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사 광빈공 최량 | |
시호 | 광빈공(匡彬公) |
삼사 | 태사(太師) |
본관 | 경주 최씨(崔氏) |
이름 | 양(亮) |
생몰연도 | ? ~ 995.04 |
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광종대왕이 시작한 과거로 뽑혀 커리어를 시작했다. 박사 직위를 얻어 학문에 힘쓸 수 있었는데 당시 왕실의 일원이던 왕치와 매우 친했다. 광종이 붕어하고 경종 헌화왕이 즉위, 후사 왕송이 너무 어려 왕치에게 자리를 넘겨 대방(大邦)을 맡기니, 그가 바로 성종 문의대왕이다. 성종은 왕족 시절 눈여겨 봤던 최량을 기용해 대간 직을 맡겨 정치를 논하고, 자신의 숙위를 맡기고, 높은 재상의 자리에 앉혀 뜻을 펼칠 수 있게 하였다.
소손녕 침입 당시 임시 편성된 북계 군단 | ||
상군사(上軍士) | 중군사(中軍士) | 하군사(下軍士) |
시중(侍中) 박양유 | 내사시랑(內史侍郞) 서희 | 문하시랑(門下侍郞) 최량 |
기타 지휘관 | ||
제도(諸道) 병마제정사(兵馬齊正使) | ||
최량은 후 거란과의 전쟁에서 하군사로 북방에 가기도 했고, 조정의 고위 관직에 앉아 국정을 총괄하기도 했다. 민관 장관이 되어 호적 및 정부 지출 관리를 담당하기도 했고 사관의 장관이 되기도 했다.
994년, 최량은 성종의 선지(宣旨)[1]를 받들어 '갈양사혜거국사비'를 제작했다. 이 때의 직위는 내사문하평장사(內史門下平章事)[2] - 감수국사(監修國史)[3] - 태자소사(太子少師)[4]이다.
성종이 재위 중이던 995년 4월에 죽었고, 성종은 매우 슬퍼하며 그의 가족에게 곡식, 한약재를 하사하고 태자태사[5]에 추증해주었다. 후 계속 추증되어 품계 삼중대광, 명예직 태사 및 내사령으로 봉해졌다. 시호는 광빈공으로 목종이 성종의 묘정에 배향했다.
994년, 최량은 성종의 선지(宣旨)[1]를 받들어 '갈양사혜거국사비'를 제작했다. 이 때의 직위는 내사문하평장사(內史門下平章事)[2] - 감수국사(監修國史)[3] - 태자소사(太子少師)[4]이다.
성종이 재위 중이던 995년 4월에 죽었고, 성종은 매우 슬퍼하며 그의 가족에게 곡식, 한약재를 하사하고 태자태사[5]에 추증해주었다. 후 계속 추증되어 품계 삼중대광, 명예직 태사 및 내사령으로 봉해졌다. 시호는 광빈공으로 목종이 성종의 묘정에 배향했다.
3. 역임 관작[편집]
최량의 생전 역임 직위 | ||
직위 | 공문박사(攻文博士) | 최량의 최초 관직으로 일종의 학위에 가깝다. |
참지정사(叅知政事) - 좌산 기상시(左散 騎常侍) - 사위경(司衛卿) | ||
문하시랑(門下侍郞) | 문하성의 차관급 직위. | |
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 민관어사(民官御事) - 감수국사(監修國史) | 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는 내사성의 차관이다. 민관어사는 민관의 장관이다. 감수국사는 사관[8]의 장관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