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국시대의 전투
독성산성전투
禿城山城戰鬪 | ||
시기
| 5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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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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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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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신라·백제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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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양원왕
그 외 미상 | |
병력
| 6,000여 명
| 백제군
병력 규모 불명 |
신라군
3,000여 명 |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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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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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 551년 고구려, 한강 유역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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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개요
1.2. 전개
6세기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장수왕 시대부터 시작된 남하정책을 방어하기 위해 서로 나제동맹을 맺어둔 상태에서, 두 나라의 가운데에 있는 가야 소국들을 두고는 서로 파워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고구려라는 강적 때문에 가야 쪽으로 대대적인 군사동원은 서로 자제하고 있었지만 지증왕(智證王), 법흥왕(法興王) 시대를 거치면서 신라가 점점 강해지면서 한때 가야의 필두였던 금관국을 완전히 흡수하는 등 조금씩 우위를 차지하고, 남은 가야의 소국들은 멸망을 피하기 위해 신라에도 교섭을 시도하고, 백제와는 두 차례 사비회의를 열었지만 끝내 결렬되었다. 남은 가야 소국들 중 비교적 주도적인 위치였던 안라국[3]은 백제도 신라도 교섭의 가능성이 없자 가야로서 살아남기 위해 멀리 고구려와 손을 잡았고, 이에 호응한 고구려군이 이미 이 시대에는 고구려의 속국화된 동예인들을 대거 동원해서 백제의 북방을 공격한다.
나제동맹 백년간 늘 그랬듯 고구려가 백제로 쳐들어오자 성왕은 신라에 원군을 요청, 신라는 주진(朱珍)에게 3천의 병사를 주어 보냈고 결국 고구려군은 신라-백제 동맹군에게 대패한다.[4] 이후 따로 기록은 없지만 더 이상 도와줄 후원자가 없는 안라국은 관산성 전투(554년) 후 신라에 항복하게 된다.
고구려는 이 전투의 타격이 컸는지 3년 뒤 나제동맹군의 대대적인 침략을 방어하지 못하고,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차지하고 백여년간 지배한 지금의 경기도부터 강원도까지 한강 유역을 죄다 백제와 신라에 내주고 전성기를 마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 새로 얻은 한강 유역을 두고 곧 백제와 신라가 서로 싸우게 된다. 관산성 전투 문서 참고.
나제동맹 백년간 늘 그랬듯 고구려가 백제로 쳐들어오자 성왕은 신라에 원군을 요청, 신라는 주진(朱珍)에게 3천의 병사를 주어 보냈고 결국 고구려군은 신라-백제 동맹군에게 대패한다.[4] 이후 따로 기록은 없지만 더 이상 도와줄 후원자가 없는 안라국은 관산성 전투(554년) 후 신라에 항복하게 된다.
고구려는 이 전투의 타격이 컸는지 3년 뒤 나제동맹군의 대대적인 침략을 방어하지 못하고,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차지하고 백여년간 지배한 지금의 경기도부터 강원도까지 한강 유역을 죄다 백제와 신라에 내주고 전성기를 마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 새로 얻은 한강 유역을 두고 곧 백제와 신라가 서로 싸우게 된다. 관산성 전투 문서 참고.
1.3. 이모저모
2. 임진왜란의 전투
1593년 1월 13일(음력 1952년 12월 11일) 위 전투와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조선군과 일본군의 전투. 이치 전투 승리로 호남을 지키는 데 성공한 권율이 조명 연합군의 남진에 호응하기 위해, 근왕병을 모집하여 북상하다가 독산성에서 경기도의 일본군을 만나 벌인 전투이다.
독산성 내에 우물이 없음을 안 일본군이 포위 후 성으로 들어가는 물을 단수하며 지구전을 펼치자, 권율 장군이 세마대지[5]에서 쌀을 말들에게 부어 물이 있음을 알렸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삼천명의 일본군이 죽은 골짜기에는 삼천병마골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이후 세마쌀이 오산시의 특산물이 되었다.
이 전투의 승리 이후 권율은 행주산성에 입성, 남하하는 조명연합군에 호응해 일본군이 주둔 중이던 한양을 공격할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가 패하면서 전황은 급격히 역전, 도리어 일본군의 공격을 받는 신세가 된다. 이후의 자세한 내용은 행주 대첩 참조. 결국 독산성 전투는 임진왜란 3대첩인 행주 대첩의 예고편이 되는 전투였던 셈으로, 이 전투의 승리가 없었다면 행주대첩의 승리도 없었을 것이다.
독산성 전투 설명 영상(8분부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