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의 상위 문서: 순우리말/지명
1. 강남구[편집]
2. 강동구[편집]
- 굽은다리(천호동): 두 마을을 이어주는 다리가 굽어 이 일대를 '굽은다리' 또는 '고분다리'라고 불렀다. 한자로는 '곡교리'라고 불렀다. 지하철 수도권 전철 5호선 굽은다리역의 유래가 되기도 한 지명이다. [4]
3. 강북구[편집]
- 무너미(수유동): 수유(水逾)동의 순 우리말 지명으로, 물이 넘친다는 뜻의 이름이다.
4. 강서구[편집]
- 마결(마곡동): 마곡동 일대에 있던 마을 이름으로, 삼을 많이 심었던 곳이어서 마결이라고 하였다.
- 부석이(개화동): 마을 뒷산에 바위 두개가 상하로 서로 덮쳐있었는데 그 사이로 실이 빠져나갈 만큼 공간이 떠있는 바위라는 뜻으로 '부석이', '부석이말'이라고 하였다. 현재 개화동 새마을회관 일대에 있었다.
- 허가바위(가양동): 가양동 탑산 아래 절벽에 있는 자색을 띤 구멍 뚫린 바위로서, 양천 허씨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이 이 바위에서 나왔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허가바위굴', '공암'이라고도 하였다.
- 서낭댕이(등촌동): '서낭당이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 공장말(방화동): 일제 말기에 벽돌과 옹기를 굽던 공장이 생겨 이로 인해 100여 세대가 모여 살면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 분동산(염창동): 분가루같은 백토가 나오는 산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
- 볏골(화곡동)
5. 관악구[편집]
- 당골(봉천동): 현재 보라매삼성아파트 남쪽 주변에 있던 마을로, 이 골짜기에 무당이 제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던 데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한자로 '당곡(堂谷)'이라고 하였으며, 재넘이라고도 했다. 이 주변 새주소는 '당곡 X길'로 시작한다.
- 박지궁(봉천동): 봉천중앙시장 근처에 있던 마을 이름으로, 재궁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어로 '박재궁(朴齋宮)' 또는 '박자궁'이라고도 불렸다.
- 밤골(신림동): 관악산 중턱에 있던 동네인데 옛날에 밤나무가 많아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자로 율곡(栗谷)이라고 했다.
- 복은말(신림동): 보그니말이라고도 한다. 신림동 108번지(난곡15길 30-21번) 일대로, 옛날 이 일대 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므로 복이 숨어있는 동네라 하여 이 이름이 붙었다. 한자로는 복은촌(福隱村)이라고 한다.
- 쑥고개(봉천동): 원래 숯을 굽는 고개라 해서 숯고개라 불렀는데 변해서 쑥고개가 되었다.
- 합실(신림동): 신림10동 중서북부에 있었는데 지형이 큰 조개 모양을 하고 있어 합곡(蛤谷)이라 불렀던 것이 점차 바뀐 이름이다.
6. 광진구[편집]
- 명려궁터(군자동): 군자동에 있던 마을로서, 옛날 어느 왕의 일행이 거둥하다가 마침 이곳 길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그 날 밤 동행하던 왕비가 옥동자를 낳았다고 하여 동네의 이름을 '군자동'이라 하고 이곳을 '명려궁터'로 부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7. 구로구[편집]
8. 금천구[편집]
- 박미고개(시흥동): 지금의 시흥성당 앞에 있던 고개의 이름.
9. 노원구[편집]
- 방아다리(하계동): 하계동/용동 앞들에 있던 다리이다. 두 개의 개울물이 합해지는 모양이 방아다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당고개(상계동): 수도권 전철 4호선의 당고개역이 있는 고개로서, 옛날 성황당이 있었고 또 미륵당이 있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한자명으로 당현(堂峴)이라고 하며, 이 일대를 지나는 하천의 이름도 당현천.
- 마당바위(상계동): 노원구 상계동 수락산유원지에 있는 기이하게 생긴 바위로서, 모양이 마당만큼 크고 넓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한자로 '장암'이라고 불렸는데, 서울 지하철 7호선 장암역의 역명에 차용되었다.
