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경복궁)] [목차] ||<table width=662> [[파일:external/news.donga.com/6984601.1.jpg|width=100%]] || == 소개 == {{{+1 景福宮 神武門}}} [[경복궁]]의 북문(北門)이다. 단, 정북(正北)이 아닌 서북쪽으로 치우쳐있다. [[현판]]의 글씨는 [[고종(대한제국)|고종]] 때 관료인 이현직(李顯稷. 1797 ~ ?)이 썼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0209017_002|#]] == 이름 == ‘신무’는 ‘신령스러운(神) 현무(武)’라는 뜻이다. [[사신|4신]] 중 [[현무]]가 북쪽을 나타내는 [[동물]]이므로, [[경복궁]]의 북쪽 문에 ‘무(武)’ 자를 넣은 것이다. [[http://blog.daum.net/gobang53/8905758|#]] == 역사 == 1395년([[태조(조선)|태조]] 4년)에 [[경복궁]]을 창건할 때는 없었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 동, 서, 남쪽에만 궁문을 두었고, 북쪽 궁성은 목책으로 되어있었다. 그러다 1433년([[세종(조선)|세종]] 15년)에 비로소 제대로 된 북문을 지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507025_001|#]] 하지만 문을 세웠어도 이름은 짓지 않았다. 이후 1475년([[성종(조선)|성종]] 6년)에 예문관대제학 [[서거정]]이 신무문(神武門)이란 이름을 지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0608023_007|#]] 1592년([[선조(조선)|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270여 년간 방치되었다. 1865년([[고종(대한제국)|고종]] 2년)에 중건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으나 곧 복구되었고 이후 큰 변화 없이 오늘에 이른다. ||<table width=662> [[파일:일제강점기 신무문.png|width=100%]] || || 무너진 신무문 성벽 || == 용도 == 평소에는 닫혀있었다.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북쪽에 있는데다 [[풍수지리]]적으로 북쪽이 음(陰)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비상시나 나라에 변고가 생겼을 때, 또는 [[왕]]이 비밀리에 [[궁]] 밖을 나갈 때 주로 사용되었다. 조선 중 · 후기에는 문 밖에 [[신하]]들의 공훈을 기록한 회맹단(會盟壇)이 있어 임금이 신하들과 회맹제[* 會盟祭. 공신들의 충성을 다짐하는 모임.]에 참석할 때 이용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0110019_001|#]][[http://sillok.history.go.kr/id/kna_13710028_002|#]][[http://sillok.history.go.kr/id/kua_10407017_001|#]] 여기서,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이 재건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신무문을 이용했나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아마 문루는 없지만 남아있던 석축을 통로로 활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인 [[칠궁#s-2|육상궁]]에 참배할 때에도 신무문을 사용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0407017_001|#]][[http://sillok.history.go.kr/id/kua_13901001_003|#]] [[1860년대]]에 [[경복궁]]이 중건된 이후 신무문 밖은 경복궁의 [[정원|후원]]이 되었다. 신무문은 후원을 오가는 문으로 기능했다. == 특징 == ● [[경복궁]]의 동문인 [[경복궁 건춘문|건춘문]] 및 서문인 [[경복궁 영추문|영추문]]과 구조가 같다. 단, 육축의 높이와 폭이 1자 반[* 약 45cm.] 정도 작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신무문(神武門)|#]] * [[아치]]형 [[문]]을 낸 석축 위에 단층짜리 문루(門樓)를 올렸다. 문루 4면의 가장자리 앞에는 [[벽돌]]로 쌓은 통여장이 놓여있다.[[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anmun2014&logNo=220865736742&parentCategoryNo=&categoryNo=21&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List|#]] * 통여장의 바로 밑 부분 석축에 석누조 2개가 달려 있다. 이는 비가 올 때 빗물이 빨리 빠져나가게 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총 6칸이다.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전부 양성바름을 했고 그 위에 취두와 [[용두]], [[잡상]]을 올렸으며, [[추녀]] 끝에는 토수를 끼웠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공포(동음이의어)#s-2|공포]]는 이익공이다. 공포 사이마다 화반을 놓았으며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했다. * 문루의 내부는 전부 한 공간으로 트여있다. 가운데칸 [[천장]]은 구조가 다 드러나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가장자리 쪽 들보 위는 우물반자로 마감하였다. 문루의 바닥은 전부 [[벽돌|전돌]]을 깔았으나 가운데 칸만 [[마루]]를 깔았다. * [[아치]]형 [[문]]은 겉에만 아치를 구성하고 내부의 [[천장]]은 반자로 덮어 놓은 모습이다. 반자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다. 문짝은 붉은색 [[나무]][[판]]이며 문짝 위에는 문둔테를 두었다.[[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anmun2014&logNo=220865736742&parentCategoryNo=&categoryNo=21&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List|#]] * [[경복궁]] 안쪽 부분의 석축 양쪽에 문루로 올라갈 수 있는 [[암석|돌]] [[계단]]을 두었다. 계단에 [[난간]]은 설치하지 않았다. 계단과 문루 사이의 통여장 가운데에는 [[벽돌|전돌]]을 쌓은 [[문]]을 두었다.[[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anmun2014&logNo=220865736742&parentCategoryNo=&categoryNo=21&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List|#]] == 여담 == * 1519년([[중종(조선)|중종]] 14년) 11월에 일어난 [[기묘사화]]가 시작된 곳이다. 중종은 한 밤중에 승지들도 모르게 홍경주, [[김전]], [[남곤]], [[심정]] 등 훈구 대신들을 불러 신무문으로 들어오게 했고, 훈구 대신들은 비밀 회의를 열어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을 [[숙청]]하기로 했다. 그래서 기묘사화를 ‘신무의 난’, ‘북문지화(北門之禍)’라고도 한다. * 1896년([[건양]] 원년) 2월에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아관파천|러시아 공사관으로 갈 때]] 신무문을 통해 [[경복궁]]을 빠져나갔다.[* [[경복궁 영추문|영추문]]이었다고도 한다.] * 1954년에 [[경복궁]]이 일반에 개방될 때 신무문도 같이 개방되었다.[[https://ko.wikipedia.org/wiki/신무문#cite_note-10|#]]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군부대가 신무문 안쪽에 주둔하면서 폐쇄되었다. [[1990년대]]에 군부대는 이전했지만 이후로도 근처에 [[청와대]]가 있어 보안 상의 이유로 닫혀있다가 2007년 9월 29일 [[경복궁/건축물#s-3.6|건청궁]] 복원 공사 완료에 맞추어 45년 만에 일반에 개방되었다. 이후로는 관광객들이 청와대 인증샷을 찍을 때 오가는 곳이 되었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복궁 영추문, version=9)] [[분류:경복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