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이석채(李錫埰) |
이명 | 박탁(朴鐸) |
본관 | |
생몰 |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이석채는 1892년 5월 26일 경상도 안강현 양동(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12월 28일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면 온천리(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의 김천여관에서 칠산동에 사는 이정약(李丁若)에게 벼 100석을 1석당 20원으로 하여 팔겠다고 하고 12월 31일과 1920년 1월 8일 이틀에 걸쳐 군자금 2,000원을 모금하였고, 이를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해줄 목적으로 1920년 1월 만주 류허현(柳河縣)[3]으로 망명하였다. 1월 중순경에 류허현에 도착한 이석채는 그곳에서 임시정부 요원인 노백린을 만나 1,000원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그는 임시정부의 외무원이 되어 국내의 민정을 시찰하고, 임시정부 요원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로 입국하였다.
1920년 2월 4, 5일경에 경성부로 돌아온 이석채는 이후 함경남도 원산부로 가서 기선을 타고 강원도 강릉군 주문진읍에 도착하였다. 이때 박탁(朴鐸)이라는 가명으로 덕방면 두산리(현 두산동)에 거주하는 최명일(崔命一)과 삼척군 삼척면 읍상리(현 삼척시 읍상동)에 거주하는 김동석(金東錫) 등에게 임시정부 요원 지원 및 독립운동 참여를 권유하였다.
이 일로 이석채는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1920년 4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사기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다.#
출옥 후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48년 3월 16일 별세하였다.
200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는 1919년 12월 28일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면 온천리(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의 김천여관에서 칠산동에 사는 이정약(李丁若)에게 벼 100석을 1석당 20원으로 하여 팔겠다고 하고 12월 31일과 1920년 1월 8일 이틀에 걸쳐 군자금 2,000원을 모금하였고, 이를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해줄 목적으로 1920년 1월 만주 류허현(柳河縣)[3]으로 망명하였다. 1월 중순경에 류허현에 도착한 이석채는 그곳에서 임시정부 요원인 노백린을 만나 1,000원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그는 임시정부의 외무원이 되어 국내의 민정을 시찰하고, 임시정부 요원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로 입국하였다.
1920년 2월 4, 5일경에 경성부로 돌아온 이석채는 이후 함경남도 원산부로 가서 기선을 타고 강원도 강릉군 주문진읍에 도착하였다. 이때 박탁(朴鐸)이라는 가명으로 덕방면 두산리(현 두산동)에 거주하는 최명일(崔命一)과 삼척군 삼척면 읍상리(현 삼척시 읍상동)에 거주하는 김동석(金東錫) 등에게 임시정부 요원 지원 및 독립운동 참여를 권유하였다.
이 일로 이석채는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1920년 4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사기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다.#
출옥 후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48년 3월 16일 별세하였다.
200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