10. 도봉구[편집]
11. 동대문구[편집]
- 텃골(전농동): 전농동에 있던 마을로서, 전농동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며, 왕이 친히 갈던 밭인 '동적전'이 있던 곳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톳구리', '기곡'이라고도 하였다.
12. 동작구[편집]
- 검은돌(흑석동): 지금의 은로초등학교 운동장 남쪽 자리에 돌이 유난히 검은빛을 띄어 붙여진 마을 이름.
- 독막(노량진동): 지금의 동작구청 자리(노량진초교 맞은편) 있던 마을로 옹기를 굽던 가마가 두 개 있었다고 전해지며 과천현(지금의 서초구, 강남구, 과천시 등) 사람들이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1950년대 말까지 있었으나 그 후 사라졌다.
- 배나무골(사당동): 옛날 이 마을에 배나무를 많이 재배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배나무굴', '이목동(梨木洞)'이라고도 불렀다.
- 빙수골(상도동): 빈수골, 찬우물이라고도 한다. 항상 찬물이 나오는 우물이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 서달산(흑석동): 흑석동 남서쪽에 있는 산이다. 재강굴산이라고도 하는데, 돌이 많이 난다고 한다.
- 수라간(사당동): 사당동에 있던 우물로서, 예전 임금이 역로에서 수라를 들었던 우물이라고 전한다.
- 장승배기(상도동): 상도동 · 노량진동에 걸쳐 있던 곳으로서, 장승이 서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현재 서울 지하철 7호선 장승배기역 위 사거리 위에 표석을 세우고 다시 장승을 만들어 세웠다.
13. 마포구[편집]
14. 서대문구[편집]
- 가재울(북가좌동): 북가좌동에 있던 마을로서, 경티말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가재가 있고 산이 둘러싼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또한 한 고을에서 먼 곳 가장자리에 있는 마을이라는 설도 있다. 한자명으로 가좌리(加佐里)라 하며, 이계말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연희방(성외) 가좌동이었는데, 인구가 늘어나자 가좌1 · 2계로 나누었으며 다시 남가좌동 · 북가좌동이 되었다.
- 경티말(남가좌동): 남가좌동에 있던 마을로서, 정토사(淨土寺)가 있었으므로, 정토말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경티말이 되었다고 한다.
- 굴레방다리(북아현동): 북아현동 일대에 있던 다리 이름으로,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큰 소가 길마는 무악에 벗어 놓고, 굴레는 이곳에 벗어 놓고, 서강을 향하여 내려가다가 와우산에 가서 누웠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한자명으로 늑교(勒橋)라고 하였다.
15. 서초구[편집]
- 바우뫼(우면동): 범바위라는 바위가 있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정확한 위치는 우암초등학교 부근이다. 범바위는
성인화보로 유명한코리아 그라비아 사옥 뒷편에 있다. - 도구머리(방배동): 서울의 들머리(입구)에 있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정확한 위치는 도구머리공원(새우촌공원) 부근이다.
- 서리풀(서초동): 서초(瑞草)동의 순우리말. 서리풀이 무성했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방배동과 서초동 사이에는 이 이름을 본딴 서리풀공원이 있다.
- 솔배(원지동): 원지동에 있던 들로서, 예전 술바위가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 홍씨마을(내곡동): 현재 새주소 '홍씨마을길'의 근원이 되는 지명으로, 홍씨마을 어린이공원 주변에 홍씨 성의 집성촌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안골(내곡동): 내곡(內谷)동의 순 우리말 지명으로, 마을이 본 마을의 안쪽에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안말'이라고도 불렸고, 양지바른 곳에 마을이 있다고 해서 '양지말'이라고도 불렸다.
- 치골(방배동): 방배동에 있던 골짜기 이름.
