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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인정문
昌德宮 仁政門 | |
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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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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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
| 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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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연도
| 1985년 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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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시기
| 조선시대, 1405년 창건, 1745년 중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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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昌德宮 仁政門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으로 들어와 오른쪽으로 꺾어 금천교를 건넌 뒤 진선문을 지나 왼쪽으로 돌면 보인다. 이는 광화문에서 근정문까지 일직선인 경복궁과 다르다. 경복궁은 예법에 따라 반듯하게 구획한 반면, 창덕궁은 자연 산세에 맞춰 지었기 때문이다.
이름 뜻은 당연히 ‘인정전의 문’이다. ‘인정(仁政)’ 자체는 맹자가 왕도정치를 강조하면서 언급했던 '인정(仁政)'에서 따왔다. 이름 그대로 '어진(仁) 정치(政)를 바탕으로 훌륭한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현판의 글씨는 선조 시대의 명필 북악 이해룡(北嶽 李海龍)이 쓴 것으로 전한다.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으로 들어와 오른쪽으로 꺾어 금천교를 건넌 뒤 진선문을 지나 왼쪽으로 돌면 보인다. 이는 광화문에서 근정문까지 일직선인 경복궁과 다르다. 경복궁은 예법에 따라 반듯하게 구획한 반면, 창덕궁은 자연 산세에 맞춰 지었기 때문이다.
이름 뜻은 당연히 ‘인정전의 문’이다. ‘인정(仁政)’ 자체는 맹자가 왕도정치를 강조하면서 언급했던 '인정(仁政)'에서 따왔다. 이름 그대로 '어진(仁) 정치(政)를 바탕으로 훌륭한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현판의 글씨는 선조 시대의 명필 북악 이해룡(北嶽 李海龍)이 쓴 것으로 전한다.
2. 역사
1405년(태종 5년) 창덕궁 창건 때 지었다. 건립 당시에는 행각 모서리에 십자각(十字閣)을 두었으며 문과 십자각 모두 중층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8년(광해군 원년)에 복구했다. 이후 이괄의 난, 병자호란 때 다른 건물들이 다 불탔을 때도 무사했다.
그러나 1744년(영조 20년) 10월에 가까이 있던 승정원 건물에서 불이 나 화재를 입어 이듬해인 1745년(영조 21년) 3월에 재건했다.
1907년(융희 원년) 순종황제가 즉위하고 창덕궁으로 이어한 뒤 일제강점기까지 살았다. 그때 인정전 권역을 많이 변형했고 인정문 모습도 많이 바꾸어놓았다. 광복 이후인 1994년 원형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3. 구조
-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총 6칸이다.
- 도리받침부재는 구름 모양으로 깎았으며, 중앙 2개의 기둥은 고주(高柱)라 하여 다른 기둥보다 훨씬 높게 세웠다.
- 문짝은 나무 판으로 만들었으며 중앙 열에 달았다.
- 앞 마당이 찌그러져있다. 창덕궁 창건 당시부터 그랬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창덕궁은 자연 산세에 맞춰 지었고 또 남쪽에 종묘가 있어서, 종묘의 지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공간을 최대한 넓게 하려다보니 저런 모양이 나온 것. 이 때의 일화가 하나 있다. 태종은 이 마당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공사 책임자인 박자청을 측량을 게을리 했다는 죄목으로 옥에 가두고 행각을 부수게 한 뒤 그 곳에 담만 쌓았다. 하지만 한 달 뒤에 사면받은 박자청은 이후로도 능력을 인정받아 여러 공사를 계속 맡았고 행각도 원래 자신이 의도했던 대로 다시 만들었다. 즉, 이 찌그러진 마당은 박자청이 왕과 대립하면서까지 이루고자 한, 그가 의도했던 설계인 것.
천하의 태종과 맞서서 자기 뜻을 이루다니 이 양반도 보통 양반이 아닌 듯하다.인정문 마당
- 위에서 짧게 언급했지만 순종 이어 이후에 달라진 부분이 많았다. 본래 정전이던 인정전이 황제의 알현소로 바뀌면서 인정문 역시 단순한 정문에서 알현소의 현관이 되었고 이 때 몸체가 많이 변했다.
