서 모습을 감춘 걸 보면 이때 부여설례를 도왔던 것 같다.
웅진백제 시기인 477년 병관좌평 해구(解仇)의 난으로 문주왕이 시해되자 덕솔이었던 진로(眞老)가 오백 장병을 이끌고 대두성에 있던 해구를 격살해 진로는 병관좌평에 이르러 진모씨의 권세를 되찾게 된다. 하지만 동성왕은 금강의 사택씨, 연비씨, 백씨를 끌어들여 진모씨를 견제했는데, 497년 진로의 후임 병관좌평으로 신진세력 연비씨인 연돌을 임명한 사건은 진모씨의 권세에 한계가 있다는 반증이 된다.
한국의 서산 진씨(西山 眞氏)가 대성팔족 진씨(眞氏)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현재 등록된 진씨(眞氏)의 숫자는 1,600명 정도 되어 굉장히 희귀한 성씨이다.
2.2. 해씨(解氏)
"41년(23년) 봄 정월에 우보 을음(乙音)이 사망하자 북부의 해루를 우보로 임명하였다. 해루는 본래 부여인인데 그 도량이 넓고 식견이 깊었으며 일흔이 넘어서도 체력이 강하여 등용된 것이다." - 삼국사기
백제에서 해씨 중 가장 먼저 등장한 사람은 해루(解婁)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해루는 북부(北部) 출신이며 온조왕 대 우보(右輔)의 벼슬을 지냈다. 친족세력인 족부(族父) 을음이 죽자 해루를 후임으로 내세워 재상격인 우보를 맡긴 것은 해씨의 강성함과 더불어 백제건국 세력인 온조왕과 깊은 연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목할 점은 해루가 '부여인'이라는 것인데 해씨는 부여의 왕가였으며 일흔이 넘었다는 것을 통해 백제건국 세력 중에서도 오래된 세력임을 증명한다.
해씨의 출신이 고구려가 세워진 졸본부여라는 추측도 있다. 지리적으로 백제가 세워진 한강일대는 동부여나 북부여 기준에서는 남하하기에는 너무 서쪽이기 때문이다.
한성백제 시절부터 진씨와 더불어 대성팔족 중에서 가장 먼저 세력을 떨친 백제의 대귀족 가문이었으며, 아신왕이 진사왕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할 때 최초로 정계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가 죽은 후에 왕제(王弟) 간에 왕위쟁탈전이 일어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왜에 있던 전지왕을 즉위시켜 왕비족(王妃族)으로 권세를 떨쳤다. 웅진백제 시절 그 권세는 더더욱 커져 477년에는 병관좌평 해구(解仇)가 문주왕을 시해하고 난을 일으키는 사건까지 일어났으나 왕실이 진씨와 결탁하여 이를 진압하면서 그 세가 꺾인다.
그러나 동성왕 대에는 장군 해예곤이 북위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기록이 있으며, 무령왕 대에는 한솔 해명이 백가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우는 등 여전히 중앙에서 활동했다. 이후 무왕 때 좌평 해수(解讎)가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했다가 참패한 이후로 해씨는 더이상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데, 이를 두고 무왕이 패전의 책임을 물으며 해씨 세력을 중앙 정계에서 축출함으로써 왕권을 넘보던 귀족 세력에게 본보기를 보였다는 추측이 있다.
2.3. 목씨(木氏)/목리씨(木刕氏)/목협씨(木劦氏)
문주가 곧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목협(木劦), 조미(祖彌)는 모두 두 자 성인데, 『수서(隋書)』에서는 목(木)과 협(劦)을 두 개의 성으로 보았으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를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삼국사기》 개로왕 본기
목라(木羅), 목협(木劦)이라고도 표기되었다. 목협(木劦)은 목리(木刕)의 오자다. 그리고 목리(木刕)와 목라(木羅)는 일본서기에서 별도의 훈 없이 똑같이 '모쿠라'라고 읽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그냥 '목라'씨였다는 게 거의 확증된다. 참고로 刕의 음은 네이버 한자사전으로 검색해보면 가를 리 하나만 나오지만 다음 한자사전에 의하면 가를 리, 가를 례 의 2개가 나온다. # 木劦가 목례라 표기된 경우는 후자 쪽을 따른 경우. 현대 중국어나 일본어에서는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그냥 리로 읽힌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인물로는 조미걸취와 함께 웅진성 천도에서 큰 공을 세운 목협만치(木劦滿致)가 전부이며, 일본서기의 목만치와 동일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일본서기에 자주 등장하는 집단으로, 그 구성원 중 처음 이름이 거론된 근초고왕 대의 목라근자(木羅斤資)는 근초고왕의 남정을 주도했다. 이외에 목씨로 여겨지는 사람으로는 목리금돈, 목리마나, 목리문차가 있다. 일본서기에 다르면 목라근자는 근초고왕 남정에서 가야 7국을 평정했고 목만치는 가야에서 신라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왜국의 카츠라기노 소츠히코[11]가 가야를 침공해 가라국왕 기본한기(己本旱岐)와 아들 백구지(百久至), 아수지(阿首至), 국사리(國沙利), 이라마주(伊羅麻酒), 이문지(爾汶至) 등이 백제로 도망치자 목라근자가 구해준 사실로 미루어, 목씨는 백제-가야의 교류과정에서 힘을 키웠으며 가야의 소국들과 깊은 연관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420년, 전지왕이 사망하고 구이신왕이 유년에 왕위에 오르자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가 국정을 장악하고 횡포를 부리다 왜로 도망치는 일이 벌어졌다. 475년 고구려 위례성 함락으로 인해 웅진천도 당시 그를 보좌하던 사람도 목협만치였다. 삼국사기에는 목씨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지만 일본서기에는 이후에도 꾸준히 등장한다. 목씨는 사비백제 시절까지 세력을 유지했다.