16. 성동구[편집]
- 무수막(금호동): 무쇠솥, 농기구를 생산하는 대장간이 많았던 동네로, 무시막, 무쇠막이라고도 불렸다. 이것을 한문으로 수철리(水鐵里)라 불렀고 철(鐵)은 금(金)으로, 수(水)는 호(湖)로 글자가 바뀌어 금호동이 되었다.
- 선골(하왕십리동): 하왕십리동 일대에 있던 마을 이름으로, '선못'이라 불리던 연못 근처에 마을이 위치해 있어 불려진 이름이다. '선못골', '입지동'이라 불리우기도 했다.
17. 성북구[편집]
- 돌곶이(석관동): 석관동에 있던 마을로서, 인근 천장산의 한 맥이 수수팥떡이나 경단을 꽂이(꼬챙이)에 꽂아 놓은 것처럼 검은 돌이 박혀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한자로 '석관(石串)'이며, 서울 지하철 6호선 돌곶이역의 역명에 차용되었다.
18. 송파구[편집]
19. 양천구[편집]
- 칼산(신정동): 산 모양이 칼처럼 뾰족하다고 해서 칼산으로 붙여졌다.
지금은 개발로 뭉툭(?)해졌다칼이라는 이름이 억양이 좋지 않아 갈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0. 영등포구[편집]
21. 용산구[편집]
22. 은평구[편집]
- 연신내(불광동): 불광동에 있던 마을로서, 조선시대 이곳에 있었던 연서역(延曙驛)(영서역(迎曙驛)) 주변을 흐르던 연천(혹은 연서천)이라는 개천 이름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수도권 전철 3호선,서울 지하철 6호선 환승역인 연신내역의 역명에 차용되었으며, 다른 이름인 '연서' 역시 이 일대를 지나는 도로명인 '연서로'에 차용되었다.
- 독바위(불광동): 은평구 불광동 수리봉 부근에 있는 바위로서, 모양이 장독과 같이 생긴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옹암'이라고도 하였는데, 인조반정 공신들이 이곳에서 모의를 하였다고 한다. 이 바위가 있는 마을을 독바윗굴 · 독박굴 · 옹암동이라고 했으며, 현재 서울 지하철 6호선 독바위역의 역명으로 차용되었다.
- 모자리(진관동): 마을 부근에 절이 있었는데 이 절에 큰 연못이 있어 '못절'이라고 불렀으나, 절이 없어지고 연못만 남자 '못절터'로 불리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바뀐 이름이다.
23. 종로구[편집]
24. 중구[편집]
- 버티고개(신당동, 약수동): 중구 신당동 끝과 약수동에서 용산구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와 한남동에서 중구 장충단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통틀어서 버티고개 · 버터고개 · 번티고개 · 번도 · 번티〔번치(番峙)〕 · 부어터고개라 하고, 한자명으로 부어치, 벌아령이라 했으며, 약수동고개, 장충단고개라고도 하였다. 옛날에는 길이 좁고 무인지경이 되어 도둑이 많았으므로, 모양이 험악하고 마음씨가 곱지 않은 사람을 보면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이다.” 라는 농담을 하였다. 옛날에 순라꾼들이 야경을 돌면서 ‘번도!’라고 외치며 도둑을 쫓았는데, 그 말이 변하여 번티 · 번티고개라 하다가 변하여 버티고개 · 버터고개 · 부어치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대풍시장 위쪽에 있는 유명한 버티고개약수는 약수동 동명의 유래가 되었으며, 이 지명은 서울 지하철 6호선 버티고개역에 차용되었다.
- 마른내골(인현동1가): 현재 삼풍상가 서쪽에 있던 마을 이름으로, 이 지역을 흐르는 개천이 비가 오지 않은 날은 바닥이 말라붙어서 통행길로 사용되지만, 비가 조금이라도 내리면 바로 물이 불어 냇가로 변하기 때문에 '마른내'라 했고, 이근처 마을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마른냇골'이라고도 하며, 한자명으로 '건천동'(乾川洞)이라 하였다.
- 벌우물(주교동): 주교동에 있던 우물의 이름으로, 벌판 한 가운데 우물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 '평정', '벌정'이라고도 했다.
