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clude(틀:창경궁)] ---- ||<table width=800>[[파일:창경궁 양화당.png|width=100%]]|| || 양화당 || [목차] [clearfix] == 소개 == {{{+1 昌慶宮 養和堂}}} [[창경궁]]의 침소이다. [[창경궁 통명전|통명전]]의 동쪽에 있다. [[창경궁]]은 [[대비]]들과 왕실 가족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은 [[궁]]이다. 그래서 [[왕족|왕실 구성원]]들은 다른 [[궁궐]]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비교적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건물]]을 사용했다. 때문에 창경궁 내전 건물의 경우, 어느 [[전각]]을 어느 [[지위]] 사람이 썼는지를 뚜렷하게 구분하기 모호하며 양화당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반적으로는 [[왕실]] 내 최고위급 [[인물]]들이 많이 머문 곳인 듯 하다. == 이름 == [[이름]]은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던 [[서거정|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1502011_001|#]] '양화(養和)' 뜻은 '조화로움(和)을 기른다(養)'이다.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썼다. == 역사 == 1484년([[성종(조선)|성종]] 15년) [[창경궁]] 창건 때 처음 지었다. 1565년([[명종(조선)|명종]] 20년) 때는 명종이 양화당 뒷뜰로 유생들을 불러 [[시]]와 [[글]]을 짓는 일종의 [[논술]] [[시험]]인 제술(製述)을 보게 하고, 현장에 있던 [[신하]]들에게 [[술]]을 내렸다.--당연히(?) [[만취]]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2002020_002|#]] 1592년([[선조(조선)|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다른 [[건물]]들이 전부 불탔으나 '''양화당만은 무사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101017_003|#]][[http://sillok.history.go.kr/id/kva_11401002_001|#]] 1609년([[광해군]] 1년)에는 [[인목왕후|소성대비]](인목왕후)가 [[동궁|세자궁]]인 [[창경궁 저승전|저승전]]에 머무는 것이 죄스러워 양화당의 사정합(思政閤)[* [[조선]] 초엔 양화당의 서쪽 [[온돌|온돌방]]을 사정합이라 따로 이름지었다. 그러나 후기로 가면서 유명무실해졌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사정합(思政閤)|#]]] 으로 [[대비]]를 옮겨 모시려다가 무산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ob_10103019_002|#]] --그런데 나중에 [[덕수궁|서궁]]에 유폐했냐--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온 [[인조]]는 주로 이 곳에서 머물렀고[[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1030_002|#]], [[신하]]들과 [[사신]]들을 접견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2402021_003|#]][[http://sillok.history.go.kr/id/kpa_12306104_002|#]] 1672년([[현종(조선)|현종]] 13년)에는 [[건물]]이 기울어지고 무너진 곳이 있어 [[보수]]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rb_11309008_001|#]] 1730년([[영조]] 6년)에는 [[창경궁]]의 경극당과 [[창경궁 집복헌|집복헌]] [[온돌]] 밑에서 뼛가루와 [[해골]] 등 흉물이 나오자 창경궁 내전 일곽을 전부 수리했는데[[http://sillok.history.go.kr/id/kua_10604001_001|#]] 이 때 양화당도 철거하고 고쳐 지었다.[[http://sjw.history.go.kr/id/SJW-F06040010-03100|#]][[http://sjw.history.go.kr/id/SJW-F06050030-01000|#]] 1830년([[순조]] 30년) 3월 [[창경궁]] [[내전]] 주요부에 발생한 [[화재]]로 불탔다. 