출신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목씨의 본거지가 마한 목지국(目支國)이라는 추측이 있다. 목씨의 木과 目은 발음이 통하고, 성읍을 뜻하는 지(支)는 벌, 평야, 성을 뜻하는 라(羅)와 발음이 통하므로, 목라씨는 목지국에서 비롯되었다는 논리이다. 고대사회에서는 국명을 성씨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므로 아주 무시할 설은 아니다.
한편 일본의 고대 호족 중 하나인 키씨(紀氏)가 목씨(木氏)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목(木)을 일본어 훈독으로 읽으면 '키'가 되며 키씨(紀氏)의 유명한 인물인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 生磐宿禰)의 행적이 목만치(木滿致)와 닮았기 때문이다. 혹은 역으로 목씨(木氏)가 키씨(紀氏)에서 유래한 것일 가능성도 있는게 아니냐는 설도 있다. 키씨(紀氏)가 백제에 정착하며 성씨를 현지화하면서 의미에서 따온 한자인 목씨(木氏)를 자칭했을 수도 있다는 것인데[12] 키(紀)씨가 기록상에서 목씨로써 표기된건 키노 츠노노스쿠네(木 角宿禰)의 경우이다. 이 이름을 오독해서 '목각(木角)'씨로 본 경우가 있는데 키(木)가 우지(氏)이고 츠노(角)가 이름이고 스쿠네(宿禰)는 카바네(姓)이다. 그러니까 현대 일본식 이름으로 치환하면 그냥 '키 츠노(木 角)'가 되며 따라서 목각씨로 표기된 경우는 어디에도 없다.
다른 표기인 협씨 성을 가진 인물은 단 한 번도 기록에 나타나지 않았다. 협씨(劦氏)는 한국과 일본의 기록에서 목협씨(木劦氏)라는 형태로 협(劦)자가 등장하긴 하나 협씨(劦氏) 단독으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협씨(劦氏)는 중국 기록에서만 등장하며 한국과 일본의 기록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협씨(劦氏) 성을 가진 인물도 단 한 명도 기록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목리씨(木刕氏)를 착각하여 탄생한 것으로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일본 기록에 나타나는 문휴(汶休)씨의 음이 '몬쿠'이기 때문에 발음의 유사성에 근거해 목씨의 다른 표기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다. 삼국시대는 아직 고려나 조선처럼 한자 문화가 완전히 정착하기 전이라 표기가 들쭉날쭉한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인물로는 조미걸취와 함께 웅진성 천도에서 큰 공을 세운 목협만치(木劦滿致)가 전부이며, 일본서기의 목만치와 동일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일본서기에 자주 등장하는 집단으로, 그 구성원 중 처음 이름이 거론된 근초고왕 대의 목라근자(木羅斤資)는 근초고왕의 남정을 주도했다. 이외에 목씨로 여겨지는 사람으로는 목리금돈, 목리마나, 목리문차가 있다. 일본서기에 다르면 목라근자는 근초고왕 남정에서 가야 7국을 평정했고 목만치는 가야에서 신라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왜국의 카츠라기노 소츠히코[11]가 가야를 침공해 가라국왕 기본한기(己本旱岐)와 아들 백구지(百久至), 아수지(阿首至), 국사리(國沙利), 이라마주(伊羅麻酒), 이문지(爾汶至) 등이 백제로 도망치자 목라근자가 구해준 사실로 미루어, 목씨는 백제-가야의 교류과정에서 힘을 키웠으며 가야의 소국들과 깊은 연관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420년, 전지왕이 사망하고 구이신왕이 유년에 왕위에 오르자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가 국정을 장악하고 횡포를 부리다 왜로 도망치는 일이 벌어졌다. 475년 고구려 위례성 함락으로 인해 웅진천도 당시 그를 보좌하던 사람도 목협만치였다. 삼국사기에는 목씨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지만 일본서기에는 이후에도 꾸준히 등장한다. 목씨는 사비백제 시절까지 세력을 유지했다.
