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양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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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이름
3. 역사
1484년(성종 15년) 창경궁 창건 때 처음 지었다. 1565년(명종 20년) 때는 명종이 양화당 뒷뜰로 유생들을 불러 시와 글을 짓는 일종의 논술 시험인 제술(製述)을 보게 하고, 현장에 있던 신하들에게 술을 내렸다.당연히(?) 만취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다른 건물들이 전부 불탔으나 양화당만은 무사했다.##
1609년(광해군 1년)에는 소성대비(인목왕후)가 세자궁인 저승전에 머무는 것이 죄스러워 양화당의 사정합(思政閤)[1] 으로 대비를 옮겨 모시려다가 무산되었다.#그런데 나중에 서궁에 유폐했냐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온 인조는 주로 이 곳에서 머물렀고#, 신하들과 사신들을 접견했다.##
1672년(현종 13년)에는 건물이 기울어지고 무너진 곳이 있어 보수했다.# 1730년(영조 6년)에는 창경궁의 경극당과 집복헌 온돌 밑에서 뼛가루와 해골 등 흉물이 나오자 창경궁 내전 일곽을 전부 수리했는데# 이 때 양화당도 철거하고 고쳐 지었다.##
1830년(순조 30년) 3월 창경궁 내전 주요부에 발생한 화재로 불탔다. 그동안 창경궁의 여러 화재를 전부 비껴갔으나 이번엔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한 것. 3년 뒤인 1833년(순조 33년)에 복구했다. 1878년(고종 15년)에는 철종의 왕비 명순대비(철인왕후)가 여기서 승하했다.#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창경원이 되면서 많은 창경궁의 전각들이 사라졌지만 양화당은 살아남았다. 다만, 이왕직박물관 전시실로 바뀌어 내부가 많이 훼손당했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내부를 복원했고 이후 오늘에 이른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다른 건물들이 전부 불탔으나 양화당만은 무사했다.##
1609년(광해군 1년)에는 소성대비(인목왕후)가 세자궁인 저승전에 머무는 것이 죄스러워 양화당의 사정합(思政閤)[1] 으로 대비를 옮겨 모시려다가 무산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온 인조는 주로 이 곳에서 머물렀고#, 신하들과 사신들을 접견했다.##
1672년(현종 13년)에는 건물이 기울어지고 무너진 곳이 있어 보수했다.# 1730년(영조 6년)에는 창경궁의 경극당과 집복헌 온돌 밑에서 뼛가루와 해골 등 흉물이 나오자 창경궁 내전 일곽을 전부 수리했는데# 이 때 양화당도 철거하고 고쳐 지었다.##
1830년(순조 30년) 3월 창경궁 내전 주요부에 발생한 화재로 불탔다. 그동안 창경궁의 여러 화재를 전부 비껴갔으나 이번엔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한 것. 3년 뒤인 1833년(순조 33년)에 복구했다. 1878년(고종 15년)에는 철종의 왕비 명순대비(철인왕후)가 여기서 승하했다.#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창경원이 되면서 많은 창경궁의 전각들이 사라졌지만 양화당은 살아남았다. 다만, 이왕직박물관 전시실로 바뀌어 내부가 많이 훼손당했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내부를 복원했고 이후 오늘에 이른다.
4. 구조
4.1. 《동궐도》의 모습(1730년 ~ 1830년)
4.2. 1833년 ~ 현재
《조선고적도보》 양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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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담
6. 대중 매체에서
[1] 조선 초엔 양화당의 서쪽 온돌방을 사정합이라 따로 이름지었다. 그러나 후기로 가면서 유명무실해졌다.#[2]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3]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4] 荷葉童子. 연꽃 잎 모양의 짧은 기둥.[5] 荷葉童子. 연꽃 잎 모양의 짧은 기둥.[6] 팔작지붕 측면에 삼각형 꼴로 되어있는 부분.[7] 팔작지붕 측면에 삼각형 꼴로 되어있는 부분.[8] 거기다 이미 그 전 날 들어와 하룻밤 자기까지 했다고. 간도 크시네[9] 이처럼 죄인을 입대시키는 것을 충군(充軍)이라 하는데 일반 군직보다는 수군이나 국경수비대 등 힘든 곳으로 보냈다.[10] 거기다 이미 그 전 날 들어와 하룻밤 자기까지 했다고. 간도 크시네[11] 이처럼 죄인을 입대시키는 것을 충군(充軍)이라 하는데 일반 군직보다는 수군이나 국경수비대 등 힘든 곳으로 보냈다.[12] 摹寫圖. 베껴 그린 그림.[13] 摹寫圖. 베껴 그린 그림.[14] 사실 저 사진들이 다 멜랑꼴리(...)한데, 왼쪽 사진은 인조가 병자호란 당시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고 숨어있었던 김자점이 나중에 변명을 늘어놓자 이에 딥빡분노하여 구타하는 장면이고, 오른쪽 사진 속 효종과 소용 조씨의 모습은 화기애애 해보이지만, 실제 역사와 극 중에서는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철천지 원수 사이다.(...)[15] 사실 저 사진들이 다 멜랑꼴리(...)한데, 왼쪽 사진은 인조가 병자호란 당시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고 숨어있었던 김자점이 나중에 변명을 늘어놓자 이에 딥빡분노하여 구타하는 장면이고, 오른쪽 사진 속 효종과 소용 조씨의 모습은 화기애애 해보이지만, 실제 역사와 극 중에서는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철천지 원수 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