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경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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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昌慶宮 景春殿
창경궁의 침전이다.
창경궁은 대비들과 왕실 가족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었기 때문에, 왕실 구성원들은 다른 궁궐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비교적 자유롭게 건물을 사용했다. 그래서 창경궁 내전 건물의 경우, 전각의 주인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모호한 점이 있으며 경춘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여러 기록 등을 볼 때, 대체적으로는 왕비와 대비 등 왕실 내 최고위급 여성들의 공간으로 많이 사용된 듯 하다.
이름은 성종 시기 창건할 때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던 서거정이 지었다.# ‘경춘’은 글자 그대로 풀면 ‘햇볕(景) 따뜻한 봄(春)’이라는 뜻이다. 순조는 후술할 《경춘전기》에서 ''경(景)'은 큰 것을, '춘(春)'은 장수함을 뜻하니 옛날과 지금에 걸쳐 축복하는 말'이라고 표현하였다.# 현판 글씨는 순조가 직접 썼다.#
창경궁의 침전이다.
창경궁은 대비들과 왕실 가족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었기 때문에, 왕실 구성원들은 다른 궁궐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비교적 자유롭게 건물을 사용했다. 그래서 창경궁 내전 건물의 경우, 전각의 주인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모호한 점이 있으며 경춘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여러 기록 등을 볼 때, 대체적으로는 왕비와 대비 등 왕실 내 최고위급 여성들의 공간으로 많이 사용된 듯 하다.
이름은 성종 시기 창건할 때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던 서거정이 지었다.# ‘경춘’은 글자 그대로 풀면 ‘햇볕(景) 따뜻한 봄(春)’이라는 뜻이다. 순조는 후술할 《경춘전기》에서 ''경(景)'은 큰 것을, '춘(春)'은 장수함을 뜻하니 옛날과 지금에 걸쳐 축복하는 말'이라고 표현하였다.# 현판 글씨는 순조가 직접 썼다.#
2. 역사
1484년(성종 15년) 창경궁 창건 때 지어졌다.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처음으로 거주했고 여기서 생을 마감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6년(광해군 8년)에 중건하였으며 다른 창경궁의 건물과 달리 이괄의 난 등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았다. 인조 때는 소용 조씨의 장남 숭선군의 부인을 간택하는 장소로도 쓰였다.#
숙종 시기엔 왕도 머물렀고#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는 폐비되었다 복위된 후 잠시 이곳에서 거주하다 승하했다.#
영조 때는 효장세자와 숙종의 세 번째 왕비 혜순대비(인원왕후)가 거주했고, 나중에는 혜경궁 홍씨가 살면서 여기서 의소세손과 정조를 낳았다. 정조는 즉위 후 어머니를 자경전으로 옮겨 모셨고 자신이 태어난 이곳을 수리하면서 탄생전(誕生殿)이란 편액을 붙였다. 순조 즉위 후 혜경궁은 다시 경춘전으로 돌아왔고 이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조와 순조는 생모와 친할머니가 주로 머물던 경춘전을 굉장히 각별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경춘전의 역사와 부모에 대한 효성 등을 담은 《경춘전기》를 지었다.
이후 효명세자 부부가 사용하였으며, 세자빈 조씨(신정왕후)가 헌종을 이 곳에서 낳았다.#
1830년(순조 30년)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1834년(순조 34년) 3월에 재건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창경원이 되면서 유물 전시실로 쓰여 내부와 외형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2000년대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숙종 시기엔 왕도 머물렀고#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는 폐비되었다 복위된 후 잠시 이곳에서 거주하다 승하했다.#
영조 때는 효장세자와 숙종의 세 번째 왕비 혜순대비(인원왕후)가 거주했고, 나중에는 혜경궁 홍씨가 살면서 여기서 의소세손과 정조를 낳았다. 정조는 즉위 후 어머니를 자경전으로 옮겨 모셨고 자신이 태어난 이곳을 수리하면서 탄생전(誕生殿)이란 편액을 붙였다. 순조 즉위 후 혜경궁은 다시 경춘전으로 돌아왔고 이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조와 순조는 생모와 친할머니가 주로 머물던 경춘전을 굉장히 각별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경춘전의 역사와 부모에 대한 효성 등을 담은 《경춘전기》를 지었다.
이후 효명세자 부부가 사용하였으며, 세자빈 조씨(신정왕후)가 헌종을 이 곳에서 낳았다.#
1830년(순조 30년)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1834년(순조 34년) 3월에 재건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창경원이 되면서 유물 전시실로 쓰여 내부와 외형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2000년대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3. 구조
- 대청 3칸의 정면은 툇마루가 밖으로 드러나 있고 문을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단, 칸마다 가장자리에 난간을 두었고 가운데 칸의 난간 중간에 사람 한 명 정도가 지나다닐 공간을 두어 실질적으로는 가운데 칸으로만 다닐 수 있게 하였다. 뒷면엔 문이 없어 출입이 불가능하다. 건물 바깥 면의 창호는 창과 문을 포함하여 전부 띠살이다. 양 측면의 경우, 온돌방이 있는 2칸은 문선을 두고 가운데에 창을 놓은 뒤 나머지는 벽으로 마감했으며 서쪽(건물 뒤쪽) 툇간의 외면에는 창을 두고 중방 위를 벽으로 두었다. 동쪽 툇간의 외면은 벽 없이 교창과 문이 달려있는데, 원래 경춘전 측면에 가퇴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궐도》 경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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