- 풀무골, 풀뭇골(순화동)
25. 중랑구[편집]
- 먹골(묵동): 묵동에 있던 마을로서, 옛날 이곳에서 먹을 만들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67] '먹굴' 또는 '묵동'으로도 불렸으며, 서울 지하철 7호선 먹골역의 역명에 차용되었다.
[1] 철원(鐵原), 송악(松岳) 또한 쇠벌, 솔벌로 같은 어원이다. [2] 이 일대를 지나는 도로인 '밤고개로'도 여기에서 따와 명명하였다.[3] 이 일대를 '학여울'이라고도 했는데, 이 이름이 수도권 전철 3호선 학여울역에 역명으로 차용되었다.[4] 다만 동네의 위치가 굽은다리역과 꽤 떨어져 있는 곳에 있다.[5] 정확히 강일동 강일리버파크 2단지 아파트 주변[6] 남평 문씨의 집성촌이며, 1970년대만 해도 마을 앞 백사장이 유명해 피서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으나, 한강정비사업으로 인해 백사장은 사라졌고, 개발제한에 묶여 조금 을씨년스럽다.[7] 신대(新垈)라고도 하는데 택지정리가 된 곳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므로 모양새가 네모반듯하였다.[8] 근처에 있는 '범머리길'에 차용된 지명이다.[9] 한자어로는 모진동으로 현재 화양동에 속한 행정동으로 지명이 사용되고 있다.[10] 1977년 서울 지하철 2호선 1차구간 계획 당시 구의역의 역명으로 차용되어 사용되었던 적이 있다.[11] 번외로, 구로구의 지명 유래 중에 아홉 노인(九老)이 이 지역에서 장수한 일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라는 유래도 있는데, 음가가 비슷하므로 아무래도 이 구루지라는 고유어에서 변형된 것으로 비정되고 있다.[12] 옛 강서로[13] 이름의 유래에 대해 다른 설이 존재하는데, '한골'에서 변형되었다는 설이다. '한'이 순 우리말로 '으뜸', '큰'과 같은 의미가 있는데, 이 마을의 규모가 꽤 컷고 역사가 오래되어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다.[14] 개봉노인정과 개봉1동 새마을금고 주변[15] 관악구 신림동과 종로구 구기동에도 같은 지명이 있다.[16] '개화천' 또는 '개봉천'으로도 불렸다.[17] 풍수지리학적으로 이 고개는 수말의 지기이기 때문에 암말을 타고 지나면 떨어져 다쳤다고 하며, 1년에 한 번씩 암말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실제로, 1980년대 초 시흥대로 확장공사 중 말뼈가 출토되기도 했다.[18] 그 밑에 있는 마을도 '성고개', '성고개말'이라고 불렀으며, 성과 같은 바위를 돌아간다는 뜻으로 '암회리', '회암리'라고도 하였다.[19] 매일 청소를 열심히 해서 깨끗한 동네로 꽤 유명했다고 한다.[20] 현재 동작구청 앞 주차장 일대[21] 또 하나의 설이 있는데, 조선 후기 이곳에 포방터(사격장)가 있어 여기서 훈련을 마친 뒤 나루를 건너기 전에 인원과 장비를 점검하였다고 하여 '점검마을'이라 한 것이 와전되었다고도 한다.[22] 2009년에 발간된 사전에 정말 등재되어 있다.#[23] 이 고개 이름 유래는 세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남쪽의 만리재과 서북쪽의 대현이라는 두 큰 고개 중간에 있는 작은 고개이므로 ‘애고개’가 ‘애오개’ 또는 아현(兒峴)이 아현(阿峴) 등으로 변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옛날 도성에서 서소문을 통하여 시체를 나가게 하였는데 아이 시체는 이 고개를 지나서 묻게 하였는데, 이 고개가 아이 시체가 넘는 고개라 하여 애고개 등으로 부르다가 애오개로 변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설은 풍수지리설로, 이수광의 지봉유 등을 참고하면 도성의 진산이 부아악(삼각산)인데 그 아이가 달아날 의사가 있으므로 서쪽에 있는 산을 모악, 남쪽의 산을 벌아현(남산), 모악에서 서남쪽의 산을 병시현이라 이름 지어 아이가 달아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그중 벌아령은 아기를 못 나가게 막는 의미이고, 병시현은 떡으로 달래어 머무르게 하는 의미로 '떡전고개'라고도 하였는데, 곧 아기를 달래는 고개이므로 아현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24]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의 그 와우산 맞다.