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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ㆍ대청국통상조약(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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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전통적으로 한반도의 국가들은 전 근대 시대에 중화 질서 속에서 중국 대륙의 국가와 사대 관계를 유지했다. 조선 왕조는 명나라와 그 후 청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및 서양 국가들과 근대적 국제 관계를 유지하는 이중적 형식의 국제 관계를 맺었다. 이와 같은 이중적 관계는 전통적 국제 관계에서 근대적 국제관계로 나가는 과도기적 단계의 국제 관계였고, 근대적 국제 관계로의 완전한 이행은 사대 관계를 단절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조선과 청나라의 국교가 단절되었다. 이로써 병자호란 이후 이어져왔던 종속 관계가 공식적으로 파기되었다. 그리하여 조선과 청나라는 새로운 조약을 맺을 필요가 있었다. 조선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청나라에게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조약을 체결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한편 러시아와 일본 열강의 압력, 자국 상인 보호 문제 등에 직면하자 청나라로서는 조약 체결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98년 8월 청나라는 대한제국과의 조약 체결을 결정하고, 대한제국의 사신이 북경(北京)에 와서 자국의 체면을 손상하기 전에 먼저 한국에 사신을 파견하겠다는 방침 하에 의약전권대신(議約全權大臣) 서수붕(徐壽朋)을 대한제국에 파견하였다. 한양에 도착한 서수붕은 1899년 2월 1일 경운궁 함녕전에서 고종 황제에게 국서를 올리고 전권 위임장을 제출하였다. ‘대청국 대황제는 대한국 대황제에게’로 시작되는 이 국서는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청나라는 조선을 자주 독립국으로 확인했으므로 서로의 밀접한 관계를 위해 서수붕을 한국주차흠차대신(韓國駐箚欽差大臣)으로 파견한다는 내용이었다.
청나라 전권 대신 서수붕과 한국 전권 대신 박제순(朴齊純)은 1899년 2월부터 8월까지 약 6개월 간 8차례 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대한제국과 청나라 사이에 1899년 한청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
한청통상조약은 조선이 1882년 미국과 체결한 조약과 비교해 볼 때 동등할 정도로 대등한 조약이었고 근대적 조약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조약의 명칭과 양국과 국가 원수에 대한 호칭에서 대등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영사 재판권, 관세 규정, 최혜국 조항 등의 조항에서 조미 통상 조약과 같은 수준의 쌍무적인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이 점에서 한청통상조약은 조선이 1882년 청나라와 체결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 비교해 볼 때 대등한 조약이고 근대적 성격의 조약이라 할 수 있다. 기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은 조약으로서가 아니라 '무역장정'이란 형식으로 체결된 것 자체가 종속관계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가령 장정은 전문에서 종속관계를 명시하고, 조선 국왕과 청나라의 북양 대신을 동격으로 규정하며, 영사 재판권을 초월하는 재판 관할권을 청나라에 부여하고 있다. 반면에 한청통상조약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서 보이는 종속적 규정을 조금도 포함하지 않고, 쌍무적인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청통상조약은 대한제국과 청이 대등한 관계를 수립하는 근대적 성격의 조약이고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1) 한청통상조약은 청일전쟁 후, 무조약 관계에 있던 대한제국과 청나라의 관계를 새로 정립시킨 조약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과 청나라는 수교 국가가 되었다.
(2) 한청통상조약은 대등조약으로서 종전의 조선-청나라 사이의 종속 관계를 부인하고 청나라와 동등한 대한제국의 지위를 규정한 조약이다.
(3) 한청통상조약은 대한제국이 오랫동안 지속되던 중국 중심의 계단식 국제 질서, 사대 조공 질서에서 벗어나 수평적인 근대적 국제 질서로 진입하고, 한편으로 근대적 국제 관계를 다른 한편으로 전통적 국제 관계를 맺던 이중적 국제 관계에서 탈피해 근대적 국제 관계로 이행을 규정한 조약이다.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조선과 청나라의 국교가 단절되었다. 이로써 병자호란 이후 이어져왔던 종속 관계가 공식적으로 파기되었다. 그리하여 조선과 청나라는 새로운 조약을 맺을 필요가 있었다. 조선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청나라에게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조약을 체결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한편 러시아와 일본 열강의 압력, 자국 상인 보호 문제 등에 직면하자 청나라로서는 조약 체결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98년 8월 청나라는 대한제국과의 조약 체결을 결정하고, 대한제국의 사신이 북경(北京)에 와서 자국의 체면을 손상하기 전에 먼저 한국에 사신을 파견하겠다는 방침 하에 의약전권대신(議約全權大臣) 서수붕(徐壽朋)을 대한제국에 파견하였다. 한양에 도착한 서수붕은 1899년 2월 1일 경운궁 함녕전에서 고종 황제에게 국서를 올리고 전권 위임장을 제출하였다. ‘대청국 대황제는 대한국 대황제에게’로 시작되는 이 국서는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청나라는 조선을 자주 독립국으로 확인했으므로 서로의 밀접한 관계를 위해 서수붕을 한국주차흠차대신(韓國駐箚欽差大臣)으로 파견한다는 내용이었다.