그동안 창경궁의 여러 화재를 전부 비껴갔으나 이번엔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한 것. 3년 뒤인 1833년(순조 33년)에 복구했다. 1878년([[고종(대한제국)|고종]] 15년)에는 [[철종(조선)|철종]]의 [[왕비]] [[철인왕후|명순대비]](철인왕후)가 여기서 [[죽음|승하]]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1509018_006|#]]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창경원]]이 되면서 많은 창경궁의 전각들이 사라졌지만 양화당은 살아남았다. 다만, [[이왕|이왕직]][[박물관]] 전시실로 바뀌어 내부가 많이 훼손당했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내부를 [[복원]]했고 이후 오늘에 이른다. == 구조 == 양화당의 모습은 크게 1484년에서 1730년, 1730년에서 1830년, 그리고 1833년부터 현재까지, 이렇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일 앞 시기(1484 ~ 1730)의 모습은 남아있는 [[자료]]가 별로 없어 자세하게는 확인이 불가능하나, 1730년([[영조]] 6년) 개수 당시의 《[[승정원일기]]》 [[기사]]를 보면, 몸체는 3칸이고 4면에 [[마루|툇마루]]를 두른 모습이었다 한다.[[http://sjw.history.go.kr/id/SJW-F06050030-01000|#]] 두 번째 시기(1730 ~ 1830)의 모습은 《[[동궐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동궐도]]》의 모습(1730년 ~ 1830년) === ||<table width=700>[[파일:동궐도 양화당.png|width=100%]]|| || 《[[동궐도]]》 양화당. 1830년 [[화재]] 이전의 모습이다. || * 《[[동궐도]]》를 보면, 1층[*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으로 평면은 ‘一’자 형태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 총 15칸 규모이며 제일 동쪽 칸은 [[누각|누]][[마루]]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에 [[용두]]와 취두를 올렸고, 남면과 동면의 가장자리엔 쪽마루를 덧대었으며 가장자리엔 [[난간]]을 설치했다. 그리고 동면의 가운데 칸엔 [[나무]] [[사다리]]를 설치하여 쪽마루로 오르내릴 수 있게 했다. 정면 왼쪽에서 3, 4칸은 [[대청]]으로 되어있고, 대청 칸 앞의 툇마루를 바깥으로 통하게 하여 [[현관]]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 [[기단]]은 장대석으로 쌓았고 [[계단]]은 정면에 하나 있다. 동측면의 기단은 계단처럼 쌓아 그 자체로 계단 역할을 하게 했으며 그 위에는 [[나무]][[판]] [[문]]을 달았다. 특이한 것은 정면 기단과 이어지게 [[담|담장]]을 쌓고 그 담장을 기단 측면의 나무판 문과 연결시켰다. === 1833년 ~ 현재 === * 현재의 양화당 모습은 《[[동궐도]]》에서 묘사한 것과는 꽤 다르다. [[기단]]은 장대석 3벌로 깔고 정면에는 4단의 [[계단]]을 2개 놓았으며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사각형의 [[기둥]]을 세워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예전과 같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공포와 기둥 사이에는 소로를 놓았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용두]]와 취두, [[잡상]]을 올렸다. * 정면 6칸, 측면 4칸의 총 24칸으로, 앞면과 뒷면의 [[대청]]과 이어지는 가장자리 칸은 [[마루|툇간]]으로 구성했다. 가운데 2칸은 대청이고, 툇간과 대청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온돌|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엔 분합문을 달았다. * [[대청]] 2칸의 정면과 뒷면은 [[마루|툇마루]]가 밖으로 드러나 있고 [[문]]을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했다. 대청을 제외한 앞면 칸 주위에는 쪽마루를 두고 가장자리엔 [[난간]]을 두었다. 이 난간은 중간 부분을 '아(亞)'자 형태로 장식하고 돌림띠대에 하엽동자[* 荷葉童子. [[연꽃]] [[잎]] 모양의 짧은 [[기둥]].]를 세워 돌난대를 받치는 모습이다. 서쪽에 정면 15개, 측면 3개, 동쪽에 정면 14개, 측면 3개가 설치되어 있다. * 건물 바깥 면의 창호는 [[창]]과 [[문]]을 포함하여 전부 띠살이다. 