출신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목씨의 본거지가 마한 목지국(目支國)이라는 추측이 있다. 목씨의 木과 目은 발음이 통하고, 성읍을 뜻하는 지(支)는 벌, 평야, 성을 뜻하는 라(羅)와 발음이 통하므로, 목라씨는 목지국에서 비롯되었다는 논리이다. 고대사회에서는 국명을 성씨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므로 아주 무시할 설은 아니다.
한편 일본의 고대 호족 중 하나인 키씨(紀氏)가 목씨(木氏)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목(木)을 일본어 훈독으로 읽으면 '키'가 되며 키씨(紀氏)의 유명한 인물인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 生磐宿禰)의 행적이 목만치(木滿致)와 닮았기 때문이다. 혹은 역으로 목씨(木氏)가 키씨(紀氏)에서 유래한 것일 가능성도 있는게 아니냐는 설도 있다. 키씨(紀氏)가 백제에 정착하며 성씨를 현지화하면서 의미에서 따온 한자인 목씨(木氏)를 자칭했을 수도 있다는 것인데[12] 키(紀)씨가 기록상에서 목씨로써 표기된건 키노 츠노노스쿠네(木 角宿禰)의 경우이다. 이 이름을 오독해서 '목각(木角)'씨로 본 경우가 있는데 키(木)가 우지(氏)이고 츠노(角)가 이름이고 스쿠네(宿禰)는 카바네(姓)이다. 그러니까 현대 일본식 이름으로 치환하면 그냥 '키 츠노(木 角)'가 되며 따라서 목각씨로 표기된 경우는 어디에도 없다.
다른 표기인 협씨 성을 가진 인물은 단 한 번도 기록에 나타나지 않았다. 협씨(劦氏)는 한국과 일본의 기록에서 목협씨(木劦氏)라는 형태로 협(劦)자가 등장하긴 하나 협씨(劦氏) 단독으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협씨(劦氏)는 중국 기록에서만 등장하며 한국과 일본의 기록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협씨(劦氏) 성을 가진 인물도 단 한 명도 기록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목리씨(木刕氏)를 착각하여 탄생한 것으로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일본 기록에 나타나는 문휴(汶休)씨의 음이 '몬쿠'이기 때문에 발음의 유사성에 근거해 목씨의 다른 표기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다. 삼국시대는 아직 고려나 조선처럼 한자 문화가 완전히 정착하기 전이라 표기가 들쭉날쭉한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
- 목리미순(木刕眯淳): 성왕 대의 인물이다. 일본서기에는 541년 7월(나솔)과 543년 12월의 행적이 남아 있는데,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오가며 임나의 복국을 위해 노력하였다. 543년 12월 덕솔로서 임나 재건을 위한 내부 회의에 참석했다.
2.4. 사씨(沙氏)/사택씨(沙宅氏)
일본서기에는 사택기루가 등장하고 국내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의 사택지적(砂宅智積)이나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에는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이 등장한다. 중국 정림사지오층석탑에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에는 대좌평 사타천복의 이름을 전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서기의 사택천복과 같은 인물로 보인다. 또 신당서와 구당서에는 백제부흥운동의 사타상여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명칭을 보아 백제-왜에서는 주로 사택으로 불렀고 중국에서는 주로 사타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택(宅)은 금석문에서는 탁(乇)으로 나온다.
남제서에는 동성왕 대에 북위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백제 장수로 사법명, 찬수류, 해예곤, 목간나를 전하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목라근자와 함께 백제군을 지휘하여 남정을 주도한 사사노궤(沙沙奴跪)(?)[17], 사백개로(沙白蓋盧)를 거론하며 아신왕 대에 사두(沙豆)를 좌장으로 삼은 걸 보면 사씨는 이미 한성백제 시절부터 권세가 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의 성씨가 여러모로 "사탁" 계열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다소 애매하다.