[25] 또 하나의 설로는, 마을이 경성부로 편입되기 전 인근 일대가 모두 채소밭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인분을 비료 대신 사용했기 때문에 '똥통밭', 혹은 '분통밭'이라 부르던 것이 변해서 '똥골목'이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26] 승정원일기에는 모화관석교(慕華館石橋), 대동지지와 동국여지비고에는 혁교(革橋)로 기록되어 있다.[27] 이 근처에 있던 산은 산 전체가 돌과 바위로 이뤄져 있다고 해서 '돌산'이라고 불리웠다.[28] 이 근처에 모화관이 있었다.[29] 이 부근 마을 이름은 훗날 미정동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가 미근동으로 바뀐다[30] 중구 의주로1가까지 포함되는 지명이다.[31] 다만 구반포역 문제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맥락을 따져봐야 하는데, 현 구반포역이 위치한 반포본동(구반포)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포촌리(浦村里)라 불리던 지역이었다. 이후 일제시대에 동작리로 합쳐져 이름이 동작동 등으로 변하다가 동작동의 일부가 떨어져나와 강남구(이후 서초구가 분구됨)에 편입되면서 반포동으로 이름이 붙게 된 지역인데 조선시대부터 이미 반포로 불리기 시작한 반포 1, 2, 4동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조선 후기부터 이미 서릿개를 훈차한 蟠浦란 이름이 사라지고 훈이 변한 현재의 반포(盤浦)가 이름으로 굳은 것이 확인되기 때문에# 구반포역 문서에 있는대로 지역 주민들의 '서릿개란 이름이 이 지역에 쓰인 적이 없다'는 반발이 충분히 나올 수 있었다.[32] 또한 벌판 끝에 마을이 있어 '벌말'이라고도 하였고, 신원동의 근본이 되는 마을이라고 해서 '본촌'이라고도 하였다. 1978년 취락구조개선사업 때 대부분 성남시로 이사 가고 지금은 원주민이 반으로 줄었다고 한다.[33] 김해김씨의 집성촌이었으며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크게 패한 격전지였다.[34] 현재 양재2동 주민센터 주변이다.[35] 구전에 따르면, 남태령과 성뒤마을 사이에 성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36] 그 뒤 1935년경에는 정릉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고급요정 '청수관'이 들어서면서 ‘아리랑고개’라는 푯말을 이 고개 마루턱에 세우고 손님을 맞이했다고 한다.[37] 옛날에 마을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쓰는 물품을 보관하던 곳[38] 동국여지비고 '보현봉 곁가지 산줄기가 곧 도성의 주맥이므로 총융청에서 보토소(補土所)를 설치하고 주관해서 보축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39] 양재천, 탄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 형성된 모래섬으로 '동잠실'이라고도 불렸다.[40] 일설에 의하면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의 군대가 이 곳 일대에 돌을 옮겨 진을 쌓아 붙여진 이름이라도고 한다.[41] 풍납토성의 순 우리말은 '바람드리성'이다. 이 이름이 성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42] 고운(곰) 달빛의 내 - 곰달내 - 곰달래[43] 한자로는 곱다(고움: 古音)+달(月) = 고음월. [44] 말하자면, 음소라는 청년이 전쟁터에 나갔는데, 둥근 달이 뜨면 백제가 이긴 것이니 자신을 기다리고, 달이 지면 백제가 진 것이니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라고 했다. (...) 이에 음월이라는 여인이 달을 보앗을때, 둥근 달이었다가 먹구름이 껴서, 칠흙같은 달을 보고, 목숨을 끊어 버렸다. 