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Real Madrid Club de Fútbol | ||||||
이름 | 프란시스코 헨토 Francisco Gento | |||||
본명 | 프란시스코 헨토 로페스 Francisco Gento Lopez | |||||
출생 | ||||||
국적 | ||||||
신체 | ||||||
직업 | ||||||
소속 | 선수 | SD 누에바 몬타냐(?~?/유스팀) 우니온 클루브 아스티예로(?~?/유스팀) 라요 칸타브리아(?~?/유스팀) 레알 라싱 클루브 데 산탄데르(1952~1953) 레알 마드리드 CF(1953~1971) | ||||
감독 | ||||||
국가대표 | 43경기 5골(스페인 / 1955~196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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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 축구 경력[편집]
2.1. 클럽 경력[편집]
1952-53 시즌에 레알 라싱 소속으로 데뷔한 뒤, 한창 전력 쇄신에 열을 올리던 레알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의 눈에 띄어 곧바로 다음 시즌에 이적해 11번을 배번받게 된다. 그리고 압도적인 속도를 바탕으로 한 드리블과[3] 전문 윙어 치고는 높은 득점력을 앞세워 일약 스타로 발돋움한다. 헨토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등과 막강한 공격진을 이루었고, 레알 마드리드는 1955-56 시즌 레몽 코파가 이끄는 스타드 드 랭스를 4:3으로 격파하며 유러피언 컵 초대 우승팀이 되었다.
헨토는 1956-57 시즌 유러피언 컵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꺾고, 줄리뉴 보텔류가 이끄는 ACF 피오렌티나를 상대한다. 헨토는 디 스테파노와 함께 골을 넣으며 2:0으로 피오렌티나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
그 후 페렌츠 푸스카스, 호세 산타마리아까지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하며 레알 마드리드의 전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1957-58 시즌 유러피언 컵에서도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준 레알 마드리드는 결승전에서 AC 밀란을 상대했는데, 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와 에르네스토 그릴로에게 실점을 허용하는 등 고전했으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엑토르 리알의 동점골로 연장전에 돌입하였고, 헨토는 마침내 결승골을 넣어 유러피언 컵 3연패를 달성한다.
그 후 1959-60 시즌까지 유러피언 컵 5연패를 달성, 레알 마드리드는 저승사자 군단이라고 불렸다. 특히 1959-60 시즌 결승전에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7:3으로 격파하는 등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960-61 시즌에는 숙명의 라이벌 FC 바르셀로나에 유러피언 컵에서 덜미를 잡혔고, 1961-62 시즌에는 에우제비우의 SL 벤피카에 패하며 유럽의 제왕 자리에서 내려온다.
이후 기존 스타들이 하나둘씩 떠나며 저승사자 군단이 해체되는 와중에도 헨토는 꾸준히 마드리드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팀은 대대적인 개혁을 거쳐 이제 Ye-yé 마드리드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지만 헨토만은 베테랑으로서 끈질기게 자리를 지켰고, 1963-64 시즌에는 폰테베드라전(3-1 승리)에서 레알 마드리드의 라리가 2000호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1964-65 시즌에는 라리가 5연패를 달성했으나,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는 인테르에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파일:qe0S4.jpg
1965-66 시즌에 헨토는 마지막 불꽃을 불태운다. 푸스카스가 5골을 폭발시키며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을 대파시켰고, 폴 반 힘스트가 이끄는 RSC 안데를레흐트를 상대로 헨토는 아만시오 아마로와 함께 양 측면을 붕괴시키며 격파했고, 4강전에서 인테르도 격파하며, 작년 결승전 패배에 대한 복수를 했다. FK 파르티잔와의 결승전에서는 벨리보르 바소비치에게 선제골을 내주었으나, 아만시오와 세레나의 골로 2:1 역전승을 거두어 헨토는 레알 마드리드의 6번째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끈다.
파일:LyGB7.jpg
그후 헨토는 1971년까지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6회, 라리가 우승 12회, 코파 델 레이 우승 2회씩 우승하며 레알 마드리드에 수많은 트로피를 안겨주었고, 이후 1970-71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헨토는 1956-57 시즌 유러피언 컵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꺾고, 줄리뉴 보텔류가 이끄는 ACF 피오렌티나를 상대한다. 헨토는 디 스테파노와 함께 골을 넣으며 2:0으로 피오렌티나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
그 후 페렌츠 푸스카스, 호세 산타마리아까지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하며 레알 마드리드의 전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1957-58 시즌 유러피언 컵에서도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준 레알 마드리드는 결승전에서 AC 밀란을 상대했는데, 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와 에르네스토 그릴로에게 실점을 허용하는 등 고전했으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엑토르 리알의 동점골로 연장전에 돌입하였고, 헨토는 마침내 결승골을 넣어 유러피언 컵 3연패를 달성한다.
