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울산 병영전투
第一次 蔚山兵營戰鬪 | ||
시기
| 1592년 5월 30일 ~ 5월 31일
(음력 1592년 4월 20일 ~ 4월21일) | |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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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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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조선 파일:조선 어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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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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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약 28,000명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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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 병영일대 조선군 전멸
| 약 50~100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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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 병영성 · 울산도호부 함락, 울산방어선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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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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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전이 일어난 울산 병영성 일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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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전이 벌어졌던 당시 울산병영성의 현재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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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전 당시 치열한 전투가 오갔던 병영성 동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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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2.1. 전개
1592년 5월 30일,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 28,000명은 부산진과 기장을 함락시키고 서생포 만호진을 함락후 울산도호부로 진군하였다. 당시 회야강과 외황강 방어선에 주둔하였던 조선군은 회야강 전투에서 패배하며 일본군에 의하여 제압당하였고, 이에 관군은 병영으로 후퇴하였다. 하지만 병영의 상황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는데, 경상좌병사 이각은 아예 울산 경상좌도 병영을 버리고 밀양으로 도망갔다. 이로 인하여 당시 울산 지역의 방어는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울산부사 또한 도망감에 따라 지휘체계가 무너졌다.
그러나 김해성 전투 직후 울산 지역에서도 일부 의병이 일어났고, 울산 지역의 아전과 관군 병사들, 그리고 백성들은 약사천과 동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목책과 해자를 정비한 후 전투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은 태화강을 넘어서 5월 30일, 울산병영 평야에 도착하였다.
오전중에 병영성 남쪽에서 조선군과 일본군이 한 차례 기마전이 벌어졌는데, 조선군이 패배하여 물러났다. 일본군은 병영성의 동쪽평야에서 또다시 기마전을 벌였고 이 또한 조선군의 참패로 끝났다. 그래서 일본군의 사기는 올라갔고 날이 저물자, 동천강을 도하하여 조선군 진영을 습격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울산 병영성 내부로 후퇴하였다. 이후 언양지역도 함략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592년 5월 31일, 해가 뜨자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은 병영성을 공격하였고, 이를 버티지 못한 조선 관군과 의병들은 무너져내렸고, 이후 북문과 서문으로 도망갔으며, 울산병영과 울산도호부는 일본군에 의해서 함락되었다.
그러나 김해성 전투 직후 울산 지역에서도 일부 의병이 일어났고, 울산 지역의 아전과 관군 병사들, 그리고 백성들은 약사천과 동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목책과 해자를 정비한 후 전투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은 태화강을 넘어서 5월 30일, 울산병영 평야에 도착하였다.
오전중에 병영성 남쪽에서 조선군과 일본군이 한 차례 기마전이 벌어졌는데, 조선군이 패배하여 물러났다. 일본군은 병영성의 동쪽평야에서 또다시 기마전을 벌였고 이 또한 조선군의 참패로 끝났다. 그래서 일본군의 사기는 올라갔고 날이 저물자, 동천강을 도하하여 조선군 진영을 습격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울산 병영성 내부로 후퇴하였다. 이후 언양지역도 함략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592년 5월 31일, 해가 뜨자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은 병영성을 공격하였고, 이를 버티지 못한 조선 관군과 의병들은 무너져내렸고, 이후 북문과 서문으로 도망갔으며, 울산병영과 울산도호부는 일본군에 의해서 함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