웅진백제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484년 남제의 사신으로 파견된 내법좌평 사약사는 이런 배경으로 좌평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웅진백제에 이르러 강성해진 사택씨는 사비백제 시절 왕비족으로서 최강의 전성기를 누리는데 수서의 중국 사서들이 사택씨를 한결같이 먼저 언급한 것은 그 때문이다. 2009년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 따르면 무왕이 미륵사 창건 당시 무왕의 아내가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 미륵사 창건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로 사택씨가 갈려나갔음에도 백제멸망전에서 백제 대좌평은 사택천복(沙宅千福)이었기에 최후까지 최고 권력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18]
사비백제 시절에 최고권력을 쥐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충남 부여군이 본거지로 추정된다. 사택지적비 명문에 따르면 사택지적이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로 숙청되어 자기 고향인 내기성(奈祇城)으로 돌아가 비를 세웠는데 그곳이 부여읍 관북리였다는 점이 힘을 실어준다.
사(沙)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6명으로 조사되었다. 이 사씨와 백제 대성팔족의 사씨의 관계는 불명.
남제서에는 동성왕 대에 북위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백제 장수로 사법명, 찬수류, 해예곤, 목간나를 전하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목라근자와 함께 백제군을 지휘하여 남정을 주도한 사사노궤(沙沙奴跪)(?)[17], 사백개로(沙白蓋盧)를 거론하며 아신왕 대에 사두(沙豆)를 좌장으로 삼은 걸 보면 사씨는 이미 한성백제 시절부터 권세가 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의 성씨가 여러모로 "사탁" 계열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다소 애매하다.
웅진백제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484년 남제의 사신으로 파견된 내법좌평 사약사는 이런 배경으로 좌평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웅진백제에 이르러 강성해진 사택씨는 사비백제 시절 왕비족으로서 최강의 전성기를 누리는데 수서의 중국 사서들이 사택씨를 한결같이 먼저 언급한 것은 그 때문이다. 2009년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 따르면 무왕이 미륵사 창건 당시 무왕의 아내가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 미륵사 창건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로 사택씨가 갈려나갔음에도 백제멸망전에서 백제 대좌평은 사택천복(沙宅千福)이었기에 최후까지 최고 권력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18]
사비백제 시절에 최고권력을 쥐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충남 부여군이 본거지로 추정된다. 사택지적비 명문에 따르면 사택지적이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로 숙청되어 자기 고향인 내기성(奈祇城)으로 돌아가 비를 세웠는데 그곳이 부여읍 관북리였다는 점이 힘을 실어준다.
사(沙)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6명으로 조사되었다. 이 사씨와 백제 대성팔족의 사씨의 관계는 불명.
- 사택적덕(沙宅積德):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에서 확인된 인물로 무왕의 장인이며 사택왕후(沙宅王后)의 아버지이다. 관등은 좌평이었다.
- 사택지적(砂宅智積): 무왕, 의자왕 대의 인물이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대좌평 지적(智積)과 동일인물로 보인다. 무왕-의자왕 교체기에 파직된 것으로 보인다.
- 사타충의(沙咤忠義): 중국 기록에만 등장하는 인물로, 백제 멸망 후 당나라에서 활동하였다.
2.5. 백씨(苩氏)
5대 초고왕 48년에 등장한 회회(茴會)가 백씨(苩氏)라는 주장도 있다. 백제 관련 기록에서 회(茴)라는 글자는 오직 여기에서만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래에서 나오듯 백씨가 동성왕 때부터 등용되어 시기상 맞지 않는데다가 회(茴)가 성씨인지 그냥 이름의 일부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불분명하다.
동성왕 대에 사택씨, 연비씨와 함께 등용되었다. 그 중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인물은 백가(苩加)였는데, 백가는 동성왕 8년(486) 위사좌평이 되었는데, 위사좌평은 곧 국왕의 경호를 담당하는 직위로 내신좌평과 더불어 왕의 친위세력이나 측근이 차지하였던 요직이다. 하지만 동성왕은 23년(501) 백가를 가림성을 진수(鎭守)하라는 명목으로 그를 파견했고 이로 인해 백가가 불만을 품게 되었다. 결국 502년 10월에 동성왕이 사냥을 하러 나왔다가 큰 눈을 만나 마포촌에 유숙하게 되자 백가가 그 틈을 노려 동성왕을 시해하고 만다. 동성왕이 11월에 승하하고 무령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자 백가는 이듬해(503) 1월에 가림성에 웅거하여 난을 일으켰다가 토벌군이 성 앞에 나타나자 성 밖으로 나와 항복했지만 곧장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일본서기에는 '말다왕(末多王)'[19]이 포악하여 국인(國人)이 함께 제거하였다'고 하는데, 말다왕은 바로 동성왕을 가리키며 그 때문에 원래는 귀족들이 다 같이 손잡고 동성왕을 죽였으면서 무령왕이 즉위하자 모두 백씨에게 뒤집어씌웠고 이에 빡쳐서 반란을 저질렀다는 추측이 있다. 이외에도 무령왕과 동성왕을 제외한 부여곤지의 세 아들들 중 하나와 혼인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무왕 대 신라의 아막산성을 공격한 달솔 관등의 백기(苩奇)라는 사람이 등장하고 백씨가 대성팔족으로 거론된 걸 보면 이후에도 어떻게든 중앙에서 세력을 유지하기는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본거지였던 웅진성은 중국에서 건너온 예씨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이며,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에 화난 예식진이 사고를 치고 만다.
