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2. 현역 시절[편집]
1951년 시즌 도중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첫해엔 규정타석 미달이었지만 3할 타율을 마크했고 이후 1952~1960년까지 요미우리의 1번 타자로 맹활약 했다. 치바 시게루와 당대 최고의 테이블 세터진을 구축하며 요미우리의 황금 시대를 이끌었으며 타격왕 3회, MVP 1회를 수상했다.
1961년 자유계약으로 주니치 드래곤즈에 이적했고, 2년간 선수로 뛴 후 1962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12년 간의 통산 성적은 타율 0.311, 82홈런, 482타점, 163도루.
파일:external/m.sponichi.co.jp/G20111230002338760_view.jpg
현역 시절 세이프티 번트에 상당히 능숙하여 일본 야구에 세이프티 번트를 처음으로 도입한 선구자 격 인물이며, 미국 스타일의 거친 슬라이딩과 태클, 수비수들의 얼을 빼는 주루플레이[2]를 선보이며 당시 스커트를 입은 아가씨 같은 야구라는 비아냥을 듣던 일본 야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1961년 자유계약으로 주니치 드래곤즈에 이적했고, 2년간 선수로 뛴 후 1962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12년 간의 통산 성적은 타율 0.311, 82홈런, 482타점, 163도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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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세이프티 번트에 상당히 능숙하여 일본 야구에 세이프티 번트를 처음으로 도입한 선구자 격 인물이며, 미국 스타일의 거친 슬라이딩과 태클, 수비수들의 얼을 빼는 주루플레이[2]를 선보이며 당시 스커트를 입은 아가씨 같은 야구라는 비아냥을 듣던 일본 야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3. 지도자 시절[편집]
파일:external/www.jiji.com/ynm758-jlp01253044.jpg
주니치 감독 시절
은퇴 이후 풍부한 경험과 지도력을 발휘하여 30년 가까이 프로팀 지도자로 활약하였는데 그 경력을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주니치 감독 시절
은퇴 이후 풍부한 경험과 지도력을 발휘하여 30년 가까이 프로팀 지도자로 활약하였는데 그 경력을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4. 만년[편집]
5. 에피소드[편집]
- 거인과 입단 계약을 맺을 때, 자택에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해 달라고 요구했다. 수세식 화장실이 지극히 드물었던 시대였는지라 구단 관계자는 굉장히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 카와카미 테츠하루를 일생의 라이벌로 생각하고 적대적인 의식을 가졌다고 한다. 특히 1960년 미즈하라 시게루의 후임으로 거인 감독에 취임한 카와카미가 요나미네를 전력에서 제외하여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는 단초를 제공했고 이 때문에 요나미네는 카와카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게 되었다. 주니치 감독에 취임한 1974년, 요나미네는 타도 거인, 타도 카와카미를 표방하며 시즌에 임했고 그 해 거인의 10년 연속 센트럴 리그 제패를 저지하면서 "현역 시절 우승보다 지금 주니치를 우승시킨 것이 더욱 기쁘다" 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후 1978년 코치로 거인에 복귀했지만, 1980년 시즌 종료 후 나가시마 시게오가 감독직을 내려놓자 자신도 거인에서 퇴단했는데 당시 나가시마의 퇴진에 카와카미가 영향을 발휘한 것으로 생각하여 심하게 반발하고 사표를 던졌다 한다. 그 이후로도 요나미네는 카와카미가 연관된 거인 OB회 행사엔 절대 참석하지 않을 정도로 카와카미에 대한 적대감을 유지하였다.[6] - 왕정치 특유의 친절한 팬 서비스는 요나미네의 호의로부터 비롯 되었다고 한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왕정치는 야구장에서 지저분한 고무공을 내밀며 거인 선수들에게 사인을 부탁했는데 다른 선수들은 다 무시하고 지나갔지만 요나미네 혼자만 웃으며 흔쾌히 사인을 해주었고, 이를 계기로 큰 감동을 받은 왕정치는 일본 최고의 타자로 성장한 후 팬 서비스에 정성을 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왕정치가 대선수로 성공한 후, 요나미네는 왕정치의 그 추억에 대해 "고무공 내밀던 눈 동그란 꼬맹이? 기억난다" 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요나미네가 2011년 타계하자 왕정치는 "내 인생 최초의 사인을 해준 선수이다. 그 분 덕분에 야구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며 그를 팬 서비스의 스승으로 회고하였다.
- 일본어는 일상 회화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읽고 쓰기는 거의 못하고,[7] 섬세한 표현에 서툰 부분도 있었다고 한다. 본인이 일본어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하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1] 아버지는 오키나와 현, 어머니는 히로시마 현 출신 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의 성인 요나미네는 일본 본토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오키나와 계 성씨이다.[2] 세이프티 번트로 출루한 후 다음 타자 타석 초구에 2루 도루, 2구에 3루 도루, 3구에 홈스틸을 연속으로 성공시키는 등, 당시로선 상상하지 못했던 수비수들의 허를 찌르는 주루의 대가였다.[3] 1969년 롯데 오리온즈로 팀명 변경.[4] 교타자 에노모토 키하치를 지도했다.[5] 1974년 친정팀 요미우리의 센트럴 리그 10연패를 저지하고 20년 만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일본시리즈에선 카네다 마사이치 감독이 이끌던 롯데 오리온즈에게 패퇴하였다.[6] 반면 카와카미와 전혀 관계없는 야구 행사엔 거인 유니폼을 입고 참석했다고.[7] 주니치의 그 유명한 응원가 타올라라 드래곤즈의 최초 버전이었던 1974년도판 앨범 커버는 당시 주니치 선수단들의 사인이 쓰여져 있는 형태였는데, 요나미네는 카타카나를 쓰기 힘들어했기 때문에 혼자서 영어 사인을 적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