청나라 전권 대신 서수붕과 한국 전권 대신 박제순(朴齊純)은 1899년 2월부터 8월까지 약 6개월 간 8차례 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대한제국과 청나라 사이에 1899년 한청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
한청통상조약은 조선이 1882년 미국과 체결한 조약과 비교해 볼 때 동등할 정도로 대등한 조약이었고 근대적 조약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조약의 명칭과 양국과 국가 원수에 대한 호칭에서 대등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영사 재판권, 관세 규정, 최혜국 조항 등의 조항에서 조미 통상 조약과 같은 수준의 쌍무적인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이 점에서 한청통상조약은 조선이 1882년 청나라와 체결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 비교해 볼 때 대등한 조약이고 근대적 성격의 조약이라 할 수 있다. 기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은 조약으로서가 아니라 '무역장정'이란 형식으로 체결된 것 자체가 종속관계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가령 장정은 전문에서 종속관계를 명시하고, 조선 국왕과 청나라의 북양 대신을 동격으로 규정하며, 영사 재판권을 초월하는 재판 관할권을 청나라에 부여하고 있다. 반면에 한청통상조약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서 보이는 종속적 규정을 조금도 포함하지 않고, 쌍무적인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청통상조약은 대한제국과 청이 대등한 관계를 수립하는 근대적 성격의 조약이고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1) 한청통상조약은 청일전쟁 후, 무조약 관계에 있던 대한제국과 청나라의 관계를 새로 정립시킨 조약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과 청나라는 수교 국가가 되었다.
(2) 한청통상조약은 대등조약으로서 종전의 조선-청나라 사이의 종속 관계를 부인하고 청나라와 동등한 대한제국의 지위를 규정한 조약이다.
(3) 한청통상조약은 대한제국이 오랫동안 지속되던 중국 중심의 계단식 국제 질서, 사대 조공 질서에서 벗어나 수평적인 근대적 국제 질서로 진입하고, 한편으로 근대적 국제 관계를 다른 한편으로 전통적 국제 관계를 맺던 이중적 국제 관계에서 탈피해 근대적 국제 관계로 이행을 규정한 조약이다.
3. 내용
<tablebgcolor="#EDEDED>대한국(大韓國)과 대청국(大淸國)은 우호를 돈독히 하고 피차 인민을 돌보려고 절실히 원한다. 이러므로 대한국 대황제의 특파 전권 대신 종2품 의정부찬정 외부대신(全權大臣從二品議政府贊政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과 대청국 대황제의 특파 전권 대신 2품함 태복시 경(全權大臣二品銜太僕寺卿) 서수붕(徐壽朋)은 각각 받들고 온 전권 위임의 증빙 문건을 상호 교열(較閱)하니 모두 타당하므로 통상 약관을 다음과 같이 맺는다.
