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2. 설명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을 목전에 둔 1945년 3월 23일, 양 학교의 15~19세 여학생 222명과 인솔교사 18명 총합 240명이 학도대로서 오키나와 육군 병원에서 간호요원으로서 복무하게 되었다. 육군은 "1주일만 복무하면 전쟁이 승리로 끝날 것이고, 간호복무이기 때문에 죽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며 징집했지만, 실제로는 90여일 동안 고통을 당했고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당시 징집된 여학생들은 졸업이 2일 남은 학생들도 있었다. 이들 중에서도 10여 명은 오키나와 주둔 일본 육군 제32군 사령부 소속 장교들을 위한 전속 타이피스트 및 군속, 심지어는 일본군 위안부로 차출되었다. 그나마 이들은 5월말 32군 사령부가 키얀반도로 철수하기 직전에 사령부 동굴에서 동원해제되어 귀가하였다.
대개의 히메유리 학도대는 슈리 주변의 나하 육군병원의 방공호에 배치되었고, 일본군 총사령부가 있던 슈리가 함락되면서 패잔병, 피난민과 같이 섬의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일본 해군이 후퇴를 거부하고 방공호에서 전멸한 이후 육군이 섬의 남쪽의 방공호를 중심으로 흩어져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6월 18일 군부는 미군에 포위당한 채 방공호에 갇혀 있던 히메유리 학도대에게 돌연 해산명령을 내린다.
해산명령은 사실상 총탄이 빗발치는 전방에 학생들을 버린다는 선언이나 다름 없었으며, 히메유리 학도대는 약 1주일간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전쟁 사격이나 폭격이나 자살 종용 등으로 인해 사망한다. 전체 사망자의 80%가 이 1주일 동안 발생했다. 미군에 수용된 이후에도 전에 입었던 부상이 악화되거나 쇼크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최종적으로 교사와 학생 240명 중 136명 사망.
부대 해체 명령 후, 공식적으로 10명은 아라사키 해안에서 집단 자결을 명받아 자결하였으며, 또한 한 동굴에서 미군의 사격으로 3명이 사망, 3명이 중상을 입었다.
당시 징집된 여학생들은 졸업이 2일 남은 학생들도 있었다. 이들 중에서도 10여 명은 오키나와 주둔 일본 육군 제32군 사령부 소속 장교들을 위한 전속 타이피스트 및 군속, 심지어는 일본군 위안부로 차출되었다. 그나마 이들은 5월말 32군 사령부가 키얀반도로 철수하기 직전에 사령부 동굴에서 동원해제되어 귀가하였다.
대개의 히메유리 학도대는 슈리 주변의 나하 육군병원의 방공호에 배치되었고, 일본군 총사령부가 있던 슈리가 함락되면서 패잔병, 피난민과 같이 섬의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일본 해군이 후퇴를 거부하고 방공호에서 전멸한 이후 육군이 섬의 남쪽의 방공호를 중심으로 흩어져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6월 18일 군부는 미군에 포위당한 채 방공호에 갇혀 있던 히메유리 학도대에게 돌연 해산명령을 내린다.
해산명령은 사실상 총탄이 빗발치는 전방에 학생들을 버린다는 선언이나 다름 없었으며, 히메유리 학도대는 약 1주일간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전쟁 사격이나 폭격이나 자살 종용 등으로 인해 사망한다. 전체 사망자의 80%가 이 1주일 동안 발생했다. 미군에 수용된 이후에도 전에 입었던 부상이 악화되거나 쇼크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최종적으로 교사와 학생 240명 중 136명 사망.
부대 해체 명령 후, 공식적으로 10명은 아라사키 해안에서 집단 자결을 명받아 자결하였으며, 또한 한 동굴에서 미군의 사격으로 3명이 사망, 3명이 중상을 입었다.
3. 이후
전후 이들을 기리기 위한 히메유리의 탑이 건립되었으며, 이들 또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당시 생존자가 관장으로 있는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ひめゆり平和祈念資料館)이 운영 중이다.
일본 정부는 강제징집이 아닌 자원입대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나, 생존자들은 인터뷰를 통해 "군 당국에서 강요한, 사실상 강제 징집이었다"라고 회상한다. 일본군 위안부로서 학대당했다는 증언과 주장도 있으나, 일본 정부는 이 또한 부인하고 있다.
자국민을 죽음으로 몬 당시 일본 정부의 막장성을 보여주는 사건이고, 오키나와 주민에 대한 차별 등의 문제로 현재도 상당히 논란이 되고 있는 사건이다.
극우 세력들은 히메유리 학도대를 미군의 희생양인 양 미화한다.
일본 정부는 강제징집이 아닌 자원입대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나, 생존자들은 인터뷰를 통해 "군 당국에서 강요한, 사실상 강제 징집이었다"라고 회상한다. 일본군 위안부로서 학대당했다는 증언과 주장도 있으나, 일본 정부는 이 또한 부인하고 있다.
자국민을 죽음으로 몬 당시 일본 정부의 막장성을 보여주는 사건이고, 오키나와 주민에 대한 차별 등의 문제로 현재도 상당히 논란이 되고 있는 사건이다.
극우 세력들은 히메유리 학도대를 미군의 희생양인 양 미화한다.
4. 기타
- 전투로 학생, 교사, 시설을 모두 잃은 오키나와 사범학교와 오키나와 현립 제1고등여학교는, 폐교 절차도 못한 채 그대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