양 측면의 경우, [[온돌|온돌방]]이 있는 2칸은 문선을 두고 가운데에 창을 놓은 뒤 나머지는 [[벽]]으로 마감했으며 북쪽(건물 뒤쪽) 툇간의 외면은 전부 벽으로 두었다. 남쪽(건물 앞쪽) 툇간의 외면은 벽 없이 창만 달려있다. * [[아궁이]]가 [[건물]] 측면이 아닌 정면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table width=700>[[파일:조선고적도보 양화당.png|width=100%]]|| || 《조선고적도보》 양화당 || * [[근대]]에 들어서 꽤 변했다. 외부는 크게 바뀌지 않았으나 합각[* 팔작지붕 측면에 [[삼각형]] 꼴로 되어있는 부분.]에 [[양식|서양식]] [[창|창문]]이 생겼고, 측면의 바깥 면은 중방 위의 [[벽]] 빼고는 전부 [[창]]만 있는 모습으로 변했다. 전술했듯 [[일제강점기]]에 전시실로 쓰이면서 내부도 바뀌었는데, 전부 [[마루]]가 깔렸고 모든 칸이 한 [[공간]]으로 트였다. 현재는 [[복원]]했다. * 원래는 다른 [[궁궐]]의 [[전각]]처럼 행각, [[암석|돌]][[담]], [[문]] 등으로 독립된 영역을 구성했다. 이 역시 [[일제강점기]]에 모두 사라져 오늘에 이른다. == 여담 == * [[창경궁]]을 창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나가던]] [[스님]]이 [[궁]]에 몰래 들어왔다가 양화당 근처에서 잡혔다. 이유를 물으니 도첩, 즉 스님 전용 신분 증명서를 신청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거기다 이미 그 전 날 들어와 하룻밤 자기까지 했다고. --간도 크시네--] [[성종(조선)|성종]]은 벌로 이 중을 [[입대]]시켰다.(...)[* 이처럼 [[죄인]]을 [[입대]]시키는 것을 충군(充軍)이라 하는데 일반 군직보다는 [[수군]]이나 국경수비대 등 힘든 곳으로 보냈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1506028_003|#]] * [[선조(조선)|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의 [[당호|당호(堂號)]]도 양화당이었다. 그러나 이 양화당과는 다르다. 이름만 같을 뿐. * 앞서 여러 번 서술했듯, 창건 이후 1830년([[순조]] 30년) 전까지 한 번도 불에 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1790년([[정조(조선)|정조]] 14년) [[창경궁 통명전|통명전]] [[화재]] 때 정조와 [[신하]]들이 양화당이 타지 않은 것을 신기해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401002_001|#]] --[[백담사]]의 [[대척점]]-- * 이왕직박물관 전시실일 때,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도[* 摹寫圖. 베껴 그린 [[그림]].]를 여기서 전시했다고 한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이왕직박물관(李王職博物館)|#]] == 대중 매체에서 == || [[파일:김자점을 때리는 인조.png|width=100%]] || [[파일:꽃전 양화당 세자 얌전.jpg|width=100%]] || || 양화당 뜰의 [[인조]]([[이덕화]] 분) || 양화당 앞에서 포즈를 취한 [[소용 조씨]]([[김현주]] 분)와 [[효종(조선)|효종]]([[김주영(1987)|김주영]] 분)[[http://tv.jtbc.joins.com/photo/pr10010190/pm10017626/detail/2579|#]] || * 2013년 방영한 [[JTBC]] [[드라마]]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서는 [[병자호란]] 이후 [[인조]]의 주 처소로 나온다. 실제 양화당에서 찍은 것은 아니고, [[경상북도]] [[문경시]]에 있는 [[경복궁]] 세트장의 [[경복궁 강녕전|강녕전]] [[건물]]에다 양화당 [[현판]]을 걸고 [[촬영]]했다.[* 사실 저 사진들이 다 [[멜랑꼴리]](...)한데, 왼쪽 사진은 [[인조]]가 [[병자호란]] 당시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고 숨어있었던 [[김자점]]이 나중에 [[변명]]을 늘어놓자 이에 --[[딥빡]]--분노하여 [[구타]]하는 장면이고, 오른쪽 사진 속 [[효종(조선)|효종]]과 [[소용 조씨]]의 모습은 화기애애 해보이지만, 실제 역사와 극 중에서는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철천지 [[원수]] 사이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창경궁 경춘전, version=16)] [[분류:창경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