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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편집]
2. 이름[편집]
3. 역사[편집]
1395년(태조 4년)에 경복궁을 창건할 때는 없었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 동, 서, 남쪽에만 궁문을 두었고, 북쪽 궁성은 목책으로 되어있었다. 그러다 1433년(세종 15년)에 비로소 제대로 된 북문을 지었다.#
하지만 문을 세웠어도 이름은 짓지 않았다. 이후 1475년(성종 6년)에 예문관대제학 서거정이 신무문(神武門)이란 이름을 지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270여 년간 방치되었다. 1865년(고종 2년)에 중건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으나 곧 복구되었고 이후 큰 변화 없이 오늘에 이른다.
하지만 문을 세웠어도 이름은 짓지 않았다. 이후 1475년(성종 6년)에 예문관대제학 서거정이 신무문(神武門)이란 이름을 지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270여 년간 방치되었다. 1865년(고종 2년)에 중건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으나 곧 복구되었고 이후 큰 변화 없이 오늘에 이른다.
무너진 신무문 성벽 |
4. 용도[편집]
평소에는 닫혀있었다.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북쪽에 있는데다 풍수지리적으로 북쪽이 음(陰)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비상시나 나라에 변고가 생겼을 때, 또는 왕이 비밀리에 궁 밖을 나갈 때 주로 사용되었다.
조선 중 · 후기에는 문 밖에 신하들의 공훈을 기록한 회맹단(會盟壇)이 있어 임금이 신하들과 회맹제[1]에 참석할 때 이용했다.### 여기서,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이 재건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신무문을 이용했나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아마 문루는 없지만 남아있던 석축을 통로로 활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에 참배할 때에도 신무문을 사용했다.##
1860년대에 경복궁이 중건된 이후 신무문 밖은 경복궁의 후원이 되었다. 신무문은 후원을 오가는 문으로 기능했다.
조선 중 · 후기에는 문 밖에 신하들의 공훈을 기록한 회맹단(會盟壇)이 있어 임금이 신하들과 회맹제[1]에 참석할 때 이용했다.### 여기서,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이 재건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신무문을 이용했나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아마 문루는 없지만 남아있던 석축을 통로로 활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에 참배할 때에도 신무문을 사용했다.##
1860년대에 경복궁이 중건된 이후 신무문 밖은 경복궁의 후원이 되었다. 신무문은 후원을 오가는 문으로 기능했다.
5. 특징[편집]
- 통여장의 바로 밑 부분 석축에 석누조 2개가 달려 있다. 이는 비가 올 때 빗물이 빨리 빠져나가게 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