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구 관련 인물(NPB)]] ||<-2><table align=center> [[파일:external/4.bp.blogspot.com/00%2BBBM%2B20th%2BBest%2B9%2BYonamine%2B93.jpg|width=400]] || || '''이름''' || 요나미네 카나메 (与那嶺 要, Wally Yonamine) || || '''생몰년도''' || [[1925년]] [[6월 24일]] ~ [[2011년]] [[2월 28일]] (향년 85세) || || '''국적''' || [[파일:미국 국기.svg|width=27]] [[미국]] || || '''출신지''' || [[하와이 주]] 마우이 섬 || || '''신체''' || 175cm || || '''포지션''' || [[외야수]] || || '''투타''' || [[좌투좌타]] || || '''프로입단''' || 1951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 || '''소속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51~1960) [br] [[주니치 드래곤즈]] (1961~1962) || || '''지도자''' || [[주니치 드래곤즈]] 타격 코치 (1963~1966) [br] [[치바 롯데 마린스|도쿄-롯데 오리온스]] 타격 코치 (1967~1969) [br] [[주니치 드래곤즈]] 1군 수석 코치 (1970~1971) [br]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1972~1977)''' [br]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작전·주루코치, 1군 타격코치 (1978~1979) [br] [[소프트뱅크 호크스|난카이 호크스]] 1군 수석 코치·타격 코치 (1981~1982) [br] [[세이부 라이온스]] 1군 타격 코치 (1983~1984) [br] [[닛폰햄 파이터즈]] 1군 수석 코치 (1985~1988) || ||<-6> '''1957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 || [[벳쇼 다케히코]][br]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요나미네 카나메[br]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후지타 모토시]][br]([[요미우리 자이언츠]]) || ||<-5> '''[[주니치 드래곤즈]]''' 역대 감독 || || [[미즈하라 시게루]][br] (1969 - 1971) || → || '''요나미네 카나메'''[br] (1972 - 1977) || → || 나카 도시오[br](1978 - 1980) || [목차] == 개요 == 与那嶺 要(1925.6.24~2011.2.28)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미국]] [[하와이]] 태생의 [[일본계 미국인]] 2세[* 아버지는 [[오키나와]] 현, 어머니는 [[히로시마]] 현 출신 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의 성인 요나미네는 일본 본토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오키나와]] 계 성씨이다.]로, 본명은 '''월리스 카나메 요나미네(Wallace Kaname Yonamine)''' 이며 애칭은 '''월리(Wally)'''. 원래는 [[미식축구]] 선수 출신으로 1947년 [[NFL]]의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 입단, 동양인 최초의 NFL 선수로 플레이 하였지만 부상으로 인해 미식축구를 그만두고 1950년 야구선수로 전향, [[마이너리그]] 트리플 A 팀에서 활동하였다. == 현역 시절 == 1951년 시즌 도중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첫해엔 규정타석 미달이었지만 3할 타율을 마크했고 이후 1952~1960년까지 요미우리의 1번 타자로 맹활약 했다. [[치바 시게루]]와 당대 최고의 [[테이블 세터]]진을 구축하며 요미우리의 황금 시대를 이끌었으며 타격왕 3회, MVP 1회를 수상했다. 1961년 자유계약으로 [[주니치 드래곤즈]]에 이적했고, 2년간 선수로 뛴 후 1962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12년 간의 통산 성적은 타율 0.311, 82홈런, 482타점, 163도루. [[파일:external/m.sponichi.co.jp/G20111230002338760_view.jpg|width=500]] 현역 시절 세이프티 번트에 상당히 능숙하여 일본 야구에 세이프티 번트를 처음으로 도입한 선구자 격 인물이며, 미국 스타일의 거친 슬라이딩과 태클, 수비수들의 얼을 빼는 주루플레이[* 세이프티 번트로 출루한 후 [[한도세|다음 타자 타석 초구에 2루 도루, 2구에 3루 도루, 3구에 홈스틸을 연속으로 성공시키는 등]], 당시로선 상상하지 못했던 수비수들의 허를 찌르는 주루의 대가였다.]를 선보이며 당시 '''스커트를 입은 아가씨 같은 야구'''라는 비아냥을 듣던 일본 야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 지도자 시절 == [[파일:external/www.jiji.com/ynm758-jlp01253044.jpg|width=350]]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감독 시절 은퇴 이후 풍부한 경험과 지도력을 발휘하여 30년 가까이 프로팀 지도자로 활약하였는데 그 경력을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 연도 || 소속팀 || 직책 || || 1963~1966 || [[주니치 드래곤즈]] || 1군 타격코치 || || 1967~1969 || [[치바 롯데 마린즈|도쿄 오리온즈]][* 1969년 롯데 오리온즈로 팀명 변경.] || 1군 타격코치[* 교타자 [[에노모토 키하치]]를 지도했다.] || || 1970~1971 || 주니치 드래곤즈 || 1군 수석코치 || || 1972~1977 || 주니치 드래곤즈 || 