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박인생(朴仁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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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박인성(朴仁性)
|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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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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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지
| |
추서
| 대통령표창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인생은 1903년 8월 19일 전라남도 정의군 동중면(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에서 아버지 박종신(朴宗信)과 어머니 이학(李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6년 정의보통학교(현 표선초등학교)를 졸업, 제주농업학교(현 제주고등학교)에 입학해 1924년 수석으로 졸업하고 광주농업학교 4학년에 편입학했다. 이후 1926년 11월 광주고등보통학교 출신인 장재성, 왕재일 등과 함께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했다. 성진회는 첫째 일제의 기반에서 한국의 독립을 쟁취한다, 둘째 일제의 식민지 노예교육을 절대 반대한다, 셋째 언론·출판·결사의 자유를 요구한다 등을 강령으로 삼았다. 박인생은 성진회의 서기를 맡아 회의 운영을 주도했다.
그러나 회원 중 한 사람이 광주경찰서 형사와 혈연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비밀이 누설될 염려가 있어, 결사 5개월 만인 1927년 3월 정남균의 집에서 전술상 해산을 결의하였다. 이후 비밀보장을 위해 모임을 갖지는 않았지만 이들 구성원들은 각 학교 단위별로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이후 그는 1928년 광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3월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에 입학했으며, 재학 중에도 도쿄 주오대학 예과 재학 중이던 장재성 및 성진회·독서회의 후배들과 함께 동맹휴학을 주도하는 등의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1929년 1월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펼치던 스승 김문준(金文準)과 재회, 장재성과의 만남을 주선하던 중 일본 경시청 형사에 발각되어 연행되었다. 그는 항일운동에 대해 진술을 누차 거부하다가 모진 고문을 받고 결국 반신불수가 되어 석방되었다. 이때문에 그해 3월 귀향하였으나, 한달만인 5월 12일 25세의 나이에 고문후유증으로 별세하였다.
그러나 회원 중 한 사람이 광주경찰서 형사와 혈연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비밀이 누설될 염려가 있어, 결사 5개월 만인 1927년 3월 정남균의 집에서 전술상 해산을 결의하였다. 이후 비밀보장을 위해 모임을 갖지는 않았지만 이들 구성원들은 각 학교 단위별로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이후 그는 1928년 광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3월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에 입학했으며, 재학 중에도 도쿄 주오대학 예과 재학 중이던 장재성 및 성진회·독서회의 후배들과 함께 동맹휴학을 주도하는 등의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1929년 1월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펼치던 스승 김문준(金文準)과 재회, 장재성과의 만남을 주선하던 중 일본 경시청 형사에 발각되어 연행되었다. 그는 항일운동에 대해 진술을 누차 거부하다가 모진 고문을 받고 결국 반신불수가 되어 석방되었다. 이때문에 그해 3월 귀향하였으나, 한달만인 5월 12일 25세의 나이에 고문후유증으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