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2. 평가
종합적으로 본다면 본인 스스로의 통치는 물론, 후임자에 대한 조치 및 배려도 충실한 모범적인 권력 승계 및 발전 시기라고 보면 된다. 이런 모범적인 국가 운영이 가능했던 이유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은 각 황제들의 공통 사항을 들 수가 있다.
- 전 황제의 양자로 들어와서 황제가 됐다.
- 전원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황제다.
- 일반 대중들이 문제 있는 황제로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1명 정도의 예외를 제외한 공통점도 많다.
- 네르바를 제외하면 자신의 통치 철학을 실현하기 충분한 시간을 얻었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제외하면 아들이 없다.[2]
- 네르바를 제외하면 후임 황제를 담당할 사람에 대한 교육을 충실하게 실행했다.
단, 계승과정을 살펴보면 매끄럽지만은 않은데, 네르바가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한 것은 근위대에 의해 유폐당해 강제로 정해진 것이라는 주장이 학계의 대세이며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양자로 후계자가 되었다는 근거가 자신의 주장 이외에는 전무해 트라야누스의 중신 4명을 죽인 후에야 제위를 굳힐 수 있었다. 이후의 계승은 상대적으로 평화롭지만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1순위 후계자가 아닌 대타였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처조카이자 사위라 사실상 혈연계승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양자결연을 통한 원만한 계승과는 꽤 거리가 있기도 하다.
3. 옥의 티
세상에 완벽이라는게 존재할 수 없다시피 로마 제국 쇠퇴의 원인은 다름아닌 오현제 시기부터 쌓여왔다.
내적으로 자잘한 여러 문제들이 있기는 했지만 제일 큰 문제는 외부의 적, 즉 게르만 또한 엄청나게 성장하던 시기였다는 것.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뉴브 강 이북의 다키아왕국을 멸망시키며 게르만족을 약화시키긴 했지만 애초에 게르만 족 자체가 한 곳에 전부 모인 것도 아니고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 넓게 퍼져있었던 만큼 이 승전 하나로 게르만 족 전체에게 영향력을 끼쳤다고 보긴 힘들다. 오히려 이 승리를 제외하면 로마는 대대적으로 게르만족과 충돌하지 않고 내실을 다지는데 집중했고, 이 시간동안 게르만 족은 (로마 제국의 표현에 따르면 '먼 게르만 족'과 '가까운 게르만족'들을 불문하고)서로 전쟁과 통합을 거듭하며 강병을 육성함과 동시에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는 다른 시기도 아닌, 오현제 통치시기의 최후의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때 터졌다. 내적으로는 강병을 기름과 동시에 세력이 커졌고 외적으로는 로마에게 효과적으로 맞서는 법을 고려하면서 전술을 발전시켜 로마 제국 방어선의 허점들을 공략하는 식으로 로마 제국을 밀어붙였다. 로마는 결국 변하지 않은 수비 방식으로는 게르만족을 효율적으로 막을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했고 차라리 하나로 뭉쳐 국경 밖에서 그들과 교전을 펼치는 식으로 소모전양상으로 흘러가게 둘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이렇게 전선을 늘리면서 직접 다뉴브 강 전선까지 향했다가 그곳에서 병사하고 만다. 이전 오현제들 대부분이 로마 제국 내에서 타계한 것과 달리 국외에서 죽었으며 이후로 재임한 황제들은 이전까지에 비해 단순한 자연사나 병사만이 아닌, 전사,암살,의문사 당하는 횟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오현제 시기와 3세기의 위기 사이의 70여년 간, 노예 공급이 감소하던 사회 구조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군대 개편과 방어선 재구축 등을 바탕으로 3세기의 위기 당시 게르만족에게 급속도로 털리는 상황은 유능한 황제였다면 최소화시킬 수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70여년도 일부 황제들의 통치 시기를 제외하고는 내전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다만 그렇다고 오현제들을 외세를 무시했다며 뭐라하기도 힘든게, 이들이 로마의 내실을 다진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 당시엔 게르만족이 그렇게 똘똘뭉쳐 내려올것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애초에 네르바는 재위기간이 짧아 뭐라 따지기도 힘들었고 트라야누스는 당장 직면한 위협인 다키아를 멸망시키고 군사적 확장과 토목, 복지사업을 진행시키는데 전념하는게 한계였으며 하드리아누스는 급진적인 성장을 추구하던 트라야누스의 방향과 반대로 제국을 순행하며 향후의 위협에 대비해 착실히 내실을 다졌고 타지에서 사망한 장본인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가 되자마자 파르티아 문제, 안토니누스의 역병, 마르코만니 전쟁들에 대처하느라 갖은 고생을 해야 했다. 즉 이들은 일을 아예 안한게 아니라 해야할 일이 너무 많아서 '북방 게르만 족이 뭉치면 위협적일수 있다.'라는 작은 가능성까지 일일히 살펴볼 정도의 여력이 안되었던 것이라 뭐라 따지긴 힘들었다. 굳이 따지면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세 당시 개혁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말그대로 너무 조용히 흘러갔던 치세를 비판했으면 비판했다.
