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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봉황동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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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봉황동 유적
金海 鳳凰洞 遺蹟 Archaeological Site in Bonghwang-dong, Gimhae |
1. 개요
2. 상세
김해 봉황동 유적 항공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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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회현리 패총
2.2. 봉황대
2.2.1. 여의와 황세 이야기
봉황대에는 출여의와 황세의 사랑이야기가 전해진다.
가락국 제 9대 겸지왕 때 남대정동에 사는 출정승과 북대사동(대성동)에 사는 황정승은 자식이 태어나면 혼인을 시키기로 하였다. 황정승은 아들 황세를 낳고 출정승은 딸 여의를 낳았다.그러나 황정승의 집안이 어려워 지자 출정승은 마음이 변하여서 자신은 아들을 낳았다고 속였다. 여의는 남자 옷을 입고 서당에 다녔으나 티가 났다. 황세는 이를 수상히 여기고 여의에게 황세바위에 올라가 오줌멀리가기 대결을 하자고 하였다.여의는 바위 뒤로 돌아다 마침 그곳에 있던 삼대로 오줌을 누어 정체가 탄로나는 것을 피했다.여름 어느 날 여의는 거북내(해반천)에서 목욕을 하다 상류쪽에서 황세와 마주치게 되었다. 더이상 여의는 숨길 수 없어 편지를 물에 거슬러 띄워 황세에게 이 사실을 고하였고 이후 둘은 연인이 되었다. 출정승도 결국 결혼을 허락하였다.얼마 후 신라군이 가락군을 침범해 오자 겸지왕은 군사를 모집했는데, 황세는 자진해서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왕은 황세에게 '하늘장수'라는 칭호를 주었고 자신의 딸인 유민공주와 결혼을 시켜 부마로 삼고자 하였다.이미 약혼한 사이였던 황세는 결혼을 할 수 없다고 하지만 왕은 출정승을 불러 파혼 할 것을 요구하였고 결국 황세는 유민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여의의 부모는 다른 곳으로 시집가기를 권유하였으나 거절하였고, 여의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기댈 곳이 없던 여의는 슬픔이 젖어 결국 24살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였다.황세는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였고 여의를 잊지못하여 결국 마음의 병을 얻게되어 죽음을 맞이한다.사람들은 둘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여의와 황세가 놀던 개라암에 작은 바위를 얹었는데 서남쪽의 것은 황세바위, 동남쪽의 것은 여의바위라 불렀다고 한다.한편 홀로 남게된 유민공주는 황세와 여의의 영혼을 기리며 평생을 살겠다고 하여 경운도사와 함께 임호산에 들어가게 된다.
위의 이유로 임호산을 유민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75년에 여의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여의각을 설치하였다. 봉황동 황세바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3. 바깥고리
4. 사적 제2호
패총은 조개껍질과 생활 쓰레기가 함께 버려져 쌓여 있는 곳으로, ‘조개더미’라고도 하며 당시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장소이다.
봉황대 언덕 근처에 서로 시기가 다른 회현리 조개더미와 다양한 무덤유적이 있다.
회현리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토기, 뼈·뿔도구, 석기, 가락바퀴(방추차), 불탄쌀(탄화미), 중국 화폐인 화천, 동물뼈 들이 나왔다. 토기는 적갈색이나 회청색을 띠며, 사슴뿔이나 뼈를 가공해 만든 칼자루가 많다. 불탄쌀은 고대의 쌀과 농경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화천은 중국 신(新)나라의 왕망이 기원전 14년에 만든 화폐로 유적이 형성된 연대를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며 중국과의 왕래도 짐작하게 한다.
조개더미의 동쪽에서 고인돌, 항아리에 뼈를 넣었던 독무덤(옹관묘), 집터가 발견되었다. 무덤들은 청동기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김해 봉황동 유적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1∼4세기경 생활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