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세계질서 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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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예시
2.1. 현실의 세계질서 개편
2.1.1. ~~본의든 아니든~~ 성공 사례2.1.2. 삽질 사례
2.2. 픽션의 세계질서 개편


1. 개요

모종의 이유로 전세계의 정치, 외교적 서열과 질서가 재정립되는 사건을 의미한다. 게임, 영화, 애니메이션 등의 굵직한 줄거리에 항상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클리셰 이기도 하다. 창작물에서 이런 거대한 가상역사를 플롯에 삽입하는 것은 유사한 실제 역사 사건과의 비교를 통해 묘한 재미를 줄 수 있으며, 실제 역사가 일종의 사례 혹은 반면교사의 역할을 하여 화자가 전체적인 이야기 흐름을 짜는데 여러모로 유용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시도하는 특정 조직 혹은 개인의 의도에 따른 세계 질서 개편 행위는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거나, 성공하더라도 한 국가나 도시 등 매우 한정적인 지역에 국한되거나, 완전히 성공하더라도 인류 역사에서 손에 꼽을만한 극소수의 성공사례로 남게 되는, 매우 찾아보기 힘든 일에 해당된다. 또한 성공한 경우에도 거의 대부분은 그 과정에서 대규모 인적, 물적 피해를 동반하게 된다. 반면에 특정 개인 혹은 단체의 의도치 않은 행위 혹은 결정이 나비 효과가 되어 일파만파 영향을 미친 끝에 세계구급의 대변화를 초래한 사례는 의외로 드물지 않다. 아래의 여러 사례를 참조해보도록 하자.

관련 항목으로 신세계 질서(New World Order)가 있다.

2. 예시

2.1. 현실의 세계질서 개편

2.1.1. 본의든 아니든 성공 사례
  • 알렉산드로스 대왕그리스 세계의 질서개편을 시도했고,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마케도니아를 그리스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그 뒤 동진에 동진을 거듭하여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거대한 헬레니즘 제국을 만들었지만 불과 32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그의 후계자 문제를 두고 헬레니즘 제국은 분열과 복잡한 이합집산을 겪는다. 그 결과 그리스의 문화와 가 복합된 헬레니즘 문화가 나타났고, 분열된 제국은 크게 여섯 왕국으로 나뉘어 서로 패권을 다투는 헬레니즘 시대가 열렸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내전에서 승리하여 사실상 공화정 제체를 종식시키고 종신 독재관 자리에 앉아 당시 지중해 일대의 패권국이었던 로마의 통치체계를 개편하려 했다. 그러나 파르티아 원정 사흘 전인 기원전 44년 3월 15일 결행된 암살로 카이사르 본인은 불귀의 객이 되고, 그가 의도했던 로마 세계의 개편 역시 이루지 못한 일로 역사에 남을 뻔 했다. 하지만 암살 당시 불과 18세였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탁월한 정치적 능력을 바탕으로 경쟁자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로마 제정을 수립하면서 세계질서는 개편되었다.
  • 이슬람의 흥기는 단기적으로는 700년 가까이[4] 이어져 온 로마 제국[5] 이란- 페르시아계 왕조의 양강 구도라는 서반구의 세계 질서를 무너뜨린 대격변이었으며, 장기적으로는 현대에까지 이르는 중동 일대 이슬람계 국가들의 기원이 된 세계 질서 개편의 가장 대표적 사례이다.
  • 몽골 제국중세의 이슬람 세계와 동아시아 및 서아시아 그리고 중앙아시아 일대, 그리고 러시아 일대의 공국들을 갈아마셨다. 칭기즈 칸의 정복 사업에서 죽어나간 사람들로 인해 줄어든 탄소 배출량이 7억 톤에 달한다 할 정도면…… 이 정복 사업 끝에 중국에 몽골계 왕조가 들어섰으며 칭기즈 칸의 분할 통치 제도로 여러 칸국(汗國)들이 생겨났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수많은 공국들의 군사적 역량이 칼가강 전투로 크게 꺾여나가고 몽골 제국의 조공국 신세로 전락하면서 러시아 일대의 세력 주도권이 키예프에서 모스크바로 옮겨가게 된다.
  • 흑사병유럽권의 중세원나라[6]를 말아먹었다.
  •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품 안의 자살용 독약을 언제 마셔야 할 지 고민할 정도로 열세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1762년 초 대프로이센 동맹의 한 축을 담당하던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고 그 후계자로 표트르 3세가 등장하는데, 이 표트르 3세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열렬한 빠돌이(...)였다. 왕자 시절부터 프리드리히 대왕의 무용담에 빠져 지내던 표트르 3세는 즉위하자마자 프리드리히 2세에게 아무런 조건없이 전쟁 이전의 국경으로 회귀하는 화친 조약을 제의하여 그것을 성사시켰고, 그것도 모자라 스웨덴을 설득하여 대프로이센 전선에서 이탈시켰다. 덕택에 프로이센은 패색이 짙었던 7년 전쟁에서 슐레지엔을 차지하며 강대국으로 가는 기반을 마련하였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국이였던 오스트리아는 영토를 잃었으며 그 권위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또한 영국이 북미와 인도, 캐나다의 식민지를 프랑스로부터 할양받았으나 전비부담을 감당하지 못하고 과도한 세금을 식민지에 물렸고, 프랑스도 마찬가지로 국가재정이 악화되어 하층민을 쥐어짜는데 열중했다. 나중에 표트르 3세는 불만을 가진 아내와 귀족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어 차르 자리에서 내쫓기고 그 아내가 차르에 오르니 그녀가 바로 예카테리나 2세이다.