거점은 현 충청남도 공주시에 해당하는 웅진성(熊津城) 일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가가 웅진성에서 떨어리자는 명에 반발한 게 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충남 공주의 지역 수촌리 고분군이 백씨라는 추측이 있는데, 수촌리 고분군에서는 금동관과 장식이 달린 대도를 비롯한 각종 위세품이 발굴된 바 있다. 이게 백씨가 맞다면 백씨는 이미 한성백제 시절부터 토후로서 권세를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동성왕 대에 사택씨, 연비씨와 함께 등용되었다. 그 중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인물은 백가(苩加)였는데, 백가는 동성왕 8년(486) 위사좌평이 되었는데, 위사좌평은 곧 국왕의 경호를 담당하는 직위로 내신좌평과 더불어 왕의 친위세력이나 측근이 차지하였던 요직이다. 하지만 동성왕은 23년(501) 백가를 가림성을 진수(鎭守)하라는 명목으로 그를 파견했고 이로 인해 백가가 불만을 품게 되었다. 결국 502년 10월에 동성왕이 사냥을 하러 나왔다가 큰 눈을 만나 마포촌에 유숙하게 되자 백가가 그 틈을 노려 동성왕을 시해하고 만다. 동성왕이 11월에 승하하고 무령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자 백가는 이듬해(503) 1월에 가림성에 웅거하여 난을 일으켰다가 토벌군이 성 앞에 나타나자 성 밖으로 나와 항복했지만 곧장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일본서기에는 '말다왕(末多王)'[19]이 포악하여 국인(國人)이 함께 제거하였다'고 하는데, 말다왕은 바로 동성왕을 가리키며 그 때문에 원래는 귀족들이 다 같이 손잡고 동성왕을 죽였으면서 무령왕이 즉위하자 모두 백씨에게 뒤집어씌웠고 이에 빡쳐서 반란을 저질렀다는 추측이 있다. 이외에도 무령왕과 동성왕을 제외한 부여곤지의 세 아들들 중 하나와 혼인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무왕 대 신라의 아막산성을 공격한 달솔 관등의 백기(苩奇)라는 사람이 등장하고 백씨가 대성팔족으로 거론된 걸 보면 이후에도 어떻게든 중앙에서 세력을 유지하기는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본거지였던 웅진성은 중국에서 건너온 예씨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이며,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에 화난 예식진이 사고를 치고 만다.
거점은 현 충청남도 공주시에 해당하는 웅진성(熊津城) 일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가가 웅진성에서 떨어리자는 명에 반발한 게 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충남 공주의 지역 수촌리 고분군이 백씨라는 추측이 있는데, 수촌리 고분군에서는 금동관과 장식이 달린 대도를 비롯한 각종 위세품이 발굴된 바 있다. 이게 백씨가 맞다면 백씨는 이미 한성백제 시절부터 토후로서 권세를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2.6. 연씨(燕氏)/연비씨(燕比氏)
연비씨(燕比氏)의 경우는 일본서기 흠명기 543년에 백제 성왕이 임나의 재건을 위해 신하들을 모아 회의할 때 내솔 관등의 연비선나(燕比善那)가 등장한다. 연비선나만 나와서 성이 연비(燕比)이고 이름이 선나(善那)인지 성이 연(燕)이고 이름이 비선나(比善那)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다른 인명들과 비교해볼 때 성이 연비(燕比)이고 이름이 선나(善那)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연(燕)이 제비를 뜻하고 뒷 글자가 비(比)이기 때문에 사실은 훈독으로 '[ruby(燕, ruby=제)]비'라고 읽었던 게 아닌가 하는 추정이 있다.
연비씨 중 가장 먼저 등장한 건 연신(燕信)으로 478년 병관좌평 해구가 대두성에서 난을 일으킬 때 이를 지지했으나 좌평 진남과 덕솔 진로에 의해 실패하자 고구려로 도망갔다. 연비씨는 동서왕 대에 사씨, 백씨와 함께 등용되었는데 연돌(燕突)은 이 정세의 흐름을 타고 490년 제2관등인 달솔이 되었으며 497년 진씨의 대표인 병관좌평 진로가 죽자 연돌을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이는 백제 병권이 동성왕에게 돌아왔다는 뜻이었다.
