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2. 1차 유괴[편집]
1978년 9월 15일 낮 12시에 남성국민학교[1] 2학년이던 정효주는 귀가 도중 한 40대 남성을 만나게 된다. 이 남성은 정효주에게 "차안에서 트렁크 열쇠를 갖다주렴. 그럼 집까지 태워줄게"라고 꼬드겼고, 정효주가 차안에 올라타자 곧바로 차를 몰고 서울특별시로 올라갔다. 차안에서 낯선 아저씨가 자신을 데리고 모르는 곳으로 가는 것을 알아챈 정효주는 차안에서 울음을 터트렸고, 범인은 "나는 너 아버지 친구야. 너 아버지가 5,000만원 빚을 져 부산 세관에 잡혀갔고, 아버지가 잡혀가기 전에 너를 부탁하고 가셨어"라며 다독였다.
이후 범인은 효주를 데리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협박전화를 걸었고, 효주를 시켜 돈을 부치라는 편지를 썼다. 그러다 범인은 서울에 거주 중이었던 정효주의 이모와 협상을 하겠다며 가족들에게 통보했는데, 유괴 33일째 되던 날에 전화를 걸 공중전화를 물색하던 중 부산지방 경찰청 소속 공길용 경사에 의해 검거되며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범인은 매석환(梅錫煥)이라는 이름의 남성으로 유괴[2] 등 전과 9범을 기록했던 남자였다. 그는 서울에서 거주하며 자신의 자가용으로 불법 택시운전을 했는데, 부산에서 내렸던 한 승객이 "남성국민학교에는 부잣집 자식들이 많이 다닌다."라는 말을 했던 것을 듣고, 곧바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밝혔다. 특이한 성씨[3] 때문에 중국인으로 오해하거나 '배석환' 등으로 아는 사람들도 있는데, 해당 남성은 중국인이 아닌 토종 한국인이다.
그렇게 매석환은 10년형을 선고받고 1989년에 만기 출소했다.
이후 범인은 효주를 데리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협박전화를 걸었고, 효주를 시켜 돈을 부치라는 편지를 썼다. 그러다 범인은 서울에 거주 중이었던 정효주의 이모와 협상을 하겠다며 가족들에게 통보했는데, 유괴 33일째 되던 날에 전화를 걸 공중전화를 물색하던 중 부산지방 경찰청 소속 공길용 경사에 의해 검거되며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범인은 매석환(梅錫煥)이라는 이름의 남성으로 유괴[2] 등 전과 9범을 기록했던 남자였다. 그는 서울에서 거주하며 자신의 자가용으로 불법 택시운전을 했는데, 부산에서 내렸던 한 승객이 "남성국민학교에는 부잣집 자식들이 많이 다닌다."라는 말을 했던 것을 듣고, 곧바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밝혔다. 특이한 성씨[3] 때문에 중국인으로 오해하거나 '배석환' 등으로 아는 사람들도 있는데, 해당 남성은 중국인이 아닌 토종 한국인이다.
그렇게 매석환은 10년형을 선고받고 1989년에 만기 출소했다.
2.1. 후일담[편집]
- 범죄 수사기법이 부족하던 시절이었던데다 당시 사건을 비공개수사로 진행했기 때문에 수사에 꽤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정효주의 부모는 딸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전국의 용하다는 점쟁이들을 찾아 물어봤는데, 모두 정효주가 죽었다고 했고, 김중산 도사[4]라는 역술가만이 효주가 살아있다는 말을 했다. 후에 김중산 도사는 대한민국 10대 역술가에 선정되었다.
- 당시 차량번호를 파악하기 위해 국내 최초로 최면수사기법이 동원되었고, 차량 번호를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3. 2차 유괴[편집]
납치된지 7개월이 지난 1979년 4월에 정효주는 등교를 하던 도중 교문 앞에서 또다시 납치를 당했다. 정효주는 납치 이후 가족들과 매일 등교를 같이 했는데, 딱 하루 같이 등교하지 않은 날에 납치를 당한 것이다. 이후 범인은 효주의 목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보내며 1억 5,000만원을 요구했고 "신체를 절단해 보내겠다"라는 끔찍한 협박을 동반해 충격을 주었다. 정양의 아버지는 "딸만 살려주면 뭐든 들어주겠다."라고 했으며, 1차 유괴범이었던 매석환은 옥중에서 "불안감을 떨치려면 애를 풀어주고 자수해라"라는 편지를 썼다. 부산시에서는 전단 60만장을 배포했다.