2.1.2. 삽질 사례

2.2. 픽션의 세계질서 개편




대체로 야! 신난다~스러운 끝이지만, 왠지 가끔 성공하면 정말 꿈도 희망도 없다...


[1] 고대 로마파르티아가 최초로 맞붙은 카르헤 전투가 BC 53년, 사산 왕조의 멸망이 AD 651년[2] 당연히 동로마(비잔티움)도 포함. [3] 당시 중국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3,300만여명이 흑사병으로 인해 사망하면서 생산 역량이 크게 감소했고, 여기에 여러 국가 막장 테크가 겹치면서 멸망의 길에 들어섰다.[4] 고대 로마파르티아가 최초로 맞붙은 카르헤 전투가 BC 53년, 사산 왕조의 멸망이 AD 651년[5] 당연히 동로마(비잔티움)도 포함. [6] 당시 중국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3,300만여명이 흑사병으로 인해 사망하면서 생산 역량이 크게 감소했고, 여기에 여러 국가 막장 테크가 겹치면서 멸망의 길에 들어섰다.[7] 사실 비공식적으로 군사고문단, 공군을 파견도 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소련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인천상륙작전 이후 나타난 한국군과 유엔군의 북진 시 소련 군사고문단을 급히 북한에서 철수시켰으며, 소련 공군기는 북한군이나 중공군의 공군기로 위장시켰다. 물론 미국도 이 사실은 진작에 알았으나, 그런다고 소련과 전쟁을 벌였다간 바로 제3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냥 모른 체했다.[8] 물론 스탈린6.25 전쟁 당시에 북한중국의 편을 든 것은 이런 이유만 있는게 아니다. 우선 소련은 나라가 해체되는 순간까지도 공산주의 국가들의 맹주를 자처하고 있었던 만큼, 자본주의 국가의 맹주인 미국 앞에서 당당하게 나설 필요가 있었다. 당연히도 그런다고 직접 미국과 붙었다간 제3차 세계 대전이 날 것은 분명했으므로, 직접 미국을 상대하는 대신 북한중국을 이용한 대리전을 펴는 것으로 공산권 맹주로서의 자존심을 지킨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중국이 땅도 넓고 자원도 풍부한 나라인 만큼 내부적인 역량이 엄청나서, 이런 나라가 경제 성장을 이룬다면 소련 입장에서는 굉장히 부담스러울 것이고 공산주의 국가들의 상당수가 친(親) 소련 정책을 버리고 친중 국가로 돌아설 위험이 컸다. 그래서 중국이 제 역량을 발휘할 만큼 성장하는 것을 최대한 늦추고자 했는데, 마침 한반도에서 발발한 6.25 전쟁이 좋은 기회로 작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미국을 이용한 중국 견제책은 엄청난 성과를 내어서 6.25 전쟁으로 인해 마오쩌둥의 입김이 중국 내에서 커졌고, 이는 전쟁으로 입은 인명과 물자의 손실과 함께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이라는 중국 역사상 최악의 삽질 정책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중국의 역량을 확실히 깎아먹었다. 덕분에 지금도 중국은 바로 위의 러시아도 견제하는데 부담스러워 할 정도로 국력의 신장이 크게 늦춰졌다.[9] 사실 비공식적으로 군사고문단, 공군을 파견도 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소련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인천상륙작전 이후 나타난 한국군과 유엔군의 북진 시 소련 군사고문단을 급히 북한에서 철수시켰으며, 소련 공군기는 북한군이나 중공군의 공군기로 위장시켰다. 물론 미국도 이 사실은 진작에 알았으나, 그런다고 소련과 전쟁을 벌였다간 바로 제3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냥 모른 체했다.[10] 물론 스탈린6.25 전쟁 당시에 북한중국의 편을 든 것은 이런 이유만 있는게 아니다. 우선 소련은 나라가 해체되는 순간까지도 공산주의 국가들의 맹주를 자처하고 있었던 만큼, 자본주의 국가의 맹주인 미국 앞에서 당당하게 나설 필요가 있었다. 당연히도 그런다고 직접 미국과 붙었다간 제3차 세계 대전이 날 것은 분명했으므로, 직접 미국을 상대하는 대신 북한중국을 이용한 대리전을 펴는 것으로 공산권 맹주로서의 자존심을 지킨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중국이 땅도 넓고 자원도 풍부한 나라인 만큼 내부적인 역량이 엄청나서, 이런 나라가 경제 성장을 이룬다면 소련 입장에서는 굉장히 부담스러울 것이고 공산주의 국가들의 상당수가 친(親) 소련 정책을 버리고 친중 국가로 돌아설 위험이 컸다. 그래서 중국이 제 역량을 발휘할 만큼 성장하는 것을 최대한 늦추고자 했는데, 마침 한반도에서 발발한 6.25 전쟁이 좋은 기회로 작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미국을 이용한 중국 견제책은 엄청난 성과를 내어서 6.25 전쟁으로 인해 마오쩌둥의 입김이 중국 내에서 커졌고, 이는 전쟁으로 입은 인명과 물자의 손실과 함께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이라는 중국 역사상 최악의 삽질 정책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중국의 역량을 확실히 깎아먹었다. 덕분에 지금도 중국은 바로 위의 러시아도 견제하는데 부담스러워 할 정도로 국력의 신장이 크게 늦춰졌다.[11] 시작하는 주인공에 따라서 조금씩은 다르나 결과적으로는 저 4명에게 아작났다.[12] 시작하는 주인공에 따라서 조금씩은 다르나 결과적으로는 저 4명에게 아작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