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1. 개요
2. 세부 규정
프랑스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된다.
2.1. 투표 방식
2.2. 선거권 / 피선거권
선거권자: 18세 이상의 프랑스 시민이며, 선거인명부에 등재되어 있는 경우 선거권을 가진다.
피선거권자: 선거권을 가진 18세 이상의 프랑스 시민이며, 500명의 추천인(자치단체장, 유럽의회 의원, 프랑스 의회의원, 지방의회 의원 등 선출직 공직자)로부터 지지서명을 받을 수 있는 경우 입후보할 수 있다. #
피선거권자: 선거권을 가진 18세 이상의 프랑스 시민이며, 500명의 추천인(자치단체장, 유럽의회 의원, 프랑스 의회의원, 지방의회 의원 등 선출직 공직자)로부터 지지서명을 받을 수 있는 경우 입후보할 수 있다. #
3. 역대 선거결과
3.1. 제2공화국
3.1.1. 1848년
- 루이 나폴레옹 - 5,434,226(74.44%)
- 루이 외젠 카베냐크 - 1,448,107(19.65%)
- 알렉산드르 르드뤼-롤랭 - 371,431(5.08%)
2월 혁명의 결과로 모든 남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졌고, 국가원수를 보통선거로 뽑기로 하여 프랑스 사상 첫 대통령 선거가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결선투표제가 없이 과반이 없으면 국민의회가 대통령을 선출했는데, 과반을 얻을 만한 후보가 없어 임시정부 수반으로 상당한 정치력을 가졌던 루이 외젠 카베냐크의 당선이 유력했지만, 정치 경력이 거의 없었던 루이 나폴레옹이 갑툭튀해 보나파르트주의를 부르짖었고, 이를 통해 보수적인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노동자들 역시 1848년 6월 봉기 당시 자신들을 무참히 진압한 부르주아 세력들에게 치를 떨면서 나폴레옹에게 대거 표를 던졌다. 따라서 루이 나폴레옹이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이후 쿠데타를 일으켜 의례적인 국민투표를 통해 프랑스 황제가 되고 프랑스 제2제국을 열었다.
3.2. 제5공화국
3.2.1. 1958년
- 샤를 드골: 62,394(78.51%)
- 조르주 마란: 10,355(13.03%)
제5공화국 최초의 선거였으며 이때는 간선제로 선출하였는데 당시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한 전쟁영웅 샤를 드골의 압승으로 끝난 선거였다.
3.2.2. 1965년
- 샤를 드골: 13,083,699(55.2%)
- 프랑수아 미테랑: 10,619,735(44.8%)
58년도와는 달리 1962년에 국민투표를 통해서 직선제로 선출하는걸로 바뀌었으며 샤를 드골의 압승으로 끝날거란 예상과는 달리 좌파단일 후보였던 미테랑의 선전으로 2차 결선투표까지 치뤄졌다.
3.2.3. 1969년
- 조르주 퐁피두: 11,064,371(58.2%)
- 알랭 포에르: 7,943,118(41.8%)
샤를 드골이 68혁명의 영향으로 본인이 제시한 국민투표선거에서(드골 항목참고) 지면서 부결되어 69년도에 바로 사임하였기에 곧바로 선거가 치뤄졌다. 그리고 1차 투표에서 좌파 후보들이 전부 탈락하고 대선에서 중도파 알랭 포에르와 드골파 우파 조르주 퐁피두의 대결로 이뤄졌지만 2차 투표에서 프랑스 공산당이 알랭 포에르 후보 지지선언을 거부하고 1차 선거결과에 실망한 좌파 지지자들이 대거 투표에 불참하며 투표율이 68%로 낮게 나왔다. 1차 투표와 2차 투표 결과를 비교하면 조르주 풍피두는 1차 투표보다 100만표 남직 더 추가하는데 그쳤지만 알랭 포에르가 공산당 표 흡수에 실패하여 싱겁게 풍피두 후보가 당선되어 드골파 정권이 연장되는 결과를 만들었다.
3.2.4. 1974년
ORTF의 출구조사 발표 영상(바쁜 사람은 2분 50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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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스카르 데스탱: 13,396,203(50.8%)
- 프랑수아 미테랑: 12,971,604(49.2%)
이번에는 또 퐁피두가 사망하면서, 5년만에 다시 선거가 치뤄졌다.
이때 미테랑은 프랑스 본토에서는 이겼지만 외국령, 부재자 투표에서 밀렸는데(이게 결정적이었다) 여기서 부정선거의혹이 제기되는 등 자세한 내막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다지 깔끔하게 치뤄진 선거는 아니었다.