제1관 앞으로 대한국과 대청국은 영원히 우호를 다지며 양국 상인과 인민이 피차 교거(僑居)하는 경우에는 모두 온전히 보호와 우대의 이익을 얻는다. 다른 나라가 공평치 못하고 경멸을 당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 통지하면 모두 서로 도와야 하며 중간에서 잘 조처하여 두터운 우의를 보인다. 제2관 이번에 통상 우호 조약을 맺은 뒤로부터 양국은 서로 병권 대신(秉權大臣)을 파견하여 피차 수도에 주재시키고 아울러 통상 항구에 영사 등의 관원을 설립하는 데 모두 편의를 들어줄 수 있다. 이러한 관원이 본 지방 관원과 교섭 왕래할 때에는 모두 품급에 상당하는 예로 대한다. 양국의 병권 대신과 영사 등 관원은 각종 특전을 향유하며 피차 서로 최혜국 관원과 다름이 없이 대우한다. 영사관(領事官)은 주재국의 비준 문빙(文憑)을 가지고 와야만 일을 볼 수 있다. 영사관 인원의 왕래 및 특별 문서 송달 등의 일은 모두 트집을 잡아 지체시킬 수 없다. 다만 파견하는 영사 등 관원은 정식 관원이어야 하며 상인에게 겸임시킬 수 없고 무역을 겸해서 할 수도 없다. 각 항구에 아직 영사관을 두지 못하여 혹 다른 나라 영사에게 대신 겸하게 하는 경우에도 상인에게 겸임시킬 수 없다. 양국이 파견한 영사관이 일의 처리를 잘못하는 경우에는 수도에 주재하는 공사(公使)에게 통지하여 소환하고 교체시킬 수 있다. 제3관 한국의 상인과 그 상선(商船)이 중국의 통상 항구에 가서 무역할 때에는 납부해야 할 입출항 화물세와 선세 및 일체의 각종 수수료를 모두 중국의 해관 장정(海關章程)에 의하여 최혜국 상인에게 징수하는 세금과 같이 한다. 중국의 상인과 그 상선이 한국의 통상 항구가 무역할 때에 납부해야 하는 입출항 화물세와 선세 및 일체 각종 수수료를 역시 모두 한국의 해관 장정에 의하여 최혜국 상인에게 징수하는 세금과 같이 한다. 양국이 이미 개항한 항구는 모두 피차 상인이 가서 무역할 수 있으며 그 일체의 장정과 세칙은 모두 최혜국과 맺은 장정과 세칙에 의하여 같이 한다. 제4관
제5관
제6관 중국은 전부터 미곡(米穀)을 해외로 수출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이를 금지한 일이 없으나 혹 어떤 일로 인하여 경내의 식량 결핍이 염려되어 잠시 미량(米糧)의 수출을 금지할 경우 지방관이 통지한 뒤에는 중국 관청에서 각 항구에 있는 무역 상인에게 일체 준수하도록 전칙(轉飭)해야 한다. 제7관 양국 상인이 물품을 속여 팔거나 빚을 상환하지 않는 등의 일이 있을 때에는 양국 관리가 그 체납한 상인을 엄히 잡아서 빚을 상환하게 한다. 다만 양국 정부에서 대신 상환할 수 없다. 제8관: 중국 인민이 여권을 수령하고 한국의 내지에 가서 유람하고 통상하는 것을 허가한다. 다만 점포를 차려 매매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모든 화물을 몰수하고 원가를 따져 배로 벌금을 물린다. 한국의 인민 역시 여권을 수령하고 중국의 내지에 가 유람하고 통상하는 것을 허가하되 최혜국 인민의 유람 장정에 의하여 다같이 처리한다. 제9관
제10관 양국의 선척이 피차 부근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거나 혹은 식량과 석탄, 물이 떨어진 경우에는 항구 안으로 들어가 바람을 피하고 식량을 구입하며 선척을 수리하는 것을 허가해야 하며 모든 경비는 모두 선주가 부담하되 그 지방의 관민은 원조하여 필요한 물자를 제공해야한다. 당해 배가 통상하지 않는 항구 및 왕래가 금지된 곳에서 사사로이 무역을 하는 경우에는 이행 미행을 막론하고 지방 관청 및 부근의 해관 관원이 선척을 나포하고 화물을 몰수하며 법을 위반한 사람에게는 원가를 따져 배로 벌금을 물린다. 양국의 선척이 피차 해안에서 파괴되었을 때에는 지방 관청에서 그 소식을 즉시 수부(水夫)를 데리고 가서 우선 구호하고 양식을 공급해주며 한편으로 대책을 마련하여 선척과 화물을 보호하고 아울러 영사관에 통지하여 수부를 본 국에 돌려보내고 아울러 배와 화물을 건져낸 일체의 비용은 선주나 혹은 본 국에서 변제한다. 제11관 무릇 양국의 관원과 상인이 피차의 통상 지방에 거주하는 경우 모두 각색 사람들을 고용하여 직분내의 공예(工藝)를 돕게 할 수 있다. 제12관 양국의 육로(陸路)가 교차하는 곳에서 변방 백성은 종래부터 교역을 해왔다. 이번에 조약을 맺은 뒤에 다시 육로 통상 장정과 세칙을 정하였다. 변방 백성으로서 이미 국경을 넘어 농사를 짓는 자는 자기 직업에 안주하게 하고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되 이후 몰래 변계를 넘어가는 자가 있을 때에는 피차 모두 금지하여 사단을 일으키는 일에서 면하게 해야 한다. 시장(市場)을 어느 곳에 여는가 하는 문제는 장정을 협의할 때에 회동하여 상의하여 결정한다. 제13관 양국의 군함은 통상 항구의 여부를 막론하고 피차 모두 들어 갈 수 있으나 선상에 사사로이 화물을 싣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다만 선상의 각종 식용품을 구매하는 경우에는 모두 면세하도록 한다. 그 선상의 수부 등은 수시로 상륙하는 것을 허가한다. 다만 여권의 교부를 신청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내지에 들어가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다. 일로 인하여 선상의 소용 잡물을 되파는 경우에는 사는 사람이 납부해야 할 세금을 보충해 내야 한다. 제14관 이번에 체결한 조약은 양국의 어필(御筆) 비준을 기다려 늦어도 1년을 기한으로 하여 한국의 수도에서 상호 교환한 뒤에 이 조약의 각 관을 피차 본 국의 관원과 상인에게 널리 효유하여 모두 알고 준수하게 한다. 제15관 한중 양국은 본래 같은 글을 써 왔다. 이번에 체결한 조약 및 일후 공독(公牘)의 왕래에는 모두 중국 글을 사용하여 간이하게 한다. |
4. 결과
한청조약은 15조의 본문으로 구성되었는데, 1조는 양국의 우호와 더불어 쌍방의 공평한 상민 보호를 강조하고 있다.
