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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령전 |
1. 소개[편집]
2. 이름[편집]
3. 역사[편집]
창건 연대는 정확히 모르나 1744년(영조 20년) 8월 20일 자 《영조실록》의 기사#를 보면, 그 무렵 중수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로 미루었을 때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영조는 평생에 걸쳐 총 13점의 초상화를 남겼는데, 그 중 7점을 태령전에 봉안했다.#
1776년(영조 52년) 영조가 승하하자 정조는 태령전과 그 일대를 영조의 장례공간으로 활용했다. 우선 혼전을 이곳에 두었고#[4] 태령전 근처에 재실 도수연을 세웠다.#, 또한 정조 자신이 머물 여막을 태령전 남쪽 행각에 두었고# 인산 날 여기서 망곡례를 행했다.#
1786년(정조 10년)에는 사망한 문효세자의 혼궁[5]을 이 곳에 두고 일종의 위령제인 재우제(再虞祭)[6]를 지냈다.# 1836년(헌종 2년)에는 종묘의 영녕전을 증축공사하면서, 잠시 제1실 ~ 제8실에 있던 신주의 일부를 모시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이후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고종 시기 경복궁을 중건할 때 경희궁의 건물들을 헐어다 자재로 쓰면서 사라졌다. 근거는 다음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1776년(영조 52년) 영조가 승하하자 정조는 태령전과 그 일대를 영조의 장례공간으로 활용했다. 우선 혼전을 이곳에 두었고#[4] 태령전 근처에 재실 도수연을 세웠다.#, 또한 정조 자신이 머물 여막을 태령전 남쪽 행각에 두었고# 인산 날 여기서 망곡례를 행했다.#
1786년(정조 10년)에는 사망한 문효세자의 혼궁[5]을 이 곳에 두고 일종의 위령제인 재우제(再虞祭)[6]를 지냈다.# 1836년(헌종 2년)에는 종묘의 영녕전을 증축공사하면서, 잠시 제1실 ~ 제8실에 있던 신주의 일부를 모시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이후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고종 시기 경복궁을 중건할 때 경희궁의 건물들을 헐어다 자재로 쓰면서 사라졌다. 근거는 다음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경복궁 중건일기》
4. 특징[편집]
《서궐도안》을 채색한 《서궐도》의 태령전 |
5. 여담[편집]
[1] 奉安所. 보관하고 모시는 곳.[2] 이것을 집자(集字)라고 한다.[3] 대표적인 예로, 인명으로는 무령왕(武寧王), 효령대군(孝寧大君), 이어령(李御寧) 등을, 이외에는 보령군(保寧郡), 고령가야(古寧伽倻)를 들 수 있다. 자세한 것은 '寧' 항목 참조.[4] 이 때 태령전에 보관 중이던 어진을 임시로 태령전 서쪽에 있는 위선당이란 곳에 옮겨 모셨다. 이후 어진은 경현당을 거쳐# 창덕궁 선원전으로 옮겨갔다.#[5] 왕이 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혼‘전(殿)’으로 부르지 못하고 혼궁이라 했다.[6] 시신을 무덤에 안장한 후 신주를 만들어 혼령을 안정시키는 제사를 우제(虞祭)라고 한다. 제우제는 하관(下棺) 후 두 번째로 지내는 우제이다.[7] 현재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경성중학교와는 전혀 다르다. 그 곳은 1967년 개교했으며 한자가 '景'城으로 다르다.[8] 摹寫本. 베껴 그린 그림.[9] 경희궁 일대가 돈의문(서대문) 바로 안쪽에 위치한다. 돈의문의 별칭이 새문이었기에 그 부근을 새문동이라 불렀다. 자세한 것은 돈의문 항목 참조.[10] 그래서 새 궁궐 짓는다며 원래 이 자리에 있던 정원군(광해군의 이복 동생)의 집을 빼앗았고, 정원군은 화병으로 사망했다. 나중에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로 즉위하면서 뺏긴 집을 도로 다시 찾은 모양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