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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847년 (헌종 13년) 12월 10일, 충청남도 공주에서 노론 양반 가문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이다.
1880년 과거에 급제해 외교관이자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오스트리아, 영국, 독일 등 여러 나라의 공사로 활동했고 1900년 일본 공사가 되었다.
1902년 철도원 총재, 1904년 경상남도, 전라남도 관찰사, 1905년 충청북도 관찰사, 1906년 8월 경기 관찰사를 차례로 역임했다. 같은 해 11월 농상공부대신이 되었다. 1907년 이완용 내각에서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
1910년 국민협성회의 한일 합병 실행 추진 단체인 한국평화협회에서 서무부 총장이 되었다. 이와 같은 친일 행적으로 일제에게 남작 작위를 받았다.
한일 합병 이후 1911년 은사공채 2만 5000원을 받고, 다음 달 작기본서봉수식에 참가해 정식으로 남작 작위증을 받았다. 1915년에는 조선총독부의 조선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시정사업을 선전하기 위한 친일 단체의 정회원으로 기부금을 냈다. 유교대동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1924년 경학원 대재학으로 활동하다가 1924년 11월 27일 사망했다.
사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고,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으며 친일파 705인 명단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1880년 과거에 급제해 외교관이자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오스트리아, 영국, 독일 등 여러 나라의 공사로 활동했고 1900년 일본 공사가 되었다.
1902년 철도원 총재, 1904년 경상남도, 전라남도 관찰사, 1905년 충청북도 관찰사, 1906년 8월 경기 관찰사를 차례로 역임했다. 같은 해 11월 농상공부대신이 되었다. 1907년 이완용 내각에서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
1910년 국민협성회의 한일 합병 실행 추진 단체인 한국평화협회에서 서무부 총장이 되었다. 이와 같은 친일 행적으로 일제에게 남작 작위를 받았다.
한일 합병 이후 1911년 은사공채 2만 5000원을 받고, 다음 달 작기본서봉수식에 참가해 정식으로 남작 작위증을 받았다. 1915년에는 조선총독부의 조선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시정사업을 선전하기 위한 친일 단체의 정회원으로 기부금을 냈다. 유교대동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1924년 경학원 대재학으로 활동하다가 1924년 11월 27일 사망했다.
사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고,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으며 친일파 705인 명단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3. 여담
- 한국 병합 기념장, 다이쇼 천황 즉위 기념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