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여주 이씨]][[분류:경주시 출신 인물]][[분류:1892년 출생]][[분류:1948년 사망]] || 성명 ||이석채(李錫埰) || || 이명 ||박탁(朴鐸) || || 본관 ||[[여주 이씨]][* 여강경주파 24세손 '''석(錫)''' 광(光) 근(根) 현(鉉) 항렬.] || || 생몰 ||[[1892년]] [[5월 26일]] ~ [[1948년]] [[3월 16일]] || || [[출생지]] ||<(> 경상도 안강현 양동[br](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경주)|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 인근의 안계리·다산리와 함께 [[여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한구(독립운동가)#s-2|이한구]]·[[이인석(독립운동가)|이인석]], 정치인 [[이원준(정치인)|이원준]]도 이 마을 출신이다.]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이석채는 1892년 5월 26일 경상도 안강현 양동(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12월 28일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면 온천리(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부산)|온천동]])의 김천여관에서 [[칠산동]]에 사는 이정약(李丁若)에게 벼 100석을 1석당 20원으로 하여 팔겠다고 하고 12월 31일과 1920년 1월 8일 이틀에 걸쳐 군자금 2,000원을 모금하였고, 이를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해줄 목적으로 1920년 1월 [[만주]] 류허현(柳河縣)[* 현 [[지린성]] 퉁화시(通化市) 류허현(柳河縣).]으로 망명하였다. 1월 중순경에 류허현에 도착한 이석채는 그곳에서 임시정부 요원인 [[노백린]]을 만나 1,000원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그는 임시정부의 외무원이 되어 국내의 민정을 시찰하고, 임시정부 요원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로 입국하였다. 1920년 2월 4, 5일경에 경성부로 돌아온 이석채는 이후 [[함경남도]] [[원산시|원산부]]로 가서 [[기선(선박)|기선]]을 타고 [[강원도]] [[강릉시|강릉군]] [[주문진읍]]에 도착하였다. 이때 박탁(朴鐸)이라는 가명으로 덕방면 두산리(현 두산동)에 거주하는 최명일(崔命一)과 삼척군 삼척면 읍상리(현 [[삼척시]] 읍상동)에 거주하는 김동석(金東錫) 등에게 임시정부 요원 지원 및 독립운동 참여를 권유하였다. 이 일로 이석채는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1920년 4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사기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다.[[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252&evntId=0034989184&evntdowngbn=Y&indpnId=0000020367&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출옥 후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48년 3월 16일 별세하였다. 200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