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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 제1회[편집]
- 장영실의 숙부가 상류계급을 양반이라 부르는데 조선의 상류계급이 양반이라 일반적으로 불리게 된 건 조선 중,후기에 이르러서고 본디 양반은 문반, 무반을 통틀은 관료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사대부란 단어가 나오는게 옳다.
3. 제2회[편집]
4. 제3회[편집]
- 장영실이 부친에게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는 표현을 쓰는데 장영실은 얼자라는 점에서 당시에는 기본적으로 정실소생이 아니면 아버지라는 호칭을 할 수 없었다. 홍길동 이야기는 그냥 나오는것이 아니며 조선시대 서얼에 대한 차별문제는 조선건국부터 끝까지 제대로 해결된적이 없다. 다만 서얼에 대한 차별이 본격적으로 심해진 건 조선 건국 이후, 그것도 태종대부터라 아직 조선초 태종 재위기간이 배경인 장영실에선 딱히 지킬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또한 적서차별은 가풍과 지역(도시냐 지방이냐)에 영향을 많이 받아서 집안마다 차이가 있었다. 라고 하지만 실제 조선은 법적으로 서자의 호부를 막은 적이 없다. 홍길동의 경우는 얼자인데다.. 워낙 홍길동이 걸물이어서 기를 죽일 목적도 있었다.
- 양녕대군이 귀양을 가서 무단으로 귀양지를 이탈했다는 전개는 사실에 가깝다. 양녕이 유배지[3]인 경기도 광주에서 편지 한통 남기고 무단도주한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 양녕의 유모 등이 이 일을 두고 기생 어리 때문에 양녕이 저리 되었다며 어리를 심하게 모욕하자 그녀는 억울한 나머지 목을 메어 자살해 버렸고, 태종이 수색령을 내리자 양녕은 이틀 후에 발견되었다. 태종이 궁으로 불러들여 무단도주 및 어리의 자살에 대해 나무랐는데, 양녕이 처음에는 사죄하는 척했으나 실제론 죄책감을 느끼기는 커녕 악기를 연주하면서 뻔뻔하게 굴어서 태종과 주변의 어이를 털어놓은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에는 세종 1년 1월 30일~ 2월3일 기사에 나오는 사건인데 3회의 양녕대군의 행각은 그를 각색한듯 하다. 다만 태종이 양녕을 개인적으로 매우 아꼈으며 자기가 죽은 후 양녕이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세종에게 신신당부했던 것이 사실이다.
5. 제4회[편집]
6. 제5회[편집]
- 이천이 장영실에게 개인사(일가족이 몰살당하고 자신이 임진강에 버려졌다는 등)를 들려주는데 이것은 모두 사실이다! 정확히는 이천의 외삼촌이 염흥방이고 이 염흥방이 이성계와 최영에 의해 몰락할때 이천집안도 같이 몰락했고 승려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