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임 지위 및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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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7년 9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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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05년 3월 14일 (7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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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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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 제13대 공군참모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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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 1일 ~ 1979년 4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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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국방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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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14일 ~ 1982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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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대 내무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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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7월 6일 ~ 1985년 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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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927년 9월 30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무기리에서 태어났다. 1945년 일본 육군항공학교를 수료하고 1949년 공군사관후보생 소위 임관, 1950년에는 공군사관학교 소집 2기로 해 중위로 재임관했다. 1959년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뒤, 1963년 국방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50년 8월부터 1953년 7월 휴전 때까지 F-51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해, 총 77회의 출격 기록을 세웠다. 1960년대 한국 영화의 최고 히트작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 및 배경의 실존 인물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1974년에는 옥만호에 이어 공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어 1979년 4월까지 4년 7개월 동안 최장수 공군참모총장을 지냈다. 같은 해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후임자는 첫 공군사관학교 출신 공군참모총장인 윤자중이었다.[7]
12.12 군사반란 이후 노재현의 뒤를 이어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었다.[8]
하나회 반란군들이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으려는 해군과 공군의 불만을 수습하고, 대외적으로 비 하나회 출신 인사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민심을 가라앉히며, 또한 하나회 출신[9]에서 장관을 선임할 경우 이에 따라 발생할 내분을 막으려는 이유로 선택한 것이었다. 1980년 5.17 내란 때 중앙청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계엄령 확대를 주장하였다. 이후 1982년까지 국방장관을 지냈다. 그러다가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으로 인한 민심수습책으로 물러났다. 한국반공연맹(현 한국자유총연맹) 이사장(1983), 내무부(현 행정자치부)장관(1983~1985),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1985~1989) 등을 지냈다.
국방부 장관 시절 광주학살을 벌인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을 결정한 장본인으로서, 김영삼 정부 때 12.12 군사반란 및 5.18 민주화운동 관련 재판에서 내란-반란 중요임무 종사 등의 혐의로 7년형을 선고받았다.
2005년 3월 14일에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사망했으며 사망 후 유해는 서울 도봉구의 한 암자에 봉안되었다.
1950년 8월부터 1953년 7월 휴전 때까지 F-51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해, 총 77회의 출격 기록을 세웠다. 1960년대 한국 영화의 최고 히트작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 및 배경의 실존 인물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1974년에는 옥만호에 이어 공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어 1979년 4월까지 4년 7개월 동안 최장수 공군참모총장을 지냈다. 같은 해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후임자는 첫 공군사관학교 출신 공군참모총장인 윤자중이었다.[7]
12.12 군사반란 이후 노재현의 뒤를 이어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었다.[8]
하나회 반란군들이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으려는 해군과 공군의 불만을 수습하고, 대외적으로 비 하나회 출신 인사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민심을 가라앉히며, 또한 하나회 출신[9]에서 장관을 선임할 경우 이에 따라 발생할 내분을 막으려는 이유로 선택한 것이었다. 1980년 5.17 내란 때 중앙청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계엄령 확대를 주장하였다. 이후 1982년까지 국방장관을 지냈다. 그러다가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으로 인한 민심수습책으로 물러났다. 한국반공연맹(현 한국자유총연맹) 이사장(1983), 내무부(현 행정자치부)장관(1983~1985),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1985~1989) 등을 지냈다.
국방부 장관 시절 광주학살을 벌인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을 결정한 장본인으로서, 김영삼 정부 때 12.12 군사반란 및 5.18 민주화운동 관련 재판에서 내란-반란 중요임무 종사 등의 혐의로 7년형을 선고받았다.
2005년 3월 14일에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사망했으며 사망 후 유해는 서울 도봉구의 한 암자에 봉안되었다.
3. 관련 문서
[1] 상주 주씨 집성촌이다.[2] 상주 주씨 집성촌이다.[3] 주용식은 차남이며 장남의 이름은 불명이다.[4] 주용식은 차남이며 장남의 이름은 불명이다.[5] 주용식은 차남이며 장남의 이름은 불명이다.[6] 주용식은 차남이며 장남의 이름은 불명이다.[7] 아마 주영복 장관 시절에는 학사는 받지 않고 단기 교육만 받고 수료했을 가능성이 높다. 육사도 10기까지는 단기 교육만 받고 수료했으며 4년제가 된것은 11기부터이다.[8]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중에서 공군 출신으로는 두번째다.[9] 사실 하나회 출신을 앉히는 건 어려웠던 것이 하나회에서 가장 높은 11기 윗 기수 장성들이 군 내에 아직 여러명 남아 있기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