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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足利 義政, ruby=あしかが よしまさ)]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과 즉위
2.2. 정치적 무능과 사치
요시마사는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는 바람에 정치에 대해서 제대로 배울 시간이 없었으며, 결국 사치에 탐닉하게 되었다. 결국 이 시기 정치권력은 호소카와, 야마나, 하타케야마 같은 유력가문이 휘두르게 되었다. 막부의 재정상태 악화로 정실인 히노 도미코 같은 경우는 사채와 같은 재산축적에 열을 올리면서 악명을 높였다.
2.3. 오닌의 난과 히가시야마 문화
2.4. 죽음
오닌의 난으로 결국 친아들인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9대 쇼군이 되었으나, 젊은 나이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요절했다. 결국 요시마사는 이전에 후계자로 지명했던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미(足利義視)의 아들이자 본인의 조카인 요시키(=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양자로 지명하고 1490년에 죽었다.
3. 인물 평가
4. 조선과의 관계
◈세조 9년 계미(1463, 천순 7)
일본 국왕이 사인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며 올린 서계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사인(使人)을 보내 와서 토물(土物)을 바치니, 그 글[書]에 이르기를, “보린(寶隣)이 근년에 음모(音耗)6179) 가 소활(疏闊)하오며, 하늘은 멀고 바다는 막혔으니, 어찌 목마르게 바라는 것을 이기겠습니까? 이제 천룡(天龍)6180) 의 준초 서당(俊超西堂)과 범고 수좌(梵高首座) 등을 정사(正使)·부사(副使)로 삼아, 차견(差遣)하여 전과 같은 호의(好意)를 닦으옵니다. 이에 수년 전에 사선(使船)을 귀국(貴國)에 보냈더니, 이르시기를, ‘가까운 장래에 마땅히 포궤(包?)6181) 를 명(明)나라 조정에 바쳐서 전년[前歲]을 사례하라.’고 하시었는데, 행사(行使)가 불궤(不軌)의 죄(罪)를 범하였습니다. 비록 그러나 누방(陋邦)은 근년에 동벌 남정(東伐南征)하느라고 군사(軍事)에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능히 그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고, 인순(因循)하여 지금까지 이르렀으니, 자못 돈어(豚魚)6182) 의 신(信)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폐하(陛下)께서 일찍이 일서(一書)를 오는 편에 전(傳)하여,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송처검(宋處儉)·대호군(大護軍) 이종실(李宗實)을 보빙 사자(報聘使者)로 삼아 보내었는데, 해상(海上)에서 홀연히 태풍[?風]을 만나, 두 배가 표몰(漂沒)하여, 글 속[書中]에 기재한 건건(件件)의 방물(方物)은 비록 이 지방에 도달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미 예의(禮意)의 두터움을 받았으며, 인하여 바닷가 제국(諸國)에 나아가 그 일을 다 찾았으나, 모두 연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표류한 배를 돌려보낼 수 없었으며, 또 그 나머지 시체를 장사지냈습니다. 우리 천룡선사(天龍禪寺)에 명하여, 수륙 대재회(水陸大齋會)를 베풀어 두 사람[二子]을 위하여 명복(冥福)을 자천(資薦)하였을 뿐입니다. 천룡선사(天龍禪寺)는 곧 조종(祖宗)이 창업(創業)하여 누방(陋邦)에서 복(福)을 심는 신령한 도량[靈場]입니다. 근자에 회록(回祿)의 변(變)을 만나서 구관(舊觀)을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연곡(年穀)이 익지 않고 재앙(災殃)이 자주 이르러서 이제 장차 승당(僧堂)을 경영하려 하는데, 대방(大邦)의 도움을 빌지 않으면 즐겨 이루기가 어렵겠습니다. 그윽이 명하여 의염(義廉)·생관(生觀)·교직(敎直) 등에게 집사(執事)를 치의(致意)하게 하였습니다만, 무릇 우리 나라가 부처[佛]를 섬겨 착하게 된 것은 바로 귀국(貴國)의 비로 법보(毗盧法寶)를 얻은 소이(所以)이니, 대저 하나의 장서[一藏]를 얻은 것은 그 큰 것을 내려 줌입니다. 