3조는 쌍방의 관세 자주권을 규정했는데, 청나라 통상 항구에서 한국 상인은 청나라의 해관 장정에 의해, 한국 통상 항구에서 청나라 상인은 한국의 해관 장정에 의해 세금을 징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체의 장정과 세칙은 모두 최혜국과 맺은 장정 세칙과 같이 한다고 규정되었다.
5조는 영사 재판권에 관해 규정하였다. 기존 1882년 조청장정에서는 영사 재판권 행사가 한국에서만 적용되는 일방적인 것이었다. 한국 거주 청국인에 대해서는 영사 재판권을 인정하고 있는 반면에, 청국 거주 조선인 문제는 청국의 재판 관할권에 속했던 것이다. 이것은 통상 조약에서는 양국 교섭 사건의 관할이 모두 피고에 대한 영사 재판권으로 결정되었고, 피고 본국의 법률을 적용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8조는 양국 상인의 내지 통상권에 관한 것이다. 이 규정에는 한국 거주 청나라 상인에게는 점포 개설을 제한하면서도 청나라 거주 한국 상인에게는 그러한 제한을 가하지 않았다. 한상(韓商)에게는 최혜국 대우를 인정한 반면 청상(淸商)에게는 그러한 대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청조약 발효 직후 두 나라는 조약 8조의 ‘내지 개잔’ 금지 문제와 관련하여 대립하였다. 즉 한국은 한국 내지에서 ‘개잔(開棧)’은 물론이고 ‘임방(賃房)’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청나라는 ‘개잔(開棧)’과 ‘임방(賃房)’을 개념적으로 구별하고 조약에 내지에서의 ‘임방(賃房)’을 금지하지 않았다는 논리로 대응하였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한국과 청나라는 다시금 외교가 단절되었다. 한국 주재 청나라 공사관은 주일 청나라 공사 휘하 주경성 영사관으로 개편된다.
3조는 쌍방의 관세 자주권을 규정했는데, 청나라 통상 항구에서 한국 상인은 청나라의 해관 장정에 의해, 한국 통상 항구에서 청나라 상인은 한국의 해관 장정에 의해 세금을 징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체의 장정과 세칙은 모두 최혜국과 맺은 장정 세칙과 같이 한다고 규정되었다.
5조는 영사 재판권에 관해 규정하였다. 기존 1882년 조청장정에서는 영사 재판권 행사가 한국에서만 적용되는 일방적인 것이었다. 한국 거주 청국인에 대해서는 영사 재판권을 인정하고 있는 반면에, 청국 거주 조선인 문제는 청국의 재판 관할권에 속했던 것이다. 이것은 통상 조약에서는 양국 교섭 사건의 관할이 모두 피고에 대한 영사 재판권으로 결정되었고, 피고 본국의 법률을 적용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8조는 양국 상인의 내지 통상권에 관한 것이다. 이 규정에는 한국 거주 청나라 상인에게는 점포 개설을 제한하면서도 청나라 거주 한국 상인에게는 그러한 제한을 가하지 않았다. 한상(韓商)에게는 최혜국 대우를 인정한 반면 청상(淸商)에게는 그러한 대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청조약 발효 직후 두 나라는 조약 8조의 ‘내지 개잔’ 금지 문제와 관련하여 대립하였다. 즉 한국은 한국 내지에서 ‘개잔(開棧)’은 물론이고 ‘임방(賃房)’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청나라는 ‘개잔(開棧)’과 ‘임방(賃房)’을 개념적으로 구별하고 조약에 내지에서의 ‘임방(賃房)’을 금지하지 않았다는 논리로 대응하였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한국과 청나라는 다시금 외교가 단절되었다. 한국 주재 청나라 공사관은 주일 청나라 공사 휘하 주경성 영사관으로 개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