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밀양 박씨]][[분류:서귀포시 출신 인물]][[분류:1903년 출생]][[분류:1929년 사망]][[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 || 성명 ||박인생(朴仁生) || || 이명 ||박인성(朴仁性) || || 본관 ||[[밀양 박씨]][* 규정공파.][[https://www.jpsm.co.kr/bbs/bbs3_7/32564|#]] || || 생몰 ||[[1903년]] [[8월 19일]] ~ [[1929년]] [[5월 12일]] || || [[출생지]] ||[[전라남도]] 정의군 동중면 성읍리[br](현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출생지인 성읍리 935번지는 현재 정의읍성 내 성읍민속마을 동문 곁에 위치하고 있다.] || || 사망지 ||[[전라남도]] [[제주도]] || || 추서 ||대통령표창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박인생은 1903년 8월 19일 전라남도 정의군 동중면(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에서 아버지 박종신(朴宗信)과 어머니 이학(李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6년 정의보통학교(현 표선초등학교)를 졸업, 제주농업학교(현 제주고등학교)에 입학해 1924년 수석으로 졸업하고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광주농업학교]] 4학년에 편입학했다. 이후 1926년 11월 [[광주제일고등학교|광주고등보통학교]] 출신인 [[장재성]], [[왕재일]] 등과 함께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했다. 성진회는 첫째 일제의 기반에서 한국의 독립을 쟁취한다, 둘째 일제의 식민지 노예교육을 절대 반대한다, 셋째 언론·출판·결사의 자유를 요구한다 등을 강령으로 삼았다. 박인생은 성진회의 서기를 맡아 회의 운영을 주도했다. 그러나 회원 중 한 사람이 광주경찰서 형사와 혈연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비밀이 누설될 염려가 있어, 결사 5개월 만인 1927년 3월 정남균의 집에서 전술상 해산을 결의하였다. 이후 비밀보장을 위해 모임을 갖지는 않았지만 이들 구성원들은 각 학교 단위별로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이후 그는 1928년 광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3월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에 입학했으며, 재학 중에도 [[도쿄]] [[주오대학]] 예과 재학 중이던 장재성 및 성진회·독서회의 후배들과 함께 동맹휴학을 주도하는 등의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1929년 1월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펼치던 스승 김문준(金文準)과 재회, 장재성과의 만남을 주선하던 중 일본 [[경시청]] 형사에 발각되어 연행되었다. 그는 항일운동에 대해 진술을 누차 거부하다가 모진 고문을 받고 결국 반신불수가 되어 석방되었다. 이때문에 그해 3월 귀향하였으나, 한달만인 5월 12일 25세의 나이에 고문후유증으로 별세하였다. == 사후 == 박인생 사후인 1929년 11월 3일 성진회 창립 3주년을 기해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어머니 이학은 아들의 혼이 살아난 것이라고 여겼고 외아들의 떳떳한 죽음을 기리기 위해 사후 6년이 지나 성읍리에 의연금 1백원을 기증하여 500평 부지에 마을 향사를 짓게 했으며, 옛 정의현 관아였던 일관헌(日觀軒)도 중수케 하였다. 어머니 이학의 큰 뜻에 감동한 성읍 주민들은 1935년 기념비를 세워 그 뜻을 기렸다.[[http://jejuhistory.co.kr/bbs/view.php?id=local&page=183&sn1=&divpage=1&sn=off&ss=on&sc=on&cate=time&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94|#]] >"朴仁生 萱堂 夫人李鶴記念碑 敎倣孟母 媚思周姜 捐金百圓 資我一鄕 昭和十年五月三十日 城邑里" >* 국역 : 박인생의 어머니 부인 이학 기념비 >* 교육은 맹자의 어머니를 본받았고, 아름다움은 주나라 [[읍강]]을 생각케 한다. 금 백원을 의연하여 우리 온 고을에 도움이 되었다. [[쇼와]] 10년(1935) 5월 30일 성읍리에서 세움. 박인생은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