그러나 나중에 둥근 달이 뜨고, 음소라는 청년이 도착했을 때,여인을 보고 "음월의 목숨이 끝났구나" 하고 슬피 울었다는다는 이야기에서 고(古: 죽음/끝) + 음월(音月) = 고음월.[45] 간첩사건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46] 계남근린공원[47] 신길동은 아니지만 가까운 곳에 이 이름을 차용한 어느 서울 지하철 9호선의 역이 있다.[48] 참고로 도야미 옆 동네인 원지막은 지금의 대림동. 지금의 대림동 일대까지 도야미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 주석을 참고용으로 붙임.[49] 만리창의 창고 규모는 진휼청에 소속된 창고가 35문, 해서 소속 3문, 호남 소속 20문 등 모두 58문이었다.[50]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일본군의 혼성여단이 만리창에 임시사령부를 설치하고 청일전쟁 수행의 주요거점으로 삼았다 한다.[51] 이곳에서 이름을 딴 법정동 신창동(新倉洞)이 있으며, 도로명으로도 새창로가 효창동에서 30여m 떨어진 곳에 있다. 다만 새창로는 신창동을 지나지 않는다.[52] 조선시대 현종이 경릉과 창릉으로 성묘하러 갈 때 백성들이 길가에서 향을 피우고 임금을 맞이했다고 전하는 데서 유래된 '향현'이라는 이름도 있다.[53] 현재는 사직터널과 성산로로 이어진 도로가 뚫려있다.[54] 2002년 서울특별시 새주소부여사업에 따라 소로 이름을 제정할 때 '피마동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55] 한자로 '성제정'이라고 하였는데, 이게 변해서 '형제정'으로 불렸다고도 한다.[56] 1960년대 이후 '개미마을'이라고도 불렸다.[57] 남이 장군이 유자광의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죽은 후 원한 때문에 터가 세다하여 이곳이 폐가가 되어 순조 때까지 채소나 지어 먹는 빈터로 남아 있었는데, 하루는 이 집터 옆에 사는 사람의 꿈에 남이장군이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자 그 사람이 장군을 위하여 원혼을 모시고 사당을 짓고 탑을 세웠다고 한다.[58] 영미다리는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군으로 귀양갈 때 그의 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이곳까지 나와서 서로 영영 이별하였다 하여 '영이별다리' 혹은 '영영건넌다리'라고도 전해진다.[59] 이와는 약간 다르게, '도깨비고개' 입구에 배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이라는 설도 존재한다[60] 왕위에 오르기 전 봉림대군일 때 이야기이다.[61] 한자어로 홍덕전이라고도 하였다.[62] 승정원일기 영조때의 기록에 의하면 이 다리의 이름이 '파자석교'로 기록되어 있어 창덕궁이 법궁이 되면서부터 돌다리로 만든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63] 구주소 서울 종로구 옥인동 47번지 일대[64] 광무 10년(1906년)에 깊이 2.4m가량 파내어 높이를 낮추고 현대식 도로를 만들어서 높이 1.5m의 방추형태 하수도를 묻어 이 일대의 하수를 통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서울시내 하수구의 시초가 되었다.[65] 1885년 한양 내에 일본인의 거류가 허용되자 일본인들이 이곳 주변에 정착하면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주둔한 적이 있다며 이 곳을 '왜장', '왜장터', '왜성대'라고 부르기도 했던 적이 있다.[66] 한자어로 '타락동'이라고 했는데, 이를 줄여서 '낙동'으로도 불렸다고 전한다.[67] 일설에는 인근 월계동 마을 가운데 있던 연못 모양이 벼루와 같아서 벼루말〔연촌(硯村)〕이라 하고, 하계동을 붓골〔필동(筆洞)〕이라 하고, 이 두 마을과 먹골을 연결하면 삼각형이 되므로 마을의 이름을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인 먹과 관련하여 지으면 이 삼각형 지역 안에서 학문이 발달하여 인재가 배출될 것이라는 예언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