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의 상위 문서: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
- 순위표에서 이름이 굵은 글씨로 적힌 팀은 본선에 진출한 팀을 의미한다.
1. 출전권 배당[편집]
14개 팀을 뽑는 지역 예선에서 출전권 배당은 아래와 같다.
지역예선에는 총 32개 팀이 참가하였고, 이 중 14개 팀이 진출하였다.
2. 예선[편집]
2.1. 1조(유럽)[2][편집]
경기장 | ||
경기일 | 1949년 10월 1일 | |
국 가 | ||
득 점 | 2 | 8 |
득점자 | 사뮤엘 스미스 (50') 사뮤엘 스미스 (59') | 헨리 모리스 (5') 윌리엄 워델 (5') 빌리 스틸 (23') 로렌스 레일리 (24') 윌리엄 워델 (31')(PK) 헨리 모리스 (70') 지미 메이슨 (80') 헨리 모리스 (88') |
경기장 | ||
경기일 | 1949년 10월 15일 | |
국 가 | ||
득 점 | 1 | 4 |
득점자 | 말 그리피스 (80') | |
경기장 | ||
경기일 | 1949년 11월 16일 | |
국 가 | ||
득 점 | 9 | 2 |
득점자 | 사뮤엘 스미스 (55') 보비 브렌난 (75') | |
2.2. 2조(유럽)[편집]
2.2.1. 1라운드[편집]
경기장 | ||
경기일 | 1949년 11월 20일 | |
국 가 | ||
득 점 | 7 | 0 |
득점자 | 파흐레딘 잔세베르 (12') 파흐레딘 잔세베르 (16') 뷜렌트 에켄 (44') 레프터 큐츄칸도니아디스 (66') 에롤 케스킨 (67') 귄뒤즈 클리치 (72') 파흐레딘 잔세베르 (87') | |
2.2.2. 최종 라운드[편집]
2.3. 3조(유럽)[편집]
2.3.1. 1라운드[편집]
경기장 | ||
경기일 | 1949년 8월 21일 | |
국 가 | ||
득 점 | 6 | 0 |
득점자 | ||
2.3.2. 최종 라운드[편집]
홈 앤 어웨이로 치렀던 두 경기에서 양 팀이 모두 1대 1로 비기는 바람에 중립 지역에서 최종전을 치러야 했다.
경기장 | ||
경기일 | 1949년 12월 11일 | |
국 가 | ||
득 점 | 3 | 2 |
득점자 | 프르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12') 프르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84') 제이코 차이코프스키 (114') | 마리위 월터 (13') 장 루시아노 (83') |
2.4. 4조(유럽)[편집]
2.4.1. 1라운드[편집]
경기장 | ||
경기일 | 1949년 6월 26일 | |
국 가 | ||
득 점 | 5 | 2 |
득점자 | 르네 마이아르 (20') 자크 파통 (30') 자크 파통 (41') 로베르 발라망 (48') 키키 앙투넨 (59') | 카밀 바그너 (3') 미헬 로이터 (88') |
경기장 | ||
경기일 | 1949년 9월 18일 | |
국 가 | ||
득 점 | 2 | 3 |
득점자 | 아르만드 뮐러 (3') 짐 크레머 (38') | 르네 마이아르 (1') 한스-페터 프리트렌더 (59') 자크 파통 (75') |
2.4.2. 최종 라운드[편집]
2.5. 5조(유럽)[편집]
경기장 | ||
경기일 | 1949년 6월 2일 | |
국 가 | ||
득 점 | 3 | 1 |
득점자 | 데이비 월시 (9') | |
경기장 | ||
경기일 | 1949년 11월 13일 | |
국 가 | ||
득 점 | 1 | 3 |
득점자 | 콘 마틴 (61')(PK) | 칼-예리크 팔미에르 (4') 칼-예리크 팔미에르 (40') 칼-예리크 팔미에르 (68') |
2.6. 6조(유럽)[편집]
경기장 | ||
경기일 | 1950년 4월 2일 | |
국 가 | ||
득 점 | 5 | 1 |
득점자 | 페르난두 카브리타 (36') | |
경기장 | ||
경기일 | 1950년 4월 9일 | |
국 가 | ||
득 점 | 2 | 2 |
득점자 | 조제 트라바소스 (51') 제주스 코헤이아 (53') | 사라 (24') 아구스틴 가인사 (82') |
2.7. 7조(남아메리카)[편집]
2.8. 8조(남아메리카)[편집]
2.9. 9조(북아메리카[16])[편집]
경기장 | ||
경기일 | 1949년 9월 4일 | |
국 가 | ||
득 점 | 0 | 6 |
득점자 | 안토니오 플로레스 (20') 루이스 루나 (30') 루이스 데 라 푸엔테 (37') 루이스 데 라 푸엔테 (55') 루이스 데 라 푸엔테 (58') 카를로스 세프티엔 (85') | |
경기장 | ||
경기일 | 1949년 9월 18일 | |
국 가 | ||
득 점 | 6 | 2 |
득점자 | 엑토르 오티스 (14') 오라시오 카사린 (23') 오라시오 카사린 (41') 루이스 데 라 푸엔테 (47') 오라시오 카사린 (76') 마리오 오초아 (89') | 존 소우자 (52') 벤 와트맨 (90') |
경기장 | ||
경기일 | 1949년 9월 21일 | |
국 가 | ||
득 점 | 5 | 2 |
득점자 | 월터 바르 (16') 존 소우자 (23') 피트 매터빅 (30') 피트 매터빅 (35') 프랭크 월러스 (48') | 하신토 바르킨 (42') 산티아고 베이가 (50') |
경기장 | ||
경기일 | 1949년 9월 25일 | |
국 가 | ||
득 점 | 3 | 0 |
득점자 | 호세 나랑호 (44') 안토니오 플로레스 (58') 호세 나랑호 (88') | |
2.10. 10조(아시아)[편집]