우선 정면 3칸 중 앞 면의 가운데 칸과 뒷면의 좌, 우 협칸만 통행할 수 있게 한 뒤, 나머지 칸은 전부 유리창과 벽으로 막았다. 그리고 문짝도 근대식 나무 문으로 조성했으며 현판도 떼어냈다.[8] 또한 원래 인정문과 인정전은 별개의 건물이었으나, 인정전 좌, 우에 건물과 바로 연결되는 행각을 덧댄 뒤 그 행각을 인정문 행각과 연결되게 하여 인정문에서 인정전까지 실내 이동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인정문 행랑은, 원래 바깥 쪽만 벽과 문으로 나누고 인정전 마당 쪽으로는 기둥만 놓았던 것을 개조 이후엔 전부 벽으로 막은 뒤 귀빈 대기실 등으로 활용하였다. 1990년대 조선시대 원형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현재는 볼 수 없다.1902년 촬영한 인정문일제강점기 인정문과 인정전 일곽변형 된 인정문 서행각일제강점기 인정전 마당 안쪽에서 바라본 인정문1980년대 인정문1990년대 복원 중인 인정문
- 다른 궁궐 건물의 문들과는 다르게, 용마루에 오얏꽃(자두꽃) 문양이 박혀있다.[12] 바로 대한제국 국장 및 황실의 문장이었던 '이화문(李花紋)'이다.[13] 대한제국 황실이 전주 이씨라 오얏꽃을 문장으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가문 문장을 새겨넣는 것은 개화기 서양이나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14] 크게 순종이 이어했을 당시에 박았다는 주장과 일제강점기 이후에 박았다는 의견이 있다. 전자는 이미 구한말에 궁에 유리창과 커튼, 카페트를 들이는 등 다방면에서 외국식을 도입했던 것을 들 수 있고, 후자 일제 설은 일본이 전통 양식 파괴를 위해 일부러 용마루에 박았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이 와전되어 꽃 종류를 구분하지 못하고 사쿠라를 박았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이 오얏꽃 문양은 1990년대 인정전 일곽의 원형 복원 당시에도 떼지 않았고 지금까지 있다.인정문 용마루
4. 여담
[1] 한옥에서는 주로 ‘단층(單層)’으로 표현한다.[2] 한옥에서는 주로 ‘단층(單層)’으로 표현한다.[3] 창방 위에 얹혀 공포를 받치는 넓은 직사각형 단면의 긴 건축 부재.[4] 창방 위에 얹혀 공포를 받치는 넓은 직사각형 단면의 긴 건축 부재.[5] 부재(部材)의 두 끝 부분에만 칠한 단청.[6] 부재(部材)의 두 끝 부분에만 칠한 단청.[7] 북쪽의 중앙 칸은 나중에 통행할 수 있게 바뀌었으며 현판도 나중에 다시 걸었다.[8] 북쪽의 중앙 칸은 나중에 통행할 수 있게 바뀌었으며 현판도 나중에 다시 걸었다.[9] 이는 인정전도 마찬가지. 단 인정문에는 앞 뒤로 3개, 총 6개가 박혀있고 인정전에는 5개가 박혀있다.[10] 배꽃을 가리키는 이화(梨花)와 헷갈리지 않도록 주의. 이화학당,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의 이화는 배꽃(梨花)이다.[11] 일본의 중세 건축물에 가면 가몬(일본)을 이렇게 새겨넣는 것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12] 이는 인정전도 마찬가지. 단 인정문에는 앞 뒤로 3개, 총 6개가 박혀있고 인정전에는 5개가 박혀있다.[13] 배꽃을 가리키는 이화(梨花)와 헷갈리지 않도록 주의. 이화학당,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의 이화는 배꽃(梨花)이다.[14] 일본의 중세 건축물에 가면 가몬(일본)을 이렇게 새겨넣는 것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15] 경희궁에 왕이 머물 땐, 숭정문에서 했다.[16] 경희궁에 왕이 머물 땐, 숭정문에서 했다.[17] 과거의 첫 시험.[18] 당하관(堂下官) 이하의 문, 무관에게 10년마다 한 번씩 보게 하는 과거.[19] 과거의 첫 시험.[20] 당하관(堂下官) 이하의 문, 무관에게 10년마다 한 번씩 보게 하는 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