세력 거점은 현 충청남도 아산시에 해당하는 대두성(大豆城) 혹은 탕정성(湯井城) 일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비씨 중 가장 먼저 등장한 건 연신(燕信)으로 478년 병관좌평 해구가 대두성에서 난을 일으킬 때 이를 지지했으나 좌평 진남과 덕솔 진로에 의해 실패하자 고구려로 도망갔다. 연비씨는 동서왕 대에 사씨, 백씨와 함께 등용되었는데 연돌(燕突)은 이 정세의 흐름을 타고 490년 제2관등인 달솔이 되었으며 497년 진씨의 대표인 병관좌평 진로가 죽자 연돌을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이는 백제 병권이 동성왕에게 돌아왔다는 뜻이었다.
세력 거점은 현 충청남도 아산시에 해당하는 대두성(大豆城) 혹은 탕정성(湯井城) 일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2.7. 국씨(國氏)
일본서기 흠명기에 나오는 덕솔 국수다, 삼국사기와 수서에서 무왕 대 수나라에 파견된 사신 국지모(國知(智)牟), 일본서기와 대당평백제국비명에 등장하는 좌평 국변성이 전부다. 사비백제 시절이기에 그 시절에 두각을 드러낸 것 이외에는 알 수 없다. 등장시기가 늦은 걸 보면 대성팔족 중 가장 신진세력이었던 모양.
고이씨(古爾氏)가 국씨(國氏)와 관련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근거가 빈약해 거의 폐기되었다.
고이씨(古爾氏)가 국씨(國氏)와 관련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근거가 빈약해 거의 폐기되었다.
3. 기타 - 예씨(禰氏)?
대성팔족 말고도 백제 후기의 유력 귀족으로는 의자왕 대의 반란자인 예식진(禰寔進)으로 유명한 예씨(禰氏)가 있다. 예씨는 반란으로 크게 몰락하게 된 백씨(苩氏)를 대체해 요충지인 웅진성을 거점으로 차지하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백제의 지방 구분인 5방 중 하나인 북방을 관할하는 북방령을 역임하기도 했던 걸로 볼 때 대성이라 불리기엔 손색이 없다. 다만 타 성씨와 달리 예씨에게는 반란으로 나라를 아예 망하게 했다는 큰 오점이 있다. 여담으로 예식진의 손자인 예인수(禰仁秀)의 묘지명에 의하면 예씨의 선조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유명한 독설가 예형(禰衡)이라고 한다. 다만 예씨의 묘지명들끼리 서로 안 맞는 부분도 있어서[20] 확실한 건 아니다. 다만 유물을 통해 볼 때 예씨가 중국계이거나 적어도 중국계와 깊은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4. 백제 멸망 이후
백제가 멸망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일단 현대 대한민국을 비롯한 한민족들 중에는 족보에서 대성팔족 직계 후손이라 주장하는 집안은 없다. 백제와 사이가 매우 나빴던 신라 정권에게는 완전히 눈엣가시였을 테니 새로운 통일신라 사회에서 옛날 백제 중앙 귀족층이었다고 자칭해봤자 좋을 것도 없었을 테고 분란의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신라에 의한 조직적인 제거(사성, 멸성 등)도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같은 시기의 예시로 고구려의 왕족인 안승은 실제로 김씨를 하사받아 진골에 편입되었다. 물론 대성팔족은 왕족조차 아니었으니 신라식 성씨를 사성받았어도 5~6두품이 되었을 것이다.[21]
백제 멸망 직후인 673년 백제의 유민들에 의해 제작된 국보 제108호 '계유명삼존천불비상'에는 백제 진모씨(眞牟氏)[22]가 계유년에 국왕과 7세 부모(七世父母)를 위해 만들었다고 적혀 있으므로 백제 멸망 이후에도 한반도에 대성팔족이 적어도 일부가 여전히 존재했음이 입증된다. 같은 해에 만들어진 또 다른 불상인 국보 제106호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에도 비슷한 내용의 글귀가 적혀 있는데 여기에는 전씨(全氏)가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확히 같은 해에 비슷한 글귀가 적힌 불상들이 제작된 것으로 보아 이 불상들이 함께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진모씨(眞牟氏)는 현재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지만 전씨(全氏)는 수십만 명의 후손들이 백제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남아 있다. 두 집안의 운명이 갈린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23] 전씨 외에 현재까지 전해지는 백제계 성씨는 마씨(馬氏) 정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4]
대성팔족을 그대로 이은 걸로 추정되는 성씨들이 몇몇 있긴 한데 안타깝게도 정황만 있을 뿐 물적 증거는 없다.[25] 백제에 관한 기록들이 늘 그렇듯이 국내에선 소실된 게 많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같은 한자를 쓰는 해당 성씨들은 후대에 사성된 성씨거나, 집계 때 한자를 잘못 표기하여서 그냥 그 이후로도 해당 성씨로 살았다던가,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라던가 하는 경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한국의 성씨 자체가 김, 박, 최 같은 일부 신라계 중앙귀족 유래 성씨를 제외하면[26] 대부분은 고려시대에 가서야 제대로 정착하게 되었고, 조선시대에는 모화사상에 근거한 조상에 대한 윤색과 미화가 유행하여 족보 기록 상의 출자는 확실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다 또 조상의 내력과 성씨의 한자를 몰라서 그냥 발음만 알고 내려오다가 나중에 메이저한 성씨를 그냥 따라적은 등의 케이스도 흔하기 때문에 오리지날 대성팔족의 성씨에서 중국식 성씨로 형태가 변형되어 지금까지도 쭉 내려왔을 수도 있다. 물론 타임머신이라도 써서 과거를 직접 조사하지 않는 한 알 수 없지만.
