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즉위하기까지
2. 즉위 후
야즈데게르드의 치세는 특별한 일이 없이 평온했다. 사산 왕조는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동로마 제국과 불화없이 지냈다. 오히려 로마의 황제 아르카디우스가 408년에 죽자, 평소에 후원하기로 다짐했던 그의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를 제국의 황태자로서 충실히 지켜주었다.[1]
유대인 어머니를 두었기 때문에 종교에 관심이 많았는지 모르지만 치세 초기엔 기독교를 옹호하고 조로아스터교를 멀리했으며 오히려 기독교로 개종하길 원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그의 치세 초기엔 기독교가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널리 퍼질 수 있었다. 그리하여 410년에는 이들의 영향으로 인해 기독교의 자유가 선포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기독교도들은 그를 황제 가운데 거룩한 호의를 베푼 선하고 자비로운 황제라며 칭송했었다.
그러나 크테시폰에 있는 조로아스터교의 불의 신전이 기독교도들에 의해 전소되어 재건 불가능하게 된 적이 있었는데, 이 방화사건은 조로아스터교의 신관들에게 큰 반발을 일으켰다. 신관들은 야즈데게르드가 어떠한 조치를 취하기를 요구하였고. 결국 야즈데게르드는 신관들에게 제국 내의 기독교를 박해할 권한을 부여한다. 그 후 5년 동안 제국내의 기독교인들은 붙잡히거나 살해당했으며, 거리의 모든 교회가 파괴되었다.
이러한 살육과 배신적인 행위로 인해 기독교도들 사이에서는 악평이 자자했으나근데 위에서 보다시피 기독교도들이 먼저 잘못했다는게 함정 그러나 그는 여전히 페르시아인에겐 훌륭한 황제였다. 유대인 어머니를 기려 이스파한에 "예후디예"라는 유대인 거주지를 건설하는 등 유대인들을 적극 배려하였다.효자다
유대인 어머니를 두었기 때문에 종교에 관심이 많았는지 모르지만 치세 초기엔 기독교를 옹호하고 조로아스터교를 멀리했으며 오히려 기독교로 개종하길 원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그의 치세 초기엔 기독교가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널리 퍼질 수 있었다. 그리하여 410년에는 이들의 영향으로 인해 기독교의 자유가 선포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기독교도들은 그를 황제 가운데 거룩한 호의를 베푼 선하고 자비로운 황제라며 칭송했었다.
그러나 크테시폰에 있는 조로아스터교의 불의 신전이 기독교도들에 의해 전소되어 재건 불가능하게 된 적이 있었는데, 이 방화사건은 조로아스터교의 신관들에게 큰 반발을 일으켰다. 신관들은 야즈데게르드가 어떠한 조치를 취하기를 요구하였고. 결국 야즈데게르드는 신관들에게 제국 내의 기독교를 박해할 권한을 부여한다. 그 후 5년 동안 제국내의 기독교인들은 붙잡히거나 살해당했으며, 거리의 모든 교회가 파괴되었다.
이러한 살육과 배신적인 행위로 인해 기독교도들 사이에서는 악평이 자자했으나
3. 의문사
4. 평가
[1] 이로 인해서인지 로마의 역사학자 프로코피우스는 그를 선한기질의 소유자이며 자신이 말한 것을 반드시 지키는 자라고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