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영덕군 출신 인물]][[분류:1874년 출생]][[분류:1944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 ||<-2><tablealign=right><tablewidth=410><tablebordercolor=#0047a0><tablebgcolor=#fff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운동가|{{{#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br] {{{#ffffff '''{{{+1 김덕규}}}'''[br]'''金德圭'''}}}}}} || ||<|2><width=80><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74년]] [[11월 13일]]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 || ||<|2><color=#fff> '''사망''' ||[[1944년]] [[2월 11일]] || ||[[경상북도]] [[영덕군]] ||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김덕규는 1874년 11월 13일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과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독립운동가)|권태원]], 병곡면 송천동교회 장로 [[정규하]] 등이 주동한 1919년 3월 18일 영해면 성내동에서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3천여 명의 시위군중을 이끌면서 주재소를 에워싸고 일경으로 하여금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런데 일본인 경찰부장이 시위대의 태극기를 빼앗으려 하자, 김덕규 등은 일본인 경찰부장을 비롯한 일경 3명을 응징하는 한편 주재소의 기구들을 파괴한 뒤 면사무소와 우편소 등 일제기관을 침입했다. 그는 군중과 함께 이를 저지하려는 영덕경찰서의 일본인 서장을 비롯하여 일경 5명을 여관에 감금시킨 채 만세시위를 강행하였고, 이러한 상황은 다음날인 3월 19일에도 이어졌다. 3월 19일 아침에 시위규모는 더욱 늘어나 영해읍을 진동시켰다. 이에 포항에서 일본 헌병이 출동하였으나 시위대의 위세에 눌려 손을 쓰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대구의 일본군 보병 80연대의 병력이 출동하여 총격을 가함으로써 시위군중은 현장에서 8명의 순국자를 내고 해산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騷擾)·공무집행 방해·상해(傷害)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영덕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4년 2월 1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김덕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