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임진왜란/전투]][[분류:공성전]] [include(틀:임진왜란 전투 목록)] ||<-3><tablewidth=400><tablealign=right><bgcolor=#C0C0FF><:> {{{+1 '''제1차 울산 병영전투'''[br]第一次 蔚山兵營戰鬪}}} || ||<:><bgcolor=#C0C0FF> '''시기''' ||<-2>1592년 5월 30일 ~ 5월 31일 [br](음력 1592년 4월 20일 ~ 4월21일) || ||<:><bgcolor=#C0C0FF> '''장소''' ||<-2>조선 경상도 울산 [[울산병영성]], 약사천 평야 일대, [[동천]][[강]] 남쪽과 동쪽평야 || ||<:><bgcolor=#C0C0FF> '''원인''' ||<-2>[[가토 기요마사]]의 [[울산|울산도호부]]와 울산병영 침략 || ||<:><width=10%><bgcolor=#C0C0FF> '''교전국''' ||<width=20%>{{{+1 조선}}} [[파일:조선 어기.svg|width=50]] ||<width=20%>{{{+1 일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width=40]] || ||<:><bgcolor=#C0C0FF> '''지휘관''' ||<^|1>불명 ||'''[[가토 기요마사]]''' || ||<bgcolor=#C0C0FF><:> '''병력''' || [[울산]]지역 [[의병]]과 울산도호부 · 병영관군 약 150~400여명 ||약 28,000명 이상|| ||<bgcolor=#C0C0FF><:> '''피해''' ||병영일대 조선군 전멸 ||약 50~100여 명 |||| ||<:><bgcolor=#C0C0FF> '''결과''' ||<-2>병영성 · 울산도호부 함락, 울산방어선 붕괴|| ||<:><bgcolor=#C0C0FF> '''영향''' ||<-2>[[가토 기요마사]]의 [[경주시|경주]],[[경상도]] 진공 및 저지실패 || [목차] [clearfix] ||<tablealign=right><tablewidth=400>{{{#!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 장소=울산 경상좌도 병영성지, 높이=390px, 너비=100%)]}}}|| ||<bgcolor=#FFFFFF> {{{#000000 공성전이 일어난 [[울산 병영성]] 일대의 모습.}}} || ||<tablealign=right><tablewidth=400>{{{#!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 장소=울산 병영1동, 높이=390px, 너비=100%)]}}}|| ||<bgcolor=#FFFFFF> {{{#000000 기마전이 일어난 [[울산 병영성]] 남쪽 평야 일대의 모습.}}}[* 현재는 주택들과 아파트, 그리고 종합운동장이 들어섰으나, 당시에는 이 일대가 논과 밭으로 된 평야지대였다. 또한 약사천과 동천강이 해자역할을 해주어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다.] || [clearfix] ||<tablealign=center>[[파일:울산병영성 항공사진.jpg]] || || [[공성전]]이 벌어졌던 당시 울산병영성의 현재모습 || ||<tablealign=center>[[파일:울산병영성 동문 정면도.jpg]] || || [[공성전]] 당시 치열한 전투가 오갔던 병영성 동문의 모습 || == 개요 == 1592년 5월 30일 부터 5월 31일까지 울산 병영성과 일대 평야에서 벌어진 [[기마전]]과 [[수성전]]이다. 이 전투의 패배로 울산 방어선과 [[경주시|경주]]가 무너졌다. == 상세 == 1592년 5월 30일부터 5월 31일까지 진행된 전투로, [[화왕산성 전투]]와 비슷하게도 [[수성전]]과 [[기마전]]이 함께 이루어졌던 얼마안되는 전투이다. === 전개 === 1592년 5월 30일,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 28,000명은 부산진과 기장을 함락시키고 [[서생포]] 만호진을 함락후 울산도호부로 진군하였다. 당시 [[회야강]]과 [[외황강]] 방어선에 주둔하였던 조선군은 [[회야강 전투]]에서 패배하며 일본군에 의하여 제압당하였고, 이에 관군은 병영으로 후퇴하였다. 하지만 병영의 상황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는데, 경상좌병사 [[이각]]은 아예 울산 경상좌도 병영을 버리고 밀양으로 도망갔다. 이로 인하여 당시 울산 지역의 방어는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울산부사 또한 도망감에 따라 지휘체계가 무너졌다. 그러나 [[김해성 전투]] 직후 울산 지역에서도 일부 의병이 일어났고, 울산 지역의 아전과 관군 병사들, 그리고 백성들은 약사천과 동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목책과 해자를 정비한 후 전투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은 태화강을 넘어서 5월 30일, 울산병영 평야에 도착하였다. 오전중에 병영성 남쪽에서 조선군과 일본군이 한 차례 [[기마전]]이 벌어졌는데, 조선군이 패배하여 물러났다. 일본군은 병영성의 동쪽평야에서 또다시 기마전을 벌였고 이 또한 조선군의 참패로 끝났다. 그래서 일본군의 사기는 올라갔고 날이 저물자, 동천강을 도하하여 조선군 진영을 습격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울산 병영성]] 내부로 후퇴하였다. 이후 [[언양]]지역도 함략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592년 5월 31일, 해가 뜨자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은 병영성을 공격하였고, 이를 버티지 못한 조선 관군과 의병들은 무너져내렸고, 이후 북문과 서문으로 도망갔으며, 울산병영과 울산도호부는 일본군에 의해서 함락되었다. === 결과 ===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조선군은 울산방어선과 경상도 동쪽 지역의 방어가 어렵게 되었다. 다만 그 이전에 [[회야강 전투]]에서 어느정도 시간을 벌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후 [[경주읍성]]이 무너지고, 경상도지역의 방어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또한 울산 지역이 일본군의 주둔 중심지가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울산읍성과 [[울산 병영성]]의 성돌을 이용하여 일본군이 [[울산왜성]]을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