3.2.5. 1981년
Antenne 2의 출구조사 발표 영상(바쁜 사람은 40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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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수아 미테랑: 15,708,262(51.8%)
- 지스카르 데스탱: 14,642,306(48.2%)
3.2.6. 1988년
Antenne 2의 출구조사 발표 영상(바쁜 사람은 50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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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수아 미테랑: 16,704,279(54%)
- 자크 시라크: 14,218,970(46%)
3.2.7. 1995년
France 3의 출구조사 발표 영상(바쁜 사람은 15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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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크 시라크: 15,763,027(52.6%)
- 리오넬 조스팽: 14,180,644(47.4%)
지난번에 미테랑에게 패배했던 자크 시라크가 다시 한번 도전해 결국 승리하면서 실로 오랜만에 다시 우파가 재집권에 성공했던 선거였다.비록 좌파는 패배했던 선거였지만 전에 있던 93년도 총선에서 대폭망...했던 거에 비하면 꽤나 선방했던 선거였다.[10]
3.2.8. 2002년
3.2.9. 2007년
France 2의 출구조사 발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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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 사르코지: 18,983,138(53.1%)
- 세골렌 루아얄: 16,790,440(46.9%)
3.2.10. 2012년
TF1의 출구조사 발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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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수아 올랑드: 18,000,668(51.6%)
- 니콜라 사르코지: 16,860,685(48.4%)
미테랑이 퇴임한 이후 무려 17년만에 다시 좌파가 정권을 잡았고. 사르코지는 31년 만에 지스카르 데스탱 이후 단임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후임 프랑수아 올랑드도 단임으로 끝났다.
3.2.11. 2017년
4. 관련 문서
[1] 한명을 투표로 뽑는 것이기 때문에 단수를 쓰는 것이 맞지만, 프랑스의 선거는 결선투표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지에서도 단수인지 복수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2] 원래는 7년이었고 연임에도 제한이 없었으나. 2000년도에 국민투표로 임기가 축소되었고. 2007년에 다시한번 개헌되어 1회만 연임이 가능하도록 바뀌었다.[3] 임기 축소 후 첫 대선이 2002년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의 선거부터는 우연히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와 치러지는 해가 같아졌다.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이후부터는 양국 대통령의 취임 시기도 5월로 거의 같아졌다.[4] 5공화국 성립 이래 모든 선거에서 1차 과반 득표자가 없었음.[5] 자크 아탈리의 미테랑 평전에 의하면 당시 미테랑이 크게 방심했던것이 컸었는데 대중연설에만 익숙한 그였고 점심먹고 낮잠을 자지않나...토론방송에 대해 심지어는 제대로 연습도 안한 상태였다고 한다. 유튜브에서 방송을 찾아보면 확실히 미테랑의 상태가 별로 좋은편은 아니었다.[6] 참고로 같은 우파였지만은 둘이서 추구하던 방향은 많이 달랐는데 시라크가 정통 드골파(보수주의) 였다면 데스탱은 중도우파(자유주의)였기 때문에 한동안 프랑스 우파는 드골파의 RPR 과 데스탱의 UDF 로 나뉘어졌었다.[7] 그리고 시라크의 경우에는 우파가 선거에서 져도 본인이 우파의 1인자가 되는것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정치적 판단으로 미테랑을 도왔고 또 본인의 판단처럼 우파의 1인자가 되어 한동안 좌파의 1인자였던 미테랑과 대립하였다.다만 미테랑이 시라크보다 더 한수위였지만...[8] 정확히 말하자면 시라크 본인으로써는 내정을 담당한게 큰 실수였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시라크는 권한이 많은 총리로써 그만큼 정치적 책임도 많이 져야 했고 본인에게 유리한 정책만도 펼칠 수가 없었기에 욕을 잔뜩 먹었다. 그리고 본인도 결국 지도자 중 한명이었기에 미테랑에게 정치적으로 공격을 해도 먹혀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것도 안했던 1995년에서야 시라크는 대선에서 승리하였다.[9] 참고로 미테랑은 프랑스 대통령 중에서 최장기간 집권한 대통령이다.[10] 선거에서 패배했는데 무슨 선방한거냐라고 할수있겠지만 93년도 프랑스 하원선거 당시 총 의석수가 577석였는데 사회당+기타 좌파정당 합쳐서 80석...밖에 얻지 못했을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당장 우리나라의 제17대 대통령 선거와 제18대 총선과 비교해보자[11] 결혼은 안했지만 4명의 자식이 있을정도로 사실상 부부였는데 올랑드가 대선을 치루기 2년 전쯤에 바람을 피운 상태여서... 둘의 사이가 이미 멀어질대로 멀어졌지만 대선에 영향을 줄까봐 대선이 끝날때 까지 서로 함구하기로 한거같다.[12] 심지어 세실리아와 사르코지는 서로가 유부남,유부녀(세실리아도 사르코지가 두번째 남편이었다)인 상태에서 바람을 피우고 이혼한 뒤 다시 서로가 재혼한 거다...[13] 다만 사르코지가 먼저 이혼을 통보한게 아닌 세실리아가 영부인으로써의 삶을 부담스러워 했기에 이혼을 요구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14] 이로서 사르코지는 역대 프랑스 대통령중에 최초로 임기중에 이혼하고 재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