ひめゆり学徒隊(ひめゆりがくとたい) [[파일:external/img02.ti-da.net/%E3%81%B2%E3%82%81%E3%82%86%E3%82%8A1.jpg]] [목차] == 개요 == 1944년 12월, [[오키나와]]현의 오키나와 사범학교 여자부와 오키나와 현립 제1[[고등여학교]]의 교사, 학생으로 구성된 부대의 [[간호]]훈련을 위해 만들어진 [[일본 육군]] 소속 [[여학생]] [[학병|학도대]]이다. 오키나와 사범학교 여자부와 현립 제1[[고등여학교]]는 사실상 시설과 교사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학교를 같이 일컫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제 1고등여학교의 교지명인 '오토히메(乙姫)'와 오키나와 여자사범학교의 교지명 '시로유리(白百合)'를 합쳐서 '히메유리'라는 명칭을 썼다. 히메유리 외에도 비슷한 성격의 8개 학도대가 있었다고 한다. == 설명 ==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을 목전에 둔 [[1945년]] 3월 23일, 양 학교의 15~19세 여학생 222명과 인솔교사 18명 총합 240명이 학도대로서 오키나와 [[육군]] 병원에서 [[간호]]요원으로서 복무하게 되었다. 육군은 "1주일만 복무하면 전쟁이 승리로 끝날 것이고, 간호복무이기 때문에 죽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며 징집했지만, 실제로는 90여일 동안 고통을 당했고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당시 징집된 여학생들은 [[졸업]]이 2일 남은 학생들도 있었다. 이들 중에서도 10여 명은 [[오키나와]] 주둔 [[일본 육군]] 제32군 사령부 소속 [[장교]]들을 위한 전속 [[타자기|타이피스트]] 및 [[군무원|군속]], 심지어는 [[일본군 위안부]]로 차출되었다. 그나마 이들은 5월말 32군 사령부가 키얀반도로 철수하기 직전에 사령부 동굴에서 동원해제되어 귀가하였다. 대개의 히메유리 학도대는 슈리 주변의 나하 육군병원의 방공호에 배치되었고, [[일본군]] 총사령부가 있던 슈리가 함락되면서 패잔병, 피난민과 같이 섬의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일본 해군]]이 후퇴를 거부하고 방공호에서 전멸한 이후 육군이 섬의 남쪽의 방공호를 중심으로 흩어져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6월 18일 군부는 [[미군]]에 포위당한 채 방공호에 갇혀 있던 히메유리 학도대에게 돌연 해산명령을 내린다. 해산명령은 사실상 총탄이 빗발치는 전방에 학생들을 버린다는 선언이나 다름 없었으며, 히메유리 학도대는 약 1주일간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전쟁 사격이나 [[폭격]]이나 자살 종용 등으로 인해 사망한다. 전체 사망자의 80%가 이 1주일 동안 발생했다. 미군에 수용된 이후에도 전에 입었던 부상이 악화되거나 쇼크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최종적으로 교사와 학생 240명 중 136명 사망. 부대 해체 명령 후, '''공식적'''으로 10명은 아라사키 해안에서 집단 자결을 명받아 자결하였으며, 또한 한 동굴에서 [[미군]]의 사격으로 3명이 사망, 3명이 중상을 입었다. == 이후 == 전후 이들을 기리기 위한 히메유리의 탑이 건립되었으며, 이들 또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당시 생존자가 관장으로 있는 [[http://www.himeyuri.or.jp/JP/top.html|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ひめゆり平和祈念資料館)]]이 운영 중이다. [[일본 정부]]는 강제징집이 아닌 자원입대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나, 생존자들은 인터뷰를 통해 "군 당국에서 강요한, 사실상 강제 징집이었다"라고 회상한다. [[일본군 위안부]]로서 학대당했다는 증언과 주장도 있으나, 일본 정부는 이 또한 부인하고 있다. 자국민을 죽음으로 몬 당시 일본 정부의 막장성을 보여주는 사건이고, 오키나와 주민에 대한 차별 등의 문제로 현재도 상당히 논란이 되고 있는 사건이다. [[극우]] 세력들은 히메유리 학도대를 미군의 희생양인 양 미화한다. == 기타 == * [[The Boom]]의 리더이자 보컬이었던 미야자와 카즈후미는 오키나와를 여행하던 중 한 '히메유리 학도대'의 생존자 할머니를 만나게 되고, 이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후 [[島唄|시마우타(島唄)]][* 직역하면 섬노래라는 뜻으로, 본래 [[아마미 군도]]의 전통 민요를 이르는 말이다.]를 작곡하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島唄]] 문서 참조. * 일본 [[넷 우익]]들은 시마우타를 [[2차대전]] 당시 미군의 잔혹함을 비난하는 노래라고 호도하고 있다. 이 노래 가사 중 "반복되는 슬픔은 섬을 건너는 파도와 같이 / 사탕수수 밑에서 영원히 안녕"이라는 부분에서 볼 수 있듯, 외부의 침략에 지속적으로 시달리는 희생에 대해 노래하고 있는데 이것을 미군이 와서 사탕수수 밭에서 몰살시킨 것으로 곡해하고 있다.(...) * 한편 오키나와 사범학교는 여자부 말고도 남자부 역시 현내의 [[구제전문학교]], 중학교 학생들과 함께 [[일본 육군]]에 '철혈근황대(鐵血謹皇隊)'라는 학도병대로 징집되었다. 공식적으로 오키나와 사범학교에서는 386명 중 224명, 철혈근황대 전체에서는 1,780명 중 890명이 전사하였다. *전투로 학생, 교사, 시설을 모두 잃은 오키나와 사범학교와 오키나와 현립 제1[[고등여학교]]는, 폐교 절차도 못한 채 그대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분류:제2차 세계 대전]][[분류:태평양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