백제 멸망 직후인 673년 백제의 유민들에 의해 제작된 국보 제108호 '계유명삼존천불비상'에는 백제 진모씨(眞牟氏)[22]가 계유년에 국왕과 7세 부모(七世父母)를 위해 만들었다고 적혀 있으므로 백제 멸망 이후에도 한반도에 대성팔족이 적어도 일부가 여전히 존재했음이 입증된다. 같은 해에 만들어진 또 다른 불상인 국보 제106호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에도 비슷한 내용의 글귀가 적혀 있는데 여기에는 전씨(全氏)가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확히 같은 해에 비슷한 글귀가 적힌 불상들이 제작된 것으로 보아 이 불상들이 함께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진모씨(眞牟氏)는 현재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지만 전씨(全氏)는 수십만 명의 후손들이 백제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남아 있다. 두 집안의 운명이 갈린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23] 전씨 외에 현재까지 전해지는 백제계 성씨는 마씨(馬氏) 정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4]
대성팔족을 그대로 이은 걸로 추정되는 성씨들이 몇몇 있긴 한데 안타깝게도 정황만 있을 뿐 물적 증거는 없다.[25] 백제에 관한 기록들이 늘 그렇듯이 국내에선 소실된 게 많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같은 한자를 쓰는 해당 성씨들은 후대에 사성된 성씨거나, 집계 때 한자를 잘못 표기하여서 그냥 그 이후로도 해당 성씨로 살았다던가,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라던가 하는 경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한국의 성씨 자체가 김, 박, 최 같은 일부 신라계 중앙귀족 유래 성씨를 제외하면[26] 대부분은 고려시대에 가서야 제대로 정착하게 되었고, 조선시대에는 모화사상에 근거한 조상에 대한 윤색과 미화가 유행하여 족보 기록 상의 출자는 확실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다 또 조상의 내력과 성씨의 한자를 몰라서 그냥 발음만 알고 내려오다가 나중에 메이저한 성씨를 그냥 따라적은 등의 케이스도 흔하기 때문에 오리지날 대성팔족의 성씨에서 중국식 성씨로 형태가 변형되어 지금까지도 쭉 내려왔을 수도 있다. 물론 타임머신이라도 써서 과거를 직접 조사하지 않는 한 알 수 없지만.