1군 감독[* 1974년 친정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의 [[센트럴 리그]] 10연패를 저지하고 20년 만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일본시리즈에선 [[카네다 마사이치]] 감독이 이끌던 [[지바 롯데 마린스|롯데 오리온즈]]에게 패퇴하였다.] || || 1978~1980 || [[요미우리 자이언츠]] || 2군 외야수비 및 주루코치, 1군 타격코치 || || 1981~1982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난카이 호크스]] || 1군 수석코치 겸 타격코치 || || 1983~1984 || [[세이부 라이온즈]] || 1군 타격코치 || || 1985~1988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닛폰햄 파이터즈]] || 1군 수석코치 || 주니치 감독 당시 오랜 기간 활약한 [[호시노 센이치]]를 구원투수로 전향시켜 1974년 세이브왕 타이틀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두 사람 모두 타도 [[요미우리 자이언츠|거인]]이라는 공통적인 목표를 가지고 활약한 결과였다. == 만년 == 1988년을 끝으로 야구계를 떠나 고향인 하와이에서 조용히 살고 있던 중 2006년 마스터즈 리그에 초청받은 것을 계기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2009년 7월 16일 [[오릭스 버팔로즈]]와 [[치바 롯데 마린즈]]의 경기 때 오릭스의 초대로 시구자로 나오는 등 80이 넘은 고령임에도 건강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94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2011년 2월 28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지병인 [[전립선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 == 에피소드 == * [[요미우리 자이언츠|거인]]과 입단 계약을 맺을 때, 자택에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해 달라고 요구했다. 수세식 화장실이 지극히 드물었던 시대였는지라 구단 관계자는 굉장히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 한때 [[도쿄]] [[롯폰기]]에서 아내와 [[진주]] 가게를 운영한 적이 있었다. 당시 롯폰기 땅값을 생각하면 요나미네가 야구선수로 얼마나 크게 성공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 * [[카와카미 테츠하루]]를 일생의 [[라이벌]]로 생각하고 적대적인 의식을 가졌다고 한다. 특히 1960년 [[미즈하라 시게루]]의 후임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거인]] 감독에 취임한 카와카미가 요나미네를 전력에서 제외하여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는 단초를 제공했고 이 때문에 요나미네는 카와카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게 되었다. 주니치 감독에 취임한 1974년, 요나미네는 '''타도 거인, 타도 카와카미'''를 표방하며 시즌에 임했고 그 해 거인의 10년 연속 [[센트럴 리그]] 제패를 저지하면서 '''"현역 시절 우승보다 지금 주니치를 우승시킨 것이 더욱 기쁘다"''' 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후 1978년 코치로 거인에 복귀했지만, 1980년 시즌 종료 후 [[나가시마 시게오]]가 감독직을 내려놓자 자신도 거인에서 퇴단했는데 당시 나가시마의 퇴진에 카와카미가 영향을 발휘한 것으로 생각하여 심하게 반발하고 사표를 던졌다 한다. 그 이후로도 요나미네는 카와카미가 연관된 거인 OB회 행사엔 절대 참석하지 않을 정도로 카와카미에 대한 적대감을 유지하였다.[* 반면 카와카미와 전혀 관계없는 야구 행사엔 거인 유니폼을 입고 참석했다고.] * [[왕정치]] 특유의 친절한 팬 서비스는 요나미네의 호의로부터 비롯 되었다고 한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왕정치는 야구장에서 지저분한 고무공을 내밀며 거인 선수들에게 사인을 부탁했는데 다른 선수들은 다 무시하고 지나갔지만 요나미네 혼자만 웃으며 흔쾌히 사인을 해주었고, 이를 계기로 큰 감동을 받은 왕정치는 일본 최고의 타자로 성장한 후 팬 서비스에 정성을 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왕정치가 대선수로 성공한 후, 요나미네는 왕정치의 그 추억에 대해 "고무공 내밀던 눈 동그란 꼬맹이? 기억난다" 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요나미네가 2011년 타계하자 왕정치는 "내 인생 최초의 사인을 해준 선수이다. 그 분 덕분에 야구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며 그를 팬 서비스의 스승으로 회고하였다. * 일본어는 일상 회화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읽고 쓰기는 거의 못하고,[* 주니치의 그 유명한 응원가 '''타올라라 드래곤즈'''의 최초 버전이었던 1974년도판 앨범 커버는 당시 주니치 선수단들의 사인이 쓰여져 있는 형태였는데, 요나미네는 [[카타카나]]를 쓰기 힘들어했기 때문에 혼자서 영어 사인을 적어놓았다(...)] 섬세한 표현에 서툰 부분도 있었다고 한다. 본인이 [[우에하라 고지|일본어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하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분류:미국의 야구 선수]][[분류:미국의 야구감독]][[분류:일본계 미국인]][[분류:1925년 출생]][[분류:2011년 사망]][[분류:하와이 주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