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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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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역사
1617년(광해군 9년)에 경희궁 창건 당시에 착공하여 1620년 연간에 완공했다.
이후 여기서 왕과 신하가 함께 조회하는 조참, 과거합격자들의 시상, 외국 사신 접견 등 많은 행사를 거행했다. 1829년(순조 29년) 경희궁에 대화재가 일어나 내전 주요 건물들이 불탔으나 숭정문은 숭정전과 함께 다행히 피해를 면했다.
1860년대 경복궁 중건 때 대부분의 경희궁 건물이 철거되고 공사 자재로 쓰였다. 경희궁에는 건물 10여 채 정도만 남았는데 숭정전과 숭정문도 그 중 하나였다. 경희궁 영역에는 창고와 양잠소가 들어섰는데 이 때 세운 곡식 창고를 숭정문 밖에 두었다.# 그나마도 1889년(고종 26년)에 숭정문의 일곽이 화재를 당해 곧 재건했는데#, 1900년 경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사진엔 숭정문과 행각이 없는 것을 보아 이마저도 그 사이에 철거한 듯 하다.
일제강점기에는 숭정전과 숭정문 언저리에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京城中學校)[1]가 들어섰다. 8.15 광복 이후에도 경성중학교가 서울 중, 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 학교 자체는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서울시가 '경희궁지 복원과 시민 사적 공원 조성 계획'를 세워 서울고등학교를 지금의 서초구 효령로로 이전시킨 뒤 1985년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하여 1991년 복원했고, 1993년과 1994년에는 행각 공사까지 완료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후 여기서 왕과 신하가 함께 조회하는 조참, 과거합격자들의 시상, 외국 사신 접견 등 많은 행사를 거행했다. 1829년(순조 29년) 경희궁에 대화재가 일어나 내전 주요 건물들이 불탔으나 숭정문은 숭정전과 함께 다행히 피해를 면했다.
1860년대 경복궁 중건 때 대부분의 경희궁 건물이 철거되고 공사 자재로 쓰였다. 경희궁에는 건물 10여 채 정도만 남았는데 숭정전과 숭정문도 그 중 하나였다. 경희궁 영역에는 창고와 양잠소가 들어섰는데 이 때 세운 곡식 창고를 숭정문 밖에 두었다.# 그나마도 1889년(고종 26년)에 숭정문의 일곽이 화재를 당해 곧 재건했는데#, 1900년 경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사진엔 숭정문과 행각이 없는 것을 보아 이마저도 그 사이에 철거한 듯 하다.
일제강점기에는 숭정전과 숭정문 언저리에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京城中學校)[1]가 들어섰다. 8.15 광복 이후에도 경성중학교가 서울 중, 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 학교 자체는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서울시가 '경희궁지 복원과 시민 사적 공원 조성 계획'를 세워 서울고등학교를 지금의 서초구 효령로로 이전시킨 뒤 1985년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하여 1991년 복원했고, 1993년과 1994년에는 행각 공사까지 완료하여 오늘에 이른다.
3. 특징
- 원형으로 된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올린 뒤 그 위에 창방과 평방을 놓아 공포를 받치게 하였다. 공포는 다포 양식으로 하였고 어칸에는 기둥과 기둥 사이의 중간에 3개의 공포를 두었으며 이를 주간포라 부른다. 협칸에는 각각 2개의 주간포를 얹었으며,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하였고, 문 위는 풍형 홍살을 꾸며놓았다. 단청은 단초머리의 모로단청[5]으로 하였으며 문짝은 나무 판으로 중앙 열 3칸에 달았다. 그리고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양상바름한 뒤, 2개의 취두와 4개의 용두, 그리고 동, 서 양쪽의 추녀마루 위에 5개의 잡상과 각 처마 끝에 토수를 놓았다.
- 숭정문의 좌우에는 각각 정면 8칸, 측면 2칸의 행각이 뻗쳐 있고, 가장자리 쪽 2칸은 다른 칸보다 폭이 좁다. 행각은 직각으로 북으로 꺾여 숭정전 좌, 우의 행각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원래는 방과 월랑이 혼합된 형태의 행각으로, 예문관 · 무예청 · 선전관청 ·향실 등의 관청과 숭정전을 지키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으나 현재는 벽체없이 복도로만 뚫려있다. 그리고 행각 사방마다 문이 있어 통행을 자유롭게 하였는데, 남행각엔 바로 이 숭정문, 동행각과 서행각엔 여춘문과 의추문, 그리고 북쪽 행각에는 편전인 자정전의 정문 자정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