그 후 1959-60 시즌까지 유러피언 컵 5연패를 달성, 레알 마드리드는 저승사자 군단이라고 불렸다. 특히 1959-60 시즌 결승전에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7:3으로 격파하는 등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960-61 시즌에는 숙명의 라이벌 FC 바르셀로나에 유러피언 컵에서 덜미를 잡혔고, 1961-62 시즌에는 에우제비우의 SL 벤피카에 패하며 유럽의 제왕 자리에서 내려온다.
이후 기존 스타들이 하나둘씩 떠나며 저승사자 군단이 해체되는 와중에도 헨토는 꾸준히 마드리드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팀은 대대적인 개혁을 거쳐 이제 Ye-yé 마드리드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지만 헨토만은 베테랑으로서 끈질기게 자리를 지켰고, 1963-64 시즌에는 폰테베드라전(3-1 승리)에서 레알 마드리드의 라리가 2000호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1964-65 시즌에는 라리가 5연패를 달성했으나,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는 인테르에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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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66 시즌에 헨토는 마지막 불꽃을 불태운다. 푸스카스가 5골을 폭발시키며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을 대파시켰고, 폴 반 힘스트가 이끄는 RSC 안데를레흐트를 상대로 헨토는 아만시오 아마로와 함께 양 측면을 붕괴시키며 격파했고, 4강전에서 인테르도 격파하며, 작년 결승전 패배에 대한 복수를 했다. FK 파르티잔와의 결승전에서는 벨리보르 바소비치에게 선제골을 내주었으나, 아만시오와 세레나의 골로 2:1 역전승을 거두어 헨토는 레알 마드리드의 6번째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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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헨토는 1971년까지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6회, 라리가 우승 12회, 코파 델 레이 우승 2회씩 우승하며 레알 마드리드에 수많은 트로피를 안겨주었고, 이후 1970-71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2.2. 국가대표 경력[편집]
헨토는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1962년 칠레 월드컵 당시 스페인의 스쿼드는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전성기를 맞이하던 호세 산타마리아, 페렌츠 푸스카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헨토 본인에다가 FC 바르셀로나에서 월드 클래스의 활약을 보여준 루이스 수아레스가 있었다. 그러나 디 스테파노는 지역 예선에서 부상당해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했다. 스페인은 체코슬로바키아, 브라질, 멕시코와 한 조가 되었는데 멕시코에 1골로 겨우 이기고 나머지 두 팀에 패배하며 조 꼴지로 광탈했다. 이후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4에 출전하지 못했는데, 하필 이 대회에서 스페인은 우승을 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도 출전했으나 역시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2.3. 은퇴 이후[편집]
은퇴한 뒤에는 여러 팀의 감독과 레알 마드리드 홍보 대사 등을 역임했다. 2016년 10월 23일(현지 기준)에는 소시오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레알 마드리드 명예 회장으로 추대됐다. 참고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도 2000년에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에 의해 명예 회장으로 추대된 다음 만장일치로 승인을 받은 바 있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현재 스페인 윙어하면 다비드 실바, 페드로 로드리게스 등 유기적인 스위칭과 창의적인 패스로 바탕으로 상대 중앙 수비를 박살내는 스타일의 윙어가 생각나겠지만 헨토는 전형적인 클래식 윙어이다. 빠른 발과 화려한 드리블링으로 상대의 측면을 돌파하며 동료에 머리에 볼을 배달하는 게 그의 스타일.
트레이드마크는 빠른 주력이었다. 지금 레알 하면 생각나는 치달왕은 가레스 베일이겠지만 헨토가 진짜 치달왕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100m를 10초 안에 주파하는 괴물 같은 스피드를 보유했던 그는 당시에는 특히 더 눈에 띄었다.
크로스 역시 굉장히 날카롭고 정확하게 들어갔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페렌츠 푸스카스로 구성된 중앙 공격진의 득점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이 부분에 대해서 디 스테파노가 직접 헨토가 없었다면 우리도 이렇게 많은 골을 못 넣었을 것이라고 비슷한 어조로 언급한 적이 있다.
트레이드마크는 빠른 주력이었다. 지금 레알 하면 생각나는 치달왕은 가레스 베일이겠지만 헨토가 진짜 치달왕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100m를 10초 안에 주파하는 괴물 같은 스피드를 보유했던 그는 당시에는 특히 더 눈에 띄었다.
크로스 역시 굉장히 날카롭고 정확하게 들어갔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페렌츠 푸스카스로 구성된 중앙 공격진의 득점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이 부분에 대해서 디 스테파노가 직접 헨토가 없었다면 우리도 이렇게 많은 골을 못 넣었을 것이라고 비슷한 어조로 언급한 적이 있다.