더구나 구(求)함을 따름으로써 상도[常]를 삼으시니, 누방(陋邦)이 엎드려 청(請)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인(仁)의 고찰(古刹)을 세우면서 1만 민(緡)을 주는 것을 얻어, 윤환(輪奐)을 아름답게 고치었으며, 이제 또 천룡 만당(天龍滿堂)의 해중(海衆)이 폐하의 비음(庇蔭)을 입으면 어찌 서북(西北)을 바라보며 만세(萬歲)의 축복이 이르지 않겠습니까? 토의(土宜)가 변변치 못하오나 별폭(別幅)과 같이 갖추었습니다. 봄추위가 아직 남았으니, 때를 따라 아끼어 보전하소서.” 하고, 별폭(別幅)은 채화선(綵?扇) 1백 파(把), 장도(長刀) 2자루[柄], 대도(大刀) 10파(把), 대홍칠 목거완(大紅漆木車椀) 대소 합하여 70사(事), 대홍칠 천방분(大紅漆淺方盆) 대소 합하여 20사(事), 홍칠 흑칠 잡색 목통(紅漆黑漆雜色木桶) 2개(箇)이었다. *상국(上國): 조선(朝鮮)을 말함 *폐하(陛下): 세조를 말함 *대방(大邦): 큰 나라를 의미함. 여기서는 조선을 가르킴 *누방(陋邦): 일본을 말함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조공물품과 함께 조선에 보낸 서한에 조선의 세조를 폐하라고 부르면서, 일본 자신은 '누방'으로 조선은 '대방(大邦)'으로 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록 |
◈성종 1년 경인(1470, 성화 6)
일본 국왕이 보낸 입도 등이 와서 서계와 토산물을 바치다 일본 국왕(日本國王) 회수납정소(懷守納政所) 이세수(伊勢守) 정친(政親)이 보낸 입도(入道)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정친은 삼가 글을 조선국 의정부(議政府) 합하(閤下)에게 바칩니다. 공손히 바라건대 나라가 크게 평안해서 금상 황제(今上皇帝)의 어위(御位)가 오래도록 가소서! 폐하(陛下)께서는 공손히 덕(德)이 건곤(乾坤)과 일치하여 당우(唐虞)의 어질고 장수하는 지역(地域)을 보전하고, 현성(賢聖)을 신하로 모아서 이주(伊周)의 순수하고 소박한 기풍을 회복하도록 원하며, 성의를 다하여 축복합니다. 그런데 부상(扶桑) 전하의 높은 명령에 응하여 같은 날에 서계를 봉하여 조선(朝鮮)과 유구(琉球)의 두 나라에 사선(使船)을 보냅니다. 이는 나의 개인적인 의사가 아니니, 이와 같은 간절한 뜻을 폐하에게 주달(奏達)하여서 허락하여 주시면 오직 다행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귀국의 남은 힘을 입고자 하는데, 바라는 물건은 면주(綿紬) 3천 필, 면포(綿布) 5천 필, 백저포(白苧布) 1천 필, 쌀 5천 석이니, 자비로 살피소서. 오직 우리 나라의 태평을 거두고 더 나아가 번신(藩臣)으로서의 충성된 공훈을 세우기를 빕니다. 보잘것 없는 토산물을 별폭(別幅)에 갖추었습니다. 바야흐로 새 눈이 온 산을 뒤덮었으니 풍년이 들 길조(吉兆)입니다. 이만 그칩니다. 별폭은, 금(金) 2원(員) 21냥쭝[兩], 주(朱) 4포(包) 40냥쭝, 대도(大刀) 15파(把), 단자(段子) 1필, 수자(?子) 1필, 부채[扇子] 50본(本)입니다. 받아주시면 다행하겠습니다.” *금상 황제(今上皇帝): 성종(成宗)을 말함 *폐하(陛下): 성종(成宗)을 말함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신하도 성종을 '황제 폐하'라 불러주었다.[3] 실록 |
5. 대중 문화
[1] 이 일본국왕(日本國王)의 호칭은 조카인 10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稙)까지 실록에서 기록되다가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끝나고, 한참 뒤에 조선에서 악명높은 원숭이가 임진왜란 전까지 일본국왕으로 기록된다.[2] 쇼군이 보낸 사절이 아니고 일본국왕(쇼군)의 회수납정소(관직이름) 이세(지명)의 태수 정친이 보낸 사절이다. 그러나 당시 이세수는 따로 있어 정친이 대체 누구를 말하는지 알수가 없다. 유력해보이는건 당시 무로마치막부의 정소집사이자 이세수였던 이세 사다치카가 아닌가 싶은데 사다치카(貞親)와 한자가 다르다.[3] 쇼군이 보낸 사절이 아니고 일본국왕(쇼군)의 회수납정소(관직이름) 이세(지명)의 태수 정친이 보낸 사절이다. 그러나 당시 이세수는 따로 있어 정친이 대체 누구를 말하는지 알수가 없다. 유력해보이는건 당시 무로마치막부의 정소집사이자 이세수였던 이세 사다치카가 아닌가 싶은데 사다치카(貞親)와 한자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