그리고 사건 발생 5일째가 되자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유괴 사건 관련해 처음으로 특별 담화를 통해 "유괴범이 효주를 무사히 돌려주면 최대한 처벌을 피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라고 말했고, 범인은 그날 밤 경주IC 인근에 효주를 내려놓고 도주했다. 이후 범인은 사건 발생 1년 8개월이 지나 잡혔다. 그렇게 범인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끝나나 싶었는데, 여기서 일화가 하나 발생한다. 유괴 사건 당시 특별 담화를 발표한 대통령 박정희가 10.26 사건으로 그새 사망했다는 것. 때문에 딸 박근령이 '아버지의 약속(최대한 선처)을 지켜주길 바란다''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때문인지 어쨌는지 실제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렇게 이원석은 1999년에 출소했고, 이후 박근령의 은혜(?)를 기억하며무려 10여년이 지난 2008년 육영재단을 찾아가 150만원을 기부했다고 알려졌다. 피해자 고통은 어쩌고
참고로 범인은 정효주 아버지의 전 운전기사였던 이원석이라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이는 오보로 이원석은 탈영병이었고, 다른 곳에서 트럭운전 일을 했던 사람이었다고 정효주의 어머니가 진술했다.# 이 사건의 피해자였던 정효주는 이후 이름을 바꾸고 성장하여 결혼했으며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이라고 한다. 훗날 한 기자가 찾아오자 어린 시절의 일이라 기억이 안 나고, 그 일을 언급하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사건 당시의 나이를 생각했을 때 정말 기억 못할 리는 없어서, 기자는 안 좋은 일이라 의도적으로 생각 안 하고 산다고 추측했다.
1990년대 발생한 김해 아동 유괴 살인사건의 범인인 박진봉[5]이 다른 죄목으로 수감되어 있을 때 같은 방을 쓴 적이 있다고 한다. 이후 이원석을 찾아 유괴범의 목소리를 들려주자 박진봉이 맞다고 증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사건 발생 5일째가 되자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유괴 사건 관련해 처음으로 특별 담화를 통해 "유괴범이 효주를 무사히 돌려주면 최대한 처벌을 피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라고 말했고, 범인은 그날 밤 경주IC 인근에 효주를 내려놓고 도주했다. 이후 범인은 사건 발생 1년 8개월이 지나 잡혔다. 그렇게 범인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끝나나 싶었는데, 여기서 일화가 하나 발생한다. 유괴 사건 당시 특별 담화를 발표한 대통령 박정희가 10.26 사건으로 그새 사망했다는 것. 때문에 딸 박근령이 '아버지의 약속(최대한 선처)을 지켜주길 바란다''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때문인지 어쨌는지 실제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렇게 이원석은 1999년에 출소했고, 이후 박근령의 은혜(?)를 기억하며
참고로 범인은 정효주 아버지의 전 운전기사였던 이원석이라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이는 오보로 이원석은 탈영병이었고, 다른 곳에서 트럭운전 일을 했던 사람이었다고 정효주의 어머니가 진술했다.# 이 사건의 피해자였던 정효주는 이후 이름을 바꾸고 성장하여 결혼했으며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이라고 한다. 훗날 한 기자가 찾아오자 어린 시절의 일이라 기억이 안 나고, 그 일을 언급하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사건 당시의 나이를 생각했을 때 정말 기억 못할 리는 없어서, 기자는 안 좋은 일이라 의도적으로 생각 안 하고 산다고 추측했다.
1990년대 발생한 김해 아동 유괴 살인사건의 범인인 박진봉[5]이 다른 죄목으로 수감되어 있을 때 같은 방을 쓴 적이 있다고 한다. 이후 이원석을 찾아 유괴범의 목소리를 들려주자 박진봉이 맞다고 증언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