4. 평가[편집]
클럽에서는 거의 역대 최고라고 봐도 된다. '저승사자 군단'에서 ' Ye-yé 마드리드'로 이어지는 레알의 황금기 2개를 운 좋게 걸쳤다. 시대를 잘 타고나 좋은 동료들과 뛰었으며, 본인도 그 사이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쳐 독보적인 커리어를 쌓았다고 볼 수 있다.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6회, 라리가 우승 12회로 각각 반 세기 내내 1위를 수성하고 있다. 전자나 후자나 사실상 경신하기 힘든 대기록이다. 무엇보다 이 기록은 18년 동안의 선수 생활을 통해 쌓은 것인데, 18년은 야구로 쳐도 상당히 긴 편이며 축구 선수들에게는 단순히 현역으로 버티기에도 버거운 시간이다. 그리고 그런 기록에 맞는 선수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국가대표 커리어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헨토는 '예-예 마드리드'의 주역이었음에도, 그들이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4에서 자국의 첫 우승을 이끌었을 때 불참하여 우승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국가대표 커리어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헨토는 '예-예 마드리드'의 주역이었음에도, 그들이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4에서 자국의 첫 우승을 이끌었을 때 불참하여 우승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5. 커리어[편집]
5.1. 대회 기록[편집]
5.2. 개인 수상[편집]
- 레알 마드리드 CF 명예의 전당: 1971
- 레알 마드리드 CF 1960년대 최고의 선수 2위[6]: 2018
- 월드 사커 세계 베스트 11(3): 1960~1962
- 월드 사커 선정 20세기 최고의 축구인 100명: 1999
6. 기타[편집]
- '프란시스코'라는 이름을 가진 많은 선수들이 그렇듯 '파코'가 애칭이다.
- 레알 마드리드는 헨토를 위한 기념 경기를 무려 3번이나 열어줬는데, 현재까지는 헨토가 유일한 사례이다. 첫 번째 경기는 1965년 9월에 리버 플레이트를 불러들여 열었고, 두 번째 경기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개장 25주년 기념 경기와 겸해서 CF 오스 벨레넨세스를 불러들여 개최했다.[9] 마지막 세 번째 경기는 비교적 최근인 2007년 12월 제29회 트로페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10]에서 파르티잔을 상대한 경기였다.[11]
- 3형제가 모두 레알 마드리드에서 현역 선수로 활동한 집안 내력을 가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도 3형제가 레알 마드리드에 선수 혹은 비선수로서 관여한 내력이 있다.
- 마르코스 요렌테의 종조부(할아버지의 형제)이다.
- 레알 마드리드의 챔피언스 리그 원년 우승 멤버 중 마지막 생존자이다.
- 'La Galerna del Cantábrico(칸타브리아의 광풍)'라는 별명의 유래에 대해선 일화가 하나 존재한다.
레알 마드리드는 산 마메스 원정에서 아틀레틱 클루브에 5-0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아틀레틱의 서포터들은 경기 종료 후 모두 기립박수를 보냈고, 모든 선수들이 경기장을 빠져나간 이후에도 박수는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사포르타(Saporta, 당시 레알 마드리드 부회장)는 선수들로 하여금 다시 경기장에 들어가 인사를 하도록 했다. 그러자 관중들은 더 큰 박수와 환호로 답례를 해 왔다. 다시 선수들이 퇴장을 시도했지만 박수 소리는 커져만 갔다.
그러자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헨토, 관중들이 너에게 보내는 박수다. 나가 봐라."라고 말했다. 헨토가 경기장으로 나오자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이 사건은 스페인의 모든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이후 그는 '칸타브리아의 광풍(La Galerna del Cantábrico)'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12]Luís Miguel Ferreira, 《Biblia Del Real Madrid》
[1] 2등은 5회의 파올로 말디니,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그리고 저승사자 군단 시절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 7명.[2] 2등은 10회의 리오넬 메시와 피리.[3] 100미터를 11초 만에 주파했는데 공을 단 상태에서도 그와 비슷한 속도를 낼 수 있었다고 한다.[4]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최다 우승.[5] 골닷컴 선정[6] 골닷컴 선정[7] 골닷컴 선정[8] 스카이 스포츠 선정[9] 벨레넨세스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개장 첫 경기의 상대 팀이었다.[10]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기리기 위해 매 시즌 전에 구단이 개최하는 친선 대회.[11] 파르티잔은 레알 마드리드와 헨토의 6번째 유러피언 컵 우승 당시 결승전에서 만났던 팀이다.[12] 'Galerna'는 스페인의 북쪽 해안에서 부는 강풍을 뜻하는 단어이고, 칸타브리아는 그 인근에 위치한 주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