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삼국시대]]의 전투 == ||<-3><tablealign=right><table width=400><#C0C0FF><:> {{{+1 '''독성산성전투''' [br] 禿城山城戰鬪}}} || ||<:><#C0C0FF> '''시기''' ||<-2>548년 || ||<:><#C0C0FF> '''장소''' ||<-2>[include(틀:지도, 장소=독산성, 높이=200, 너비=100%)][br][[독산성]] (현재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일대.) || ||<:><#C0C0FF> '''원인''' ||<-2>[[나제동맹]]에 대한 [[안라국]]의 도생(圖生). || ||<:><width=10%><#C0C0FF> '''교전국''' ||<width=20%>{{{+1 [[고구려|고구려]]·[[동예]] 연합군}}} ||<width=20%>{{{+1 신라·백제 연합}}} || ||<:><|4><width=10%><#C0C0FF> '''지휘관''' ||<^|4>[[양원왕]][br]그 외 미상 ||<#e7e7e7>{{{+1 [[백제|백제 왕조]]}}} [[파일:external/s24.postimg.org/K_001.jpg|width=50]] || ||[[성왕(백제)|성왕]] || ||<#e7e7e7>{{{+1 [[신라|신라 왕조]]}}} [[파일:신라기.png|width=50]] || ||[[진흥왕]] [br] 주진(朱珍) 혹은 주령(珠玲) [br] 구리지†[* 인물의 이름은 삼국사기에도 나오나 독산성 전투 참전 내용은 [[화랑세기]]에만 등장.] [br] 그 외 미상 || ||<|2><#C0C0FF><:> '''병력''' ||<|2>6,000여 명 ||'''백제군'''[br]병력 규모 불명 || ||'''신라군'''[br]3,000여 명 || ||<#C0C0FF><:>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 ||<:><#C0C0FF> '''결과''' ||<-2>[[나제동맹]] 재확인, [[안라국]]은 백제에 종속. || ||<:><#C0C0FF> '''영향''' ||<-2>'''551년 고구려, 한강 유역 상실.''' || === 개요 === [[삼국시대]] 548년에 [[독산성]]에서 일어난 전투. 백제와 신라 양측에 고립당한 가야와 일본이 고구려를 사주해 백제를 공격하게 했으나, 나제동맹에 따른 신라군의 신속한 원군 파병으로 연합군이 고구려군을 대파한다. 곧 깨질 나제동맹이 아직은 굳건함을 알 수 있었으며, 속사정을 알아보면 이후 삼국시대의 판도에도 꽤 영향을 미친 전투. === 전개 === [[6세기]]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장수왕]] 시대부터 시작된 남하정책을 방어하기 위해 서로 [[나제동맹]]을 맺어둔 상태에서, 두 나라의 가운데에 있는 [[가야]] 소국들을 두고는 서로 파워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고구려라는 강적 때문에 가야 쪽으로 대대적인 군사동원은 서로 자제하고 있었지만 [[지증왕]](智證王), [[법흥왕]](法興王) 시대를 거치면서 신라가 점점 강해지면서 한때 가야의 필두였던 [[금관국]]을 완전히 흡수하는 등 조금씩 우위를 차지하고, 남은 가야의 소국들은 멸망을 피하기 위해 신라에도 교섭을 시도하고, 백제와는 두 차례 [[사비회의]]를 열었지만 끝내 결렬되었다. 남은 가야 소국들 중 비교적 주도적인 위치였던 [[안라국]][*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은 백제도 신라도 교섭의 가능성이 없자 가야로서 살아남기 위해 멀리 [[고구려]]와 손을 잡았고, 이에 호응한 고구려군이 이미 이 시대에는 고구려의 속국화된 [[동예]]인들을 대거 동원해서 백제의 북방을 공격한다. 나제동맹 백년간 늘 그랬듯 고구려가 백제로 쳐들어오자 성왕은 신라에 원군을 요청, 신라는 주진(朱珍)에게 3천의 병사를 주어 보냈고 결국 고구려군은 신라-백제 동맹군에게 대패한다.[*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사다함]]의 아버지인 구리지가 신라군으로 종군했다가 전사했다는 내용이 더 있다.] 이후 따로 기록은 없지만 더 이상 도와줄 후원자가 없는 안라국은 [[관산성 전투]](554년) 후 신라에 항복하게 된다. 고구려는 이 전투의 타격이 컸는지 3년 뒤 나제동맹군의 대대적인 침략을 방어하지 못하고,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차지하고 백여년간 지배한 지금의 경기도부터 강원도까지 [[한강]] 유역을 죄다 백제와 신라에 내주고 전성기를 마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 새로 얻은 한강 유역을 두고 곧 백제와 신라가 서로 싸우게 된다. [[관산성 전투]] 문서 참고. === 이모저모 === * 《[[일본서기]]》[[긴메이 덴노|흠명기]]에 마진성(馬津城) 전투가 언급된다. > '''마진성(馬津城)전투【정월 신축에 고구려가 군사를 이끌고 마진성을 포위하였다.】'''에서 사로잡은 포로가 ‘[[안라국]]과 [[임나일본부|일본부]]가 (고구려를) 불러들여 (백제를) 정벌하기를 권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 >《[[일본서기]]》 권제19 [[긴메이 덴노|흠명기]] 9년 4월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ns.k_0032_0100_0020_0010#self|##]] 근데 이 전투가 일어난 시기가 [[삼국사기]]에서 독산성 전투가 일어난 시기와 미묘하게 겹친다. 548년 정월 신축일에 [[고구려]]의 군대가 백제의 마진성을 포위 공격했다는 기록인데 삼국사기에는 548년 정월에 고구려가 [[예]]와 손을 잡고 독산성을 쳤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 따라서 마진성 전투와 독산성 전투가 같은 전투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 [[임진왜란]]의 전투 == [include(틀:임진왜란 전투 목록)] 1593년 1월 13일(음력 1952년 12월 11일) 위 전투와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조선군과 일본군의 전투. [[이치 전투]] 승리로 호남을 지키는 데 성공한 [[권율]]이 조명 연합군의 남진에 호응하기 위해, 근왕병을 모집하여 북상하다가 독산성에서 [[경기도]]의 일본군을 만나 벌인 전투이다. 독산성 내에 우물이 없음을 안 일본군이 포위 후 성으로 들어가는 물을 단수하며 지구전을 펼치자, [[권율]] 장군이 세마대지[* 독산성 가장 위에 있는 누각]에서 쌀을 말들에게 부어 물이 있음을 알렸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삼천명의 일본군이 죽은 [[골짜기]]에는 '''삼천병마골'''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이후 세마쌀이 [[오산시]]의 특산물이 되었다. 이 전투의 승리 이후 권율은 [[행주산성]]에 입성, 남하하는 조명연합군에 호응해 일본군이 주둔 중이던 한양을 공격할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가 패하면서 전황은 급격히 역전, 도리어 일본군의 공격을 받는 신세가 된다. 이후의 자세한 내용은 [[행주 대첩]] 참조. 결국 독산성 전투는 임진왜란 3대첩인 행주 대첩의 예고편이 되는 전투였던 셈으로, 이 전투의 승리가 없었다면 행주대첩의 승리도 없었을 것이다. [[https://youtu.be/p5D_PrYm0Bc|독산성 전투 설명 영상(8분부터 시작)]] [[분류:삼국시대]][[분류:임진왜란/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