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규(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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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
사망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김덕규는 1874년 11월 13일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과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 병곡면 송천동교회 장로 정규하 등이 주동한 1919년 3월 18일 영해면 성내동에서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3천여 명의 시위군중을 이끌면서 주재소를 에워싸고 일경으로 하여금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런데 일본인 경찰부장이 시위대의 태극기를 빼앗으려 하자, 김덕규 등은 일본인 경찰부장을 비롯한 일경 3명을 응징하는 한편 주재소의 기구들을 파괴한 뒤 면사무소와 우편소 등 일제기관을 침입했다. 그는 군중과 함께 이를 저지하려는 영덕경찰서의 일본인 서장을 비롯하여 일경 5명을 여관에 감금시킨 채 만세시위를 강행하였고, 이러한 상황은 다음날인 3월 19일에도 이어졌다.

3월 19일 아침에 시위규모는 더욱 늘어나 영해읍을 진동시켰다. 이에 포항에서 일본 헌병이 출동하였으나 시위대의 위세에 눌려 손을 쓰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대구의 일본군 보병 80연대의 병력이 출동하여 총격을 가함으로써 시위군중은 현장에서 8명의 순국자를 내고 해산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騷擾)·공무집행 방해·상해(傷害)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영덕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4년 2월 1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김덕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