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후고 마이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
| ||||||||||||||||||||
이름
| 후고 마이슬
(Hugo Meisl) |
생년월일
| |
사망년월일
| |
국적
| |
출신지
| 말레쇼프[2]
|
포지션
|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
|
신체조건
| 불명
|
등번호
| -[4]
|
소속팀
| 비엔나 크리켓 축구 클럽 (1895-1903)
|
감독
|
1. 생애[5]
1.1. 선수, 심판 생활
1.2. 감독 생활
마이슬의 축구에 대한 열정은 갈수록 높아졌고 그 열정은 비토리오 포초, 허버트 채프먼 등과 친구 관계로 승화되었다. 그들은 유럽을 대표하는 축구계의 명감독으로 전부 이름을 남긴 동시에 라이벌이었다.
오스트리아 대표팀의 초대 감독이 된 마이슬은 1차 대전이 벌어지자 이손초 전선에서 복무했다. 참전 이후 1919년 다시 오스트리아의 전임 감독에 취임하면서 분더팀의 전설을 써내려갔다.
당시 축구계에서는 동유럽 쪽의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를 묶어 다뉴브 학파라 불렀는데 마이슬은 선수들의 활력과 볼의 소유, 두터운 패스길을 중시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가 마이슬 체제의 오스트리아 대표팀 기간에서 최고 전성기였고 14경기에서 무패 행진을 펼치면서 54득점, 18실점의 전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우승의 기대를 모았던 월드컵에선 포초와의 라이벌전에서 패하며 오스트리아는 4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마이슬은 1937년,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무덤은 현재 비엔나 중부 공동 묘역에 위치해있다.
오스트리아 대표팀의 초대 감독이 된 마이슬은 1차 대전이 벌어지자 이손초 전선에서 복무했다. 참전 이후 1919년 다시 오스트리아의 전임 감독에 취임하면서 분더팀의 전설을 써내려갔다.
당시 축구계에서는 동유럽 쪽의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를 묶어 다뉴브 학파라 불렀는데 마이슬은 선수들의 활력과 볼의 소유, 두터운 패스길을 중시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가 마이슬 체제의 오스트리아 대표팀 기간에서 최고 전성기였고 14경기에서 무패 행진을 펼치면서 54득점, 18실점의 전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우승의 기대를 모았던 월드컵에선 포초와의 라이벌전에서 패하며 오스트리아는 4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마이슬은 1937년,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무덤은 현재 비엔나 중부 공동 묘역에 위치해있다.
2. 전술 스타일 & 평가
3. 뒷이야기
- 1929년 수술을 받은 이후, 마이슬은 거동이 불편한 관계로 지팡이를 짚고 다니게 되었는데 나중에 분더팀으로까지 불리며 오스트리아가 잘 나가게 되자 이 지팡이가 마이슬의 상징이 되었다.
- 동생 빌리 마이슬은 스포츠 기자로 일했는데, 형 후고의 서포터로 형의 전술과 업적을 종종 기사로 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