원래 버마와 인도가 한 조, 필리핀과 인도네시아가 한 조를 이루어 승자가 최종 라운드에 진출하여 최종 라운드의 승자가 브라질에 가는 구조였지만 버마, 필리핀, 인도네시아가 모두 기권하여 인도가 무혈입성하였다. 하지만 인도는 FIFA에 월드컵에서 맨발로 축구를 하고 싶다고 졸랐고 FIFA는 선수 보호를 이유로 당연히 거부하였다. 맨발로 축구화 스터드에 밟혀봐야 정신 차릴건가? 이에 삐진 인도는 FIFA에 배째라모드로 나왔고 FIFA는 진짜로 인도의 배를 쨌다. 역시 배째라는 식으로 나오려면 상대가 굴복할만한 조건이 최소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 째이고 등 따이는건 시간문제 하지만 다른 팀의 물색도 여의치 않았던 관계로 FIFA는 아쉬운대로 대회를 진행하였다. 또 다른 이유로는 나라 형편 상 브라질까지 갈 돈이 없어서 출전을 고사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도 있다.[18]
[1] 터키와 이스라엘, 시리아는 지리적으로는 아시아지만 거리상으로는 유럽과 더 가깝기 때문에 유럽 지역 예선에 집어넣었다. 당시 시리아를 제외한 중동 국가들이 월드컵 예선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구분이 더 현실적이었다. 그리고 터키와 이스라엘은 현재에도 유럽 지역 예선을 통해 월드컵에 참가하고 있다[2] 브리티쉬 홈 챔피언쉽이 통째로 예선의 한 조가 되었다. 브리티쉬 홈 챔피언쉽은 1884년부터 1984년까지 무려 100년간 열렸던 영국 홈네이션 4개국 간의 축구 대회로 원래는 순수한 자기네들끼리의 대회였지만 FIFA의 편애 배려로 인해 여기에서 1,2위 팀이 1950년 월드컵 본선권을 갖게 되었다.[3] 1949년에 800년만에 영국의 손에서 독립한 아일랜드 대표팀 중 지금의 북아일랜드 지방은 북아일랜드라는 이름으로 따로 출전하였고 브리티시 홈 챔피언쉽에 참가하였다. 아일랜드지만 영국과 친했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월드컵 예선에서는 아일랜드 자유국이라는 이름으로 출전했었다[4] 카디프 시티의 전 홈구장. 현재 카디프 시티는 2009년에 건축된 카디프 시티 스타디움을 사용하고 있다[5] 스코틀랜드의 프로축구팀 퀸스 파크의 홈구장. 2012-13시즌에 국내 축구팬들의 혈압을 올리고 속을 박박 긁던 QPR과는 다르다. QPR과는!!![6] 맨체스터 시티의 옛날 홈구장. 1949년까지 올드 트래포드가 전쟁에 휘말려서 꽤 부서져버렸기 때문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이 구장에서 잠시 더부살이를 했었다. 맨체스터 시티는 2003년 이후로 시티 오브 맨체스터 스타디움-현재의 이름은 스폰서 계약으로 에티하드 스타디움을 사용하고 있다[7] 터키의 국부 아타튀르크의 지도 아래 터키 독립전쟁이 시작된 1919년 5월 19일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8] 세르비아의 대표적인 축구팀인 파르티잔 베오그라드의 홈구장. 1959년부터 1963년까지는 지역 라이벌 레드스타 베오그라드도 같이 사용했었다. 1951년부터 1989년까지는 JNA 스타디온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었고 현재의 이름은 스타디온 파르티자나. 영어로는 파르티잔 스타디움이 된다[9] 1938년 월드컵에서 결승전을 치렀던 당시 프랑스의 메인 스타디움이었다[10]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준우승했던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의 핵심 멤버였다[11] 스위스의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축구팀의 홈구장[12] 1949년에 800년만에 영국의 손에서 독립한 아일랜드 대표팀으로 북아일랜드와는 완전히 결별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상태라 영국의 홈네이션들처럼 한 나라에 두 팀이 따로 출전하였다. 하지만 영국에 대한 뿌리깊은 증오로 1조의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다른 조들과 예선을 치렀다. 그 이전의 월드컵 예선에는 아일랜드 자유 주라는 이름으로 참가했었다[13] 1958년 월드컵의 결승전을 치르기도 했던 스웨덴 축구 대표팀의 메인 스타디움이었다. 2012년 10월 27일부로 프렌즈 스타디움이 로순다 스타디온에서 1Km 떨어진 곳에 새로 개장하였다[14] 누에보-nuevo는 스페인어로 '새로운'이라는 뜻이다. 옛날에 쓰던 차마르틴 경기장을 대체하기 위해 새로 지은 경기장으로, 1955년에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그 이름은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이다[15] 특정 프로팀이 소유하고 있지 않고 포르투갈 대표팀의 A매치가 치러지는 경기장이다. 포르투갈 대표팀이 A매치를 가장 많이 치른 경기장이며 2014년부터 대대적인 보수에 들어갈 계획이다[16] 1949년에 멕시코에서 열린 북아메리카 챔피언십으로 대체되었다[17] 멕시코의 프로 축구팀 크루스 아술의 홈구장이다[18] 6.25 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아예 작살나다시피했던 한국의 형편이 1950년대에 매우 안 좋았던 것은, 한국인이라면 다 알 만한 이야기. 하지만 당시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더 떨어지는 나라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인도였다. 참고로 그 정도 거리까지의 비행기값이 2019년 현재 1인당 편도 기준 150~200만원이라는 무시무시한 가격을 자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