내적으로 자잘한 여러 문제들이 있기는 했지만 제일 큰 문제는 외부의 적, 즉 게르만 또한 엄청나게 성장하던 시기였다는 것.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뉴브 강 이북의 다키아왕국을 멸망시키며 게르만족을 약화시키긴 했지만 애초에 게르만 족 자체가 한 곳에 전부 모인 것도 아니고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 넓게 퍼져있었던 만큼 이 승전 하나로 게르만 족 전체에게 영향력을 끼쳤다고 보긴 힘들다. 오히려 이 승리를 제외하면 로마는 대대적으로 게르만족과 충돌하지 않고 내실을 다지는데 집중했고, 이 시간동안 게르만 족은 (로마 제국의 표현에 따르면 '먼 게르만 족'과 '가까운 게르만족'들을 불문하고)서로 전쟁과 통합을 거듭하며 강병을 육성함과 동시에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는 다른 시기도 아닌, 오현제 통치시기의 최후의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때 터졌다. 내적으로는 강병을 기름과 동시에 세력이 커졌고 외적으로는 로마에게 효과적으로 맞서는 법을 고려하면서 전술을 발전시켜 로마 제국 방어선의 허점들을 공략하는 식으로 로마 제국을 밀어붙였다. 로마는 결국 변하지 않은 수비 방식으로는 게르만족을 효율적으로 막을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했고 차라리 하나로 뭉쳐 국경 밖에서 그들과 교전을 펼치는 식으로 소모전양상으로 흘러가게 둘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이렇게 전선을 늘리면서 직접 다뉴브 강 전선까지 향했다가 그곳에서 병사하고 만다. 이전 오현제들 대부분이 로마 제국 내에서 타계한 것과 달리 국외에서 죽었으며 이후로 재임한 황제들은 이전까지에 비해 단순한 자연사나 병사만이 아닌, 전사,암살,의문사 당하는 횟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오현제 시기와 3세기의 위기 사이의 70여년 간, 노예 공급이 감소하던 사회 구조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군대 개편과 방어선 재구축 등을 바탕으로 3세기의 위기 당시 게르만족에게 급속도로 털리는 상황은 유능한 황제였다면 최소화시킬 수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70여년도 일부 황제들의 통치 시기를 제외하고는 내전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다만 그렇다고 오현제들을 외세를 무시했다며 뭐라하기도 힘든게, 이들이 로마의 내실을 다진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 당시엔 게르만족이 그렇게 똘똘뭉쳐 내려올것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애초에 네르바는 재위기간이 짧아 뭐라 따지기도 힘들었고 트라야누스는 당장 직면한 위협인 다키아를 멸망시키고 군사적 확장과 토목, 복지사업을 진행시키는데 전념하는게 한계였으며 하드리아누스는 급진적인 성장을 추구하던 트라야누스의 방향과 반대로 제국을 순행하며 향후의 위협에 대비해 착실히 내실을 다졌고 타지에서 사망한 장본인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가 되자마자 파르티아 문제, 안토니누스의 역병, 마르코만니 전쟁들에 대처하느라 갖은 고생을 해야 했다. 즉 이들은 일을 아예 안한게 아니라 해야할 일이 너무 많아서 '북방 게르만 족이 뭉치면 위협적일수 있다.'라는 작은 가능성까지 일일히 살펴볼 정도의 여력이 안되었던 것이라 뭐라 따지긴 힘들었다. 굳이 따지면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세 당시 개혁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말그대로 너무 조용히 흘러갔던 치세를 비판했으면 비판했다.
[1] 각 오현제가 전 황제의 양자로 들어와서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아우렐리우스의 후임자로 문제의 콤모두스가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단순히 아버지로서의 정이 아니라, 아우렐리우스로선 정당한 친자 계승자인 콤모두스를 배제하고 다른 양자를 들여서 계승하는게 불가능했기 때문. [2] 각 오현제가 전 황제의 양자로 들어와서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아우렐리우스의 후임자로 문제의 콤모두스가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단순히 아버지로서의 정이 아니라, 아우렐리우스로선 정당한 친자 계승자인 콤모두스를 배제하고 다른 양자를 들여서 계승하는게 불가능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