5. 관련 문서
[#] 1.1 1.2 1.3 1.4 백씨(苩氏)의 오기일 가능성이 높다.[5] 8개가 아닌 이유는, 하나의 가문인 목협씨를 중국 측에서 목씨와 협씨로 따로 집계했기 때문이다. 이후 서술된 한원에서는 목씨를 제외해 7개로 정정했다.[6] 정확히 말하자면 貞은 眞의 오기가 아니라 뜻과 발음이 비슷한 통자이다.[7] 오늘날 섬진강 유역의 지명이다.[8] 오늘날 섬진강 유역의 지명이다.[9] 삼국사기 백제본기 본문은 이 해를 문주왕 4년으로 기록하고 있어, 서기 478년에 대응한다. 그러나 연표에서 문주왕의 재위 기간은 3년까지라고 하고 있으므로, 본기에서 3년을 4년으로 잘못 적었다고 봄이 정설이다.[10] 삼국사기 백제본기 본문은 이 해를 문주왕 4년으로 기록하고 있어, 서기 478년에 대응한다. 그러나 연표에서 문주왕의 재위 기간은 3년까지라고 하고 있으므로, 본기에서 3년을 4년으로 잘못 적었다고 봄이 정설이다.[11] 사지비궤(沙至比跪)라고도 한다.[12] 6세기에 백제에서 나솔(奈率) 키노오미 미마사(紀臣 彌麻沙, 여기서 키(紀)가 우지(氏)이고 오미(臣)는 카바네(姓)이다.)를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모노노베(物部)씨의 경우처럼 키(紀)씨도 일부가 백제에 정착하긴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경우는 키씨가 그대로 키씨로써 정착한 경우이지 정착하며 목씨로 바꾼게 아니다.[13] 왕족인 부여씨가 아니라 귀족인 목리씨를 사신으로 파견한 데 대해 일본이 불만을 제기한 듯하다.[14] 일본서기에 적힌 훈을 그대로 한글로 전사하면 '젠호우 모쿠라후마 카후하이'가 된다.[15] 왕족인 부여씨가 아니라 귀족인 목리씨를 사신으로 파견한 데 대해 일본이 불만을 제기한 듯하다.[16] 일본서기에 적힌 훈을 그대로 한글로 전사하면 '젠호우 모쿠라후마 카후하이'가 된다.[17] 일본식 독음으로는 사사누코(sasanuko)에 가깝게 읽었다. 백제 사람이라고 명시된 목라근자와 다르게 출신국에 대한 설명이 없어 그가 정말 백제인인지는 다소 불명확하다.[18] 반대로 사택씨가 두 부류로 갈라져 은고부인을 위시로 한 친위 쿠데타를 사택천복을 비롯한 사택씨 일부가 도왔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집안싸움에서 패배한 게 사택지적이고 승리한 게 사택천복이 된다.[19] 훈은 '마타'.[20] 즉 선조를 윤색한 것일 수도 있어서.[21] 비슷한 경우로 후대의 조선 왕조 초기에 이루어진 조직적인 개성 왕씨 멸족이라는 사례가 있다. 고려의 왕가였던 데다 사성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던 왕씨가 아무리 왕조가 멸망해 왕족의 지위에서 내려왔다고 해도 외국에 의해 집단적으로 끌려갔거나 외국으로 집단 이주를 했던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는 이렇게까지 줄어들 수가 없는데 즉 인위적인 멸성이 가해졌던 정황이 가득하다. 게다가 이 경우엔 무엇보다도 직접 멸성이 진행됐던 기록이 가득 남아 있다.[22] 대성팔족이다[23] 신라의 개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 천안 전씨와 함께 전씨의 양대 분파인 정선 전씨의 족보에 의하면 그 선조가 신라와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쩌면 그 덕분에 전씨 전체가 살아남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정선 전씨 족보는 7세기 이전의 기록이 소실되어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24] 전씨 족보에 의하면 전씨와 마씨 모두 백제를 개국할 때 공을 세운 10명의 십제공신(十濟功臣)에 속한다.[25] 예를 들자면 서산 진씨, 사씨, 전주 연씨의 경우 워낙 드문 성씨인데다 본관이 구 백제 지역과 관련이 있기에 연관이 있을 정황은 크다. 보통의 경우 나라가 멸망한 판에 이들이 토벌 대상이 되지 않았을 이유가 없었으니 가문의 생존을 위해 변성이 이루어지는데, 기존의 한자에 부수를 더해서 발음을 바꾸거나, 발음만 같은 전혀 다른 한자로 변성하곤 철저히 다른 가문 행세를 하는 것이다. 그 시대의 문맹률을 생각해보면 이는 꽤 유효한 수단이였다. 아니면 아예 한반도를 떠나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하여만 했다. 이에 백제의 후예를 자처 하는 가문은 오히려 일본에 많다. 그리고 그 쪽은 진짜로 백제의 후예일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고대와 중세 역사에서 도래계 성씨의 지위(가문의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참칭을 할거면 후지와라씨 계통의 공경(귀족) 가문(가문의 격에 따라 승진 제한이 있었다.)의 방계 후손을 칭하든지 무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세이와 겐지(미나모토씨)의 방계를 칭한다든지 미나모토에 의해 몰락한 마찬가지로 무가의 대성인 헤이케(타이라씨)의 후손을 칭한다든지 그쪽이 더 그럴듯하지 백제의 후손을 참칭한다고 해서 굳이 일본의 고대와 중세 사회에서 이득 볼 것은 없었다.[26] 당장 후삼국시대에도 신라 중앙귀족 계통 이외엔 전국 대부분 호족은 성씨 사용이 불확실하다. 훗날 고려의 왕가가 되는 왕건 가문조차도 왕건의 아버지인 왕륭 시절에 왕씨 성을 과연 사용했는지 불확실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