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허찬(許贊) |
이명 | 허만회(許晩會), 허찬(許讚) |
생몰 | |
사망지 |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 생애[편집]
허찬은 1886년 7월 7일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수묵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27일 옥천군 이원 장날을 이용하여 육창주(陸昌柱), 허상기, 김용이(金龍伊), 허량, 이면호(李冕鎬), 허상옥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주민 300여명을 규합, 태극기를 배포하며 독립만세를 부르고 주재소를 습격하여 이전에 구속된 시위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기물 등을 파괴하는 등 시위를 전개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무차별 총격으로 시위대는 강제 해산되었고, 그는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1919년 5월 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소요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를 제기하여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옥천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5년 11월 1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허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무차별 총격으로 시위대는 강제 해산되었고, 그는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1919년 5월 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소요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를 제